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립 미술관의 ‘흥행 중독’

블록버스터 전시, 무엇이 문제인가
2026 / 04 / 10

최근 ‘거장’의 이름표를 단 블록버스터 전시가 국내 미술관을 휩쓸고 있다. 화려한 스펙터클로 관객을 유혹하지만, 그 이면에는 노골적인 상업성과 철 지난 시의성을 지적하는 비판이 꼬리를 문다. 필자는 최근 연일 도마 위에 오르고 있는 데이미언 허스트 개인전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국립현대미술관 서울 3. 20~6. 28)를 중심으로 이 뜨거운 논란을 집중 해부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데이미언 허스트(Damien Hirst) 개인전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가 베일을 벗기 며칠 전, 나는 어떤 광활한 플랫폼에서 한 익명의 개인으로서 이 전시를 둘러싼 논쟁을 공유한 바 있다. 금세기 ‘스타 작가’ 중 한 명인 허스트의 전시는 왜 환영과 동시에 손가락질을 받는가.

먼저 공적 자금 운용의 문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시민의 세금을 주요 재원으로 하는 기관이다. 그렇다면 문화 자본이 집중된 서울관에서 왜 큰 예산을 들여 이미 서구에서 충분히 조명받은 작가를 다시 소개해야 하는지 의문이 제기된다. 다음은 작품이 지닌 선정성의 문제다. 허스트의 작업은 동물의 사체를 전시하는 등 자극적인 소재를 통해 강한 이목을 끌어왔지만, 생명을 스펙터클로 환원해 상업적으로 소비한다는 비판 역시 지속되어 왔다. 만약 이 지점이 기획 과정 중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것이라면, 이번 전시 역시 그 소비 구조를 반복하는 데 그칠 뿐이라는 점에서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그뿐만 아니라 허스트의 전략이 여전히 시의성을 지니는가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남는다.

데이미언 허스트 개인전 전경 Photographed by Prudence Cuming Associates Ltd. © Damien Hirst and Science Ltd. All rights reserved, DACS 2026.

물론 상술한 지점에 대해서는 변론이 가능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국제적 영향력을 지닌 작가를 공공에게 소개할 필요가 있으며, 스펙터클이 일상화된 오늘날 허스트의 작업을 동일한 근거로 비판하는 것은 다소 상투적으로 보일 수 있다. 시의성을 판단하는 기준 역시 모호하다. 그러나 이 글의 목적은 찬반 입장을 상세히 나열하는 데 있지 않다. 대신 논란이 발생한 구조적 원인을 제시하고, 그 이후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

서두에서 언급한 게시물에는 1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그동안 미술에 관해 발언해 온 것들 가운데 가장 뜨거운 반응이었다. 이는 이번 전시가 미술계의 관심을 넘어 대중에게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뜨거운 감자’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단순히 허스트의 유명세만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수는 없다. 차라리 우리의 변화한 상황에 주목해보자. 프리드리히 키틀러는 “매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다”라고 말했다. 매체의 변화는 곧 관객이 작품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는 뜻. 한국 관객 역시 자국 문화예술 콘텐츠의 성장과 함께 미술에 더욱 익숙해졌으며, AI의 등장으로 과거보다 훨씬 더 쉽게 미술지식을 접하게 되었다. 더 이상 관객은 제시된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다. 여기에 SNS의 영향이 더해져 미술계 내부의 발언과 정보가 더 넓은 범위의 대중에게 가시화된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지식은 전문가 집단에 의해 독점되지 않으며, 관객은 작품이 놓인 제도적 맥락과 담론 구조까지 적극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리에 놓인다.

〈살아있는 자의 마음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 유리, 채색 철, 실리콘, 모노필라멘트, 상어, 포름알데히드 수용액 180×542×217cm 1991 Photographed by Prudence Cuming Associates Ltd. © Damien Hirst and Science Ltd. All rights reserved, DACS 2026.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논쟁을 ‘건강한 현상’으로 일단락하는 것은 아쉬움을 남긴다. ‘현대미술은 본래 논쟁적이다’라는 식의 원론적 해명이나, ‘실물을 볼 기회’ 혹은 ‘예술가의 진정성’과 같은 보편적인 수사 역시 이번 전시의 타당성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이제는 반복적인 해명 대신, 왜 이 시점에 이 전시를 이곳에서 해야만 하는지에 관해 더욱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근거가 선제적으로 요구되는 때가 아닐까.

결국 허스트의 전시를 둘러싼 논란과 논쟁의 본질은 변화한 매체 환경과 관객의 인식에서 기존 미술제도의 정당성이 자동으로 승인되지 않는 상황에 있다. 오늘날의 관객은 언제든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조건 위에 서있다. 그 목소리가 더는 주변적인 것만은 아닐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