2012 뉴비전 신진 평론가 발굴 프로젝트 당선자_안소연 ②예심 및 본심 심사평
2012 / 12 / 11
아트인컬처 주최 신진 평론가 발굴 프로젝트 ‘New Vision 미술평론상.’ 9월부터 본지 지면에 소개한 세 차례의 본선 프로그램(전시리뷰, 작가 인터뷰, 자유주제 평론)을 거쳐 제6회 New Vision 주인공이 탄생했다. 당선자는 안소연. 그동안 FEATURES에 등재한 본선 프로그램에 이어 art in culture 12월호에 실린 ①당선 소감 및 선정 경위 ②예심 및 본심 심사평을 두 차례에 걸쳐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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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New Vision 미술평론상
심사위원
예심
임근준 미술 디자인평론가,
정연심 미술평론가,
정현 미술평론가
본심
고충환 미술평론가,
심상용 미술평론가,
최은주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예심 심사평
평론은 가치관이자 태도, 예술을 향한 깊은 애정이 우선
글|정현·미술평론가
우선 파이널리스트 3인 강정호 김용진 안소연에게 축하와 격려의 마음을 보낸다. 3달 동안 평론을 연이어 잡지에 기고한다는 것은 상당한 노력과 강단이 필요한 일이다. 3명 모두로부터 미술을 향한 열정과 이를 대하는 진지함을 발견했다. 앞으로 이들이 평론 문화에 신선함과 긍정적 차원의 자극을 주기 바라는 마음이다.
먼저 강정호에게서 현대미술과 현실 사이에서 ‘과연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고민의 깊이와 진심이 느껴졌다. 미술이 소개되는 방식과 실제 미술을 체감하는 현실 사이에는 상당한 온도차가 있는 게 분명하다. 강정호는 많은 사람이 느끼고 있지만 선뜻 얘기하기 어려운 주제를 다루어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본인의 관점이 강한 것은 평론가로서 중요한 자질이지만 중립적으로 사건을 기술하고 정리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펼쳐야 할 경우도 잊지 않기를 바란다. 김용진의 글은 친절함이 강점이었다. 적절한 정보와 평론의 균형감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글의 논지가 다소 산만했으며 의도적으로 결론에 맞추려는 인상도 받았다. 앞으로 기고를 통해 자연스레 보완되기를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올해 최종 당선자인 안소연의 장점은 무엇보다 잘 읽히는 글을 썼다는 점이었다. 특히 구동희와의 인터뷰는 적당히 유머러스하면서도 작가의 창작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진행의 능숙함이 인상적이었다. 김수자와 안규철의 작업을 ‘장소특정성’과 ‘실재’와의 모호한 관계를 추론하려는 의도도 흥미로웠다. 신선한 해석에도 결론 부분은 다소 급박하게 처리한 듯한 느낌을 주어 조금 아쉬웠다. 아마도 시간의 부족함과 지면의 제한 때문이리라 추측된다.
평론가란 직업 이전에 가치관이며 이에 따른 태도를 보이는 게 중요하다. 누구나 평론을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평론가가 될 수 없는 이유다. 평론의 바탕에 예술을 향한 깊은 애정이 자리 잡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또한 평론가와 학자 또한 서로 다른 주체이다. 무엇보다 평론가는 시간과 싸워야 하고 실제 현장과 관계를 맺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화의 물결이 지역 미술의 자생력을 점점 함몰시키는 시대이다. 현장의 평론가는 무엇보다 자신이 사는 지역의 사건을 다루는 게 중요하다.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닌 가까운 곳의 사건을 지각하고 인식하는 것, 그것이 평론가의 삶인 듯하다. 다들 잘 알고 있겠지만 평론가의 현실 또한 매우 척박하다. 그럼에도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은 실제 사건 작가 기획자와의 만남이 예술을 더욱 깊게 이해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마지막으로 수상자를 비롯한 두 후보 모두에게 앞으로의 적극적인 활동을 기대한다.
새 모범생 동료를 맞는 기쁨, 장족의 발전을 기원한다
글|임근준(이정우)·미술, 디자인 평론가
파이널리스트 3인의 글을 기대 반 우려 반의 마음으로 읽었다. 예심에서 봤던 장단점이 고스란히 드러난 결과였기에,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기대 이상의 글을 만나는 즐거움은 없었다. 리뷰 경쟁에선 김용진 안소연 강정호의 순으로, 인터뷰 경쟁에선 안소연 강정호 김용진의 순으로 우열을 가렸다. 자유 평론에선 안소연과 김용진이 엇비슷했고, 그다음이 강정호였다. 연구 대상이 되는 작가와 작품을 다각적으로 고찰하고 해석하려는 노력보다는, 기왕에 아는 바에 작가와 작업을 두드려 맞추려는 경향이 강하게 드러나, 다소 실망감이 들기도 했다. 다른 심사위원은 어떻게 평했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1등으로 안소연을, 2등으로 김용진을 꼽았다.
안소연의 평문은 시종 성실하고, 허투루 멋을 부리는 경우가 드문 터라, 인터뷰와 자유 평론 모두에서 안정적인 모습이었다. 예심에서도 그는 완성도 면에서 단연 1등이었다. 그가 승자로 뽑혔다는 소식을 들으니, 새 모범생 동료를 맞는 기분이다. 앞으로 기고를 거듭하며 장족의 발전을 이루길 기원한다.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심사 방식의 개선에 관해선, 어찌해야 좋을지 잘 모르겠다. 지면을 늘인다고 무조건 변별력이 상승하진 않겠으나, 적어도 인터뷰는 심층적 답문이 이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파이널리스트 3인 모두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박수를 보낸다.
미술평론가는 ‘1차 해석자’들, 그 역할과 책임을 위하여
글|정연심·미술평론가
‘New Vision 미술평론가상’은 신진 평론가 발굴뿐 아니라, 미술계에서 미술평론의 역할과 책임을 공감할 기회를 되새겨 볼 기회를 제공한다. 파이널리스트 3인 강정호 김용진 안소연은 지난 3달 동안 범주가 다른 세 편의 글을 발표했다. 모든 글에서 각자의 개성과 특징이 느껴지기 때문에, 실은 우열을 가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글의 내용뿐 아니라, 미술평론에서 견지될 태도의 문제라든가, 미술평론이 아우를 수 있는 범주의 글이나 영역 등을 다각도로 조명해 보면, 파이널리스트는 각자 잘 다루는 영역이 있었다.
강정호의 글은 윤향로의 개인전을 다룬 <두 가지의 현실 사이>에서 자신의 개성을 잘 드러냈다. 강정호는 자유주제 평론에서도 앞으로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평론계에서 활동하리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어조는 작품 평론의 대상에 감정이입해 다소 감정적인 부분이 글에서 드러났다.
김용진의 자유주제 평론문 <몸의 사건>은 미술이론적 토대를 끌어와서 젊은 작가의 작품을 ‘몸 담론’에 근거해 다뤘다. 개성 있는 작가를 아우르는 통합적인 시각은 논리적이었으나, 글의 내용 전개에 다소 비약이 있었다. 그러나 미술평론에 필요한 이론적 베이스를 바탕으로 앞으로도 많은 활동을 할 가능성이 충분히 내재해 있다고 보았다.
안소연의 평론적 글쓰기는 어렵게 읽히지 않고 다양한 장르를 소화할 탄력성이 있었다. 김용진과 마찬가지로 미술이론 베이스로 미술평론의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안소연은 글의 밀도를 높이는데 앞으로 더욱 분발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세 평론가 모두 이처럼 각자 잘하는 영역이 있다 보니, 세 분야에서 모두 뛰어난 평론글로 파이널리스트를 선정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다. 세 영역의 글을 살피다보니, 한 명으로 파이널리스트를 귀착하는 데 변별력이 부족한 것도 어려움 중 하나였다. 다만 세 글에서 두루 깊이 있는 글을 제시한 안소연이 근소한 차이로 파이널리스트에 선정했다. 세 평론가 모두 우리 미술계에서 필요한 사람들이다. 미술평론가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한 시점에 한국 미술계를 위해 앞으로 많은 활동을 하기를 바란다.
‘New Vision 미술평론가상’은 2010년 프로그램을 대폭 수정했다. 신진 평론가의 다양한 관점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새로웠지만, 너무 많은 영역을 다루기보다 한 영역을 깊이 있게 쓸 기회를 제안하면 어떨까 한다. 전시기획자가 카탈로그 글이나 평론적인 글을 모두 쓰게 되면서, 과거보다 미술평론의 입지가 약해지고 있다. 그러나 평론가는 동시대미술의 현장성을 글로 풀어 내며, 미술 현상을 이성과 감성으로 풀어내는 ‘1차 해석자’들이다. 위의 세 평론가는 이러한 역할을 훌륭하게 해나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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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제6회 New Vision 미술평론상' 파이널리스트 3인_왼쪽부터·김용진 안소연 강정호
본심 심사평
청년 미술평론가의 덕목, 작가와 작품 선정 신중해야
글|최은주·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근 10여 년간 대학 입시의 중요 관문 중 하나가 논술시험이다. 대학 당국을 비롯해, 수험생을 지도하고 훈련하는 교사들이나 앞서 입학에 성공한 선배들 모두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자기 생각을 자신의 글로 써라.’ 각기 다른 조건을 내건 수많은 대입 전형의 미로에서 길을 잃지 않고 대입이라는 관문을 뚫는 방법은 너무 단순하게도 이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대학 입시는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공정하면서 치열하다. 진정으로 노력한 자만 승리할 수 있으며, 이 좁은 문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청소년기에서 성인기로 발을 내디딜 수 있다. 일종의 통과의례인 셈이다. 미술평론가로 입문하려는 청년 문필가에게도 근본적으로 요구되어야 할 덕목 역시 이와 다를 바 없다. 현대미술의 양상이 제아무리 복잡하고 현란하더라도 그것을 보고 생각하고 이를 글로 표현하는 평론가의 눈과 손은 일치해야 한다.
평론가는 자신의 평론적 시각을 잘 전개할 수 있는 글감의 대상을 대부분 작품 혹은 작가에서 찾아 내야 하는데, 그에 관한 판단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 강정호는 정택용의 사진 작업을 단지 노동계의 현실을 담아 내는 지점에 놓아 두지 않고 평론을 하는 자신까지를 포함한 당대인의 삶에 비추고 나아가 이와 반대되는 허황한 ‘아트월드’에 관한 논의를 끄집어냄으로써 그 간극에서 새로운 평론적 논의의 가능성을 열고자 하였다. 그러나 ‘줄곧 내 마음이 쓰라렸던 까닭은’ 등의 표현이 자제되지 않아 냉정하게 전개되어야 할 글의 기조를 스스로 흐트러뜨리고 있다.
김용진이 택한 ‘몸’에 관한 담론은 이미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기조 아래에서 너무 많이 그리고 다각적으로 다뤄져 왔다. 물론 권오상 최수앙 김혜진의 작업이 이 논의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음을 김용진의 글을 읽는 독자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주제를 택한 신진 평론가에게 기대하는 바는 이전에 존재하는 논리적 틀에 작가의 작품을 꿰맞추어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평론가’ 김용진의 시각이라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최종 1인의 당선자로 선정된 안소연은 이불 김수자 안규철의 과거에서 현재까지의 작업에서 도출될 수 있는 ‘도시’라는 장소성의 문제를 제기했다. 도시성의 전복을 꿈꿨던 1990년대 이불의 도발적 퍼포먼스, <바늘 여인>의 메타포로 도시를 유랑한 김수자의 영상 작업, 광주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관계와 소통의 문제를 환기한 안규철의 작업까지가 언급되는 안소연의 글은 침착하고 분석적이다. 그러나 그가 택한 ‘도시’라는 주제가 현대미술의 맥락 속에서 작가에게 던져 주는 예민한 자극과 그에서 비롯되는 변화무쌍한 예술적 시도를 언급하면서도, 정작 작가 선정에는 너무 안이한 것이 아니었는가 우려를 하게 했다. 작가나 작품과 유리되어 공허한 주장만이 난무하는 평론이나 대상에 관한 정확한 분석과 비판을 상실한 둔감한 평론은 가치를 얻기 어렵다.
영혼 있는 전문가, 마음 있는 감각주의자를 바란다
글|심상용·동덕여대 교수
최종 심사에 올라온 세 후보자의 글쓰기에는 뚜렷한 차이가 확인된다. 적어도 내게 먼저 공감할만한 것은 강정호의 것이었다. 이는 강정호의 접근과 글쓰기에 관한 의심의 여지 없는 동의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두 후보인 김용진과 안소연의 글에 관한 질문 때문이었다. 따라서 먼저 김용진과 안소연의 읽기를 간략하게 되짚고, 강정호의 것으로 넘어가는 게 좋겠다. (지면상 예는 세 번째 미션인 ‘자유주제 평론’으로만 한정하겠다.)
먼저 김용진의 원고는 요약하자면 작품에 내재하는 ‘몸’ 담론 읽기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기호이자 권력이 작동하는 현장이며, 타자화와 소외, 영토화와 노예화의 중첩되는 전쟁터인 몸의 담론은 권오상 최수앙 김혜진의 세 작가로 함축되는 연결 부위를 지나면서 적당하게 상례(常禮)한 작가론으로 위상의 전환을 겪는다. 몸의 담론에 각인된 문명적 상황적 예각을 조명한다는 기대했던 접근이 돌연 세 작가의 미적 지위의 입증이라는 어떤 정당화의 담화 기제로 전치되면서 밭은 호흡으로 분해되고 말았다.
이런 ‘내적 상쇄’는 안소연의 접근에서 조금 더 극적인 방식으로 확인된다. 안소연은 적어도 김용진의 글에 비해 상당히 열려 있는 듯 보이는 문제, 즉 ‘미술가는 왜 도시의 순회를 그토록 열망하는가’로 요약되는 문제를 제기한 다음, 그 질문이 채 공명할 틈도 없이 곧바로 이불과 김수자와 안규철로 진입한다. 그리고는 세 작가를, 마치 언제나 그래 왔던 요식행사를 치르기라도 하듯, 지면을 매우 균등하게 할당하는 방식으로 잠깐씩 경유함으로써 통상적인 미술평론의 형식을 갖춘다. 이 때문에 정작 ‘도시로의 순회’라는 테마는 각기 충분히 상이한 도시를 문제로 삼는 것을 하나로 엮어 내기 위한 힘에 겨운 ‘괄호’기능으로 그치고 만다.
자주 수명을 다한 듯 보이는 ‘아트월드’에 관한 강정호의 글은 주관적 독백으로 빠져들고, 주장의 형식을 띤 비약 때문에 다음 문맥으로 건너뛰기도 한다. 독자는 당혹해하거나, 자주 그 리듬에서 소외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 행간에서는 진실을 다루는 사람에게서 한결같이 감지되는 마음(heart)과 때론 가혹한 자기성찰의 결이 느껴진다. 거짓을 향한 분노, 정의를 위한 감각, 약자를 향한 연민이 그 옆에 동반하는데, 이 때문에 그의 다른 결점의 정도는 한층 완화된다. 평론가든 작가든, 마음(존재의 핵심적인 차원인)이 소통되고 공유되는 게 중요하다. 막스 베버가 자신의 책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내렸던 자본주의 역사의 비관적인 미래를 환기할 때 특히 그렇다. 베버는 무엇보다 ‘영혼 없는 전문가와 마음 없는 감각주의자들’이 활개를 치는 문화의 미래를 내다보며 절망하곤 했다!
그런 베버가 지금 우리에게 묻는다. 자유를 만끽한다고 여기는 그곳이 혹 ‘철장 안’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예술과 문화의 영혼에까지 침투한 경제제일주의 관점에 맞불을 놓는 것에 관심이 없는, 안락한 대학 평론의 명백한 한계를 넘어서라고 요구한다. 자크 랑시에르는 ‘합의의 공간’에서 이탈을 꿈꾸고 기획하라고 충고한다. 세기를 넘는 이 진심 어린 조언의 공통점은 오늘날처럼 왜곡된 구조가 신화의 내용 없는 카피본을 양산해 내는 상황을 통렬하게 문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평론에 대한 나의 소신, 아마도 입장이라고 말하는 게 더 익숙할 것을 전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나머지 두 접근에 내재하는 두 필자의 장점에 대해 충분히 논하지는 못했지만, 글의 말미에나마 김용진과 안소연에게 차이 없이 깊은 격려의 마음을 전한다.
스트레오타입을 벗어난 신선한 평론의 장을 기대하며
글|고충환·미술평론가
심사 대상으로 필자들은 각각 전시리뷰, 작가 인터뷰, 자유주제 평론를 제출했다. 먼저 자유주제 평론을 보자. 개별 존재의 미적인 자기실현과 소외된 자아의 회복이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대로 확대되는 예술에 관한 강정호의 정의는 설득력이 있다. 인간답게 먹고 사는 것에 대한 예술 혹은 인간답게 먹고 살지 못하는 고통에 대한 예술에 대한 입장 역시 호소력을 가진다. 그러나 예술을 갑을 위한 예술과 을을 위한 예술로 구분하는 것은 이분법적이며, 그 당위성을 신자유주의 비판에서 끌어오는 것은 스테레오타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김용진의 일상을 반영하는 증거로서의 몸, 심리적인 사건이 드러나는 현장으로서의 몸, 공적규범과 사적규범이 충돌하는 지점으로서의 몸에 대한 분석은 종전에 논의됐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끌어온 몸 담론과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젠더 이론 역시 마찬가지이다. 도시를 매개로 각각 이불 김수자 안규철 세 작가를 호출한 안소연의 글은 도시의 개념과 작가의 매치가 좀 더 긴밀하게 이뤄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논의를 지지하기 위해 도입한 근거 역시 도시와 관련해 이전에 논의된 수준, 이를테면 도시회화, 도시 유목, 장소특정성, 각종 재개발 프로젝트로부터 파생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전시리뷰를 살펴보자. 강정호는 작가 윤향로의 전시에서 각각 영화관을 찾은 사람, 만화방을 찾은 사람, 연극을 관람하는 사람, 자신의 방에서 영화를 보는 사람으로 나타난 여가 생활이라는 가상의 상황을 설정했다. 이로부터 일종의 낯설게 하기로 평온한 일상의 이면에 도사리는 불안한 현실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폭로한 것이나, 따라서 더 이상 이 가상의 상황을 가상의 현실처럼 즐길 수만은 없는 공포를 읽어 낸 해석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김용진이 택한 <히든트랙>전은 중진작가를 초대한 전시로, 그동안 작가의 작업 레퍼토리 중 유폐되었던 작업을 새롭게 복원한 것이란 점에서 흔히 대표작이나 연대기적 기술로 흐르기 마련인 여타의 전시와 구별된다. 김용진의 분석은 분석이 무색할 정도로 전시에서 이미 주어진 기획의도와 특수성을 넘어서는 진척된 논의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국사회의 심리에 자리하는 알 수 없는 불안이며 실체가 없는 불안을 놀이터와 매치시킨 <플레이그라운드>전 리뷰에서 안소연은 놀이터를 작가의 개입과 해석 행위 때문에 실제 현실과 어긋나는 분열적 리얼리티가 드러나고 폭로되는 역설적인 장소로서 읽어 내고 있는데, 상당히 설득력 있었다.
마지막으로 작가 인터뷰에서 구동희를 인터뷰한 안소연이 돋보였다. 작가를 대상으로 필자는 작품이 친절한 것 같지 않다거나, 작품이 어렵다거나, 의미를 벗어나려는 강박과 동시에 언어에 주목하는 모순이 엿보인다거나, 의미를 겉돌게 하는 일종의 언어놀이를 하는 것 같다거나, 잘 짜인 시나리오를 들고 역설적으로 의미를 빠져나가는 게임을 하는 것 같다거나, 하는 여러 질문을 집요하게 묻는다. 왜 현대미술이 읽히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된 이 인터뷰는 작가로부터 꽤 의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리고 더러는 여전히 겉도는 답을 얻는다. 핵심을 파고드는 인터뷰의 정석을 예시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