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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물납제의전제조건

2021/05/09

프랑스의 모범 사례, 그 배경과 쟁점 / 손 이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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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285호금동보살입상.간송미술관은누적된재정난을해결하고자보물로지정된금동입상둘을경매에내놨지만유찰됐고,이후국립중앙박물관이구입했다.

기록과 문화유산은 국가 공동체의 영속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문화재와 미술품을 공동 자산으로 보는 인식이 부족하다. 주요 미술품은 물론이고 국보급 문화재마저 이곳저곳 흩어진 상태로, 일부 뜻 있는 수집가가 공공의 책무를 대신하는 실정이다.
최근 국회에 발의된 상속 증여세 개정안은 문화재와 미술품을 세금 대신 받는 미술품 물납제를 주요 골자로 한다. 이 제도는 민간에 흩어진 문화재를 모두가 공유하는 자산으로 만드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먼저 시행한 나라 가운데 프랑스가 이미 효과를 크게 누리고 있다. 제도 시행 후 물납받은 문화재를 루브르를 비롯한 주요 박물관에 채워 넣었다. 피카소미술관은 아예 소장품 전체가 물납품이다. 물납제가 없었다면 한정된 예산으로 방대한 문화재를 국가에 귀속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프랑스의 미술품 물납제 도입 배경은 68혁명이다. 68혁명은 중앙 정부가 보조금을 볼모로 시네마테크에 개입하려 한 데서 촉발됐다. 영화계의 반발이 점차 대학생과 노동자로 파급되어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결국 드골 정부가 무너졌다. 국회가 해산하고 대통령의 재신임을 묻는 몇 달간의 권력 공백 속에서, 당시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는 시위대를 진정시키기 위한 온갖 정책을 쏟아냈다. 혁명적 상황이 문화계에서 시작되었으므로 문화부가 적극적인 수습에 나서야 했던 것이다.
말로의 주요 조치는 시네마테크, 박물관, 미술관, 나중에는 음원 보존소까지 확장되는 모든 공공 문화 기관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한편, 그 운영을 위한 예산도 책임지고, 각종 지역 축제를 공적으로 후원하는 것이었다. 이 정책의 근간은 다음 같은 철학이다: 문화는 공동체 전체가 공유하는 것이다. 세대를 거쳐 꾸준히 발전하기에 적절히 보존해야 한다. 그러므로 문화 기관은 정권의 입김에서 벗어나 자율적으로 운영돼야 한다. 이것이 나중에 미테랑 정부에서 더욱 구체화될 ‘문화 국가’ 모델의 시작이었다.
그 가운데 1968년 12월 일반세법에 포함되어 시행한 미술품 물납제는 공공 박물관과 미술관에 거액의 추가 예산을 편성한 것과 같은 조치였다. 박물관과 미술관은 예산을 받는 대신, 소장자가 세금으로 납부한 문화재와 미술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제도는 프랑스에서 활동한 예술가가 남긴 수많은 작품을 시민 모두의 소유로 환원했음은 물론이요, 체계적인 수집으로 예술연구 붐을 일으켰다. 그럼으로써 프랑스 시민의 문화 향유 수준을 크게 높였다.
즉 미술품 물납제의 요점은 다른 일에 쓸 수도 있는 국가 예산을 문화유산 수집에 돌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상속 증여세 개정안의 찬반양론도 여기서 갈려야 한다. 국가적 문화유산을 공공 기관이 수집,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찬성할 것이고,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국가 재정 부담을 고려한다면 반대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 반대 의견은 재정 우려가 아닌 다른 이유에서 나온다. 물납제를 정상적으로 운용하기 위한 장치가 우리에게 전혀 없다는 이유다. 그리고 이 의견은 타당하다.
프랑스와 우리의 환경은 다르다. 외국에서 성공한 정책이 우리에게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환경의 차이를 짚자면, 프랑스는 미술품에 표준 관세를 부과한다. 100년 이상 된 것은 관세가 면제되지만 여전히 부가 가치세가 남아 있다. 한국은 미술시장을 활성화한다는 명목으로 미술품과 골동품에 수입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세관 감정관실을 거쳐 들여올 수 있지만, 해당 물품이 미술품 또는 골동품인지 여부를 판단할 뿐, 물품의 수입 가격을 판단하지 않는다.
이 차이는 문화재가 국내에 반입되는 순간부터 그 실제 가격이 기록되는 환경과 그렇지 않은 환경의 차이다. 또 프랑스는 물납제를 시행하기 한참 이전부터 예술가의 저작권을 강력하게 보장하고 있었는데, 특히 1920년 시행된 지적 재산권법에 따라 미술품이 재판매될 경우 원저작자인 예술가에게 로열티를 지급해야 한다. 세금도 당연히 따라붙는다. 따라서 자국에서 거래되는 미술품의 실거래가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만일 고가의 작품을 구입한 이의 자금 출처가 의심스럽다면 감찰 기관이 조사에 나설 수도 있다.
한편 우리는 이렇게 가격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주로 두 가지 방안이 거론된다. 하나는 국가 감정 기관 설치고, 다른 하나는 미술품 등록제다. 두 방안 모두 한계가 있다. 우선 감정 기관을 따로 설치하더라도 그 공정성과 신뢰성에 끊임없는 의문이 제기될 것이다. 여전히 미술품의 실제 가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감정 기관 재량에 따라 자의적인 가격을 매길 가능성이 크다. 합리적인 가격을 매겼다 하더라도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또 미술품 등록제는 무엇을 예술로 간주할 것인지 기준이 모호하다. 아직 예술로 대우받지 못하지만 가까운 미래에 예술이 될 분야가 있는 반면, 이미 예술로서 기능을 거의 상실했음에도 관습적으로 예술로 간주되는 분야도 있다. 등록제는 그런 요소를 보지 않고 공인된 예술과 그렇지 않은 예술을 제도적으로 분리한다. 게다가 예술의 범위는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데 한국은 예술의 범위가 대단히 협소하다. 예를 들어 미국 등은 타투를 예술로 보고 이미 그 지적 재산권을 법률로 인정하지만 한국은 비합법 영역에 두고 있다.
결론은 이러하다. 미술품 물납제는 공공의 관점에서 매우 좋은 제도다. 문화유산을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영구히 보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제도를 운용하려면 땜질식 처방이 아닌 본질적인 장치, 즉 자금 세탁과 조세 회피가 불가능한 수준의 질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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