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없음’의 의미

이끼바위쿠르르 <거꾸로 사는 돌> 2채널 비디오, 4K, 사운드, 10분 50초 2024 Courtesy of artist ⓒ 2026. All rights reserved

작품 제목이 <무제>로 비어있다고 해서 이름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올가을 한국 미술씬에서 가장 무거운 의미를 품은 것은 이름을 잃어버린 광주비엔날레 대만 파빌리온이었다. 광주비엔날레 측은 지난 6월 ‘대만관’이라는 이름을 ‘국립대만미술관관’으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이에 대만 정부와 참여 작가들이 강력히 항의했고, 8월 말이 되어서야 원래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 파장 속에서 중국관 작가들이 돌연 설치를 중단하고 전면 철수하는 파행이 이어졌다. ‘대만관’은 앞선 비엔날레에서 별다른 문제 없이 쓰였던 이름이다. 그런데 누가 왜 이번에 그 이름을 지웠는지는 끝내 해명되지 않았다. 중국에 대한 외교적 고려가 있었느냐는 질문에 재단은 답할 수 없다고 했고, 윤범모 대표이사는 결정의 주체를 실무진으로 돌렸다.

“우리는 예술기관이고 정치는 정치다. 순수예술 행사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9월 개막 간담회에서 나온 윤 대표의 말이다. 논란에 대한 사과가 앞섰고, 기관관과 국가관을 가르는 제도가 혼란을 낳았다고 덧붙인 해명도 일리는 있었다. 그러나 ‘정치는 정치, 예술은 예술’이라며 그어버린 선은 그 그림자가 너무나 짙고 길다. 비엔날레가 현실의 외교전에서 한발 물러서려는 태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술과 정치는 그렇게 단순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난민, 디아스포라…. ‘누가 스스로의 이름을 걸고 발언할 수 있는가’를 가르는 일이야말로 예술에서 벌어지는 가장 노골적인 정치다. 파빌리온의 이름을 지우는 순간, 비엔날레는 이미 그 정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간 셈이다. ‘순수’라는 수식어는 예술이 정치와 무관하다는 낡은 환상을 불러낼 뿐, 이번 결정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는 끝내 말해주지 않는다.

이 말이 유독 아프게 들리는 까닭은 화자가 ‘윤범모’였기 때문이다. 12년 전, 제10회 광주비엔날레 20주년 특별전에서 광주시는 홍성담의 <세월오월>을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문제 삼았고, 재단은 전시를 유보했다. 책임큐레이터였던 윤범모는 사퇴 의사를 밝히면서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과,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 광주정신”이라는 말을 남겼다. 현실을 향한 발언을 예술의 책무라 외쳤던 그가, 이제는 기관의 자리에서 예술과 정치 사이에 선을 그었다. 이를 한 사람의 변화로만 탓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바뀐 것은 정치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에 따르면 오늘의 정치는 더 이상 정치의 이름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행정, 제도, 절차, 전문성 등으로, 마치 예술처럼, ‘순수’라는 옷을 입고 나타난다. 정치를 부정하는 언어가 정치가 가장 안전하게 작동하는 은신처가 된다. 권력은 무엇을 금지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각자에게 자리와 이름을 나누어 주고, 그 배치를 흔드는 목소리 앞에서 “지나가라, 여기에는 볼 것이 없다”(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1990))고 말할 뿐이다.

2014년의 검열에는 이름과 얼굴이 있었다. 문제를 제기한 지자체가 있었고 맞서 사퇴한 큐레이터가 있었다. 2026년의 검열에는 얼굴이 없다. 압력은 국경 너머에서 외교와 경제의 형태로 오고, 요구한 이가 드러나기도 전에 실무자가 앞서 이름을 지운다. 억압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내면화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은폐가 중국 작가들까지 제 뜻과 무관하게 전시장을 떠나게 했다. 이 사태의 피해자는 이름을 빼앗길 뻔한 쪽만이 아니다. 10월호 특집은 지난달 대한민국미술축제 기간에 미술관 개인전을 연 여섯 작가와의 인터뷰로 채웠다. 구정아 이끼바위쿠르르 이수경 정연두 조숙진 함양아. 이들의 공통점은 보이지 않던 것에 형태를, 이름 없던 것에 이름을, 목소리를 잃은 것에 목소리를 돌려주는 일을 예술의 책무로 삼는다는 점이다. 랑시에르는 기존의 감각 배치를 흔들어 몫이 없던 이들을 무대로 올리는 일을 감각적 정치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이들의 작업은 정치를 말하지 않지만 가장 정치적이다. 이번 비엔날레의 제목은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 1845년 마르크스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썼다. 1873년에 랭보는 “사랑은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고 적으며 ‘삶을 바꿔야 한다’는 명제를 부쳤다. 20세기 초 프랑스, 러시아에서 시작된 아방가르드운동은 두 명제에 공감하면서 ‘삶을 바꾸기 위해 정치를 바꿔야 하고, 정치를 바꾸기 위해서 예술을 바꿔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치 없이 무엇이 가능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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