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진부해지기

2026년 9월호 에디토리얼
2026 / 09 / 01
요시코 시마다 & 부부 마들렌 <Procession for the Fallen Comrades and Fallen Angels> 퍼포먼스 2025 Photo by: Jacopo Salvi, Courtesy: La Biennale di Venezia

니체의 말이다. “진리는 그림이 사라질 정도로 표면이 닳아버려 더 이상 동전이 아니라 그저 쇠붙이로 여겨지는 동전이다.” 어떤 가치는 숱하게 반복되기 때문에, 닳아버린 동전처럼 무의미해진다. 사랑과 평화, 정의, 생태, 평등, 연대…는 얼마나 진부한 말인가.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반복된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뜻이고, 아직 그 정체가 온전히 답해지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니체는 같은 글에서 “은유를 뒤섞고 추상의 경계석을 옮겨놓”는 방식으로 굳어버린 진리를 다시 흐르게 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진부한 것을 다시 낯설게 보는 눈. 진부해진 것은 과연 가치인가, 아니면 그것을 바라보는/선보이는 우리의 눈인가. 사랑이 진부하다고? 현실은 그보다 더 진부하다. 지금도 국경에선 사람이 죽고, 성 소수자는 괴물 취급을 받으며, 숲은 잘려 나가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책무는 본 적 없는 새로운 가치를 찾는 일이 아니라 기꺼이 진부해지는 일일지 모른다.

9월호 특집은 베니스비엔날레를 다룬다.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는 <단조로(In Minor Keys)>. 소수자, 디아스포라, 생태, 토착민의 권리 등 이 전시가 호명하는 서사들은 동시대미술의 문법에서 이미 지나치게 익숙하다. 당장 지난 베니스비엔날레가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Foreigners Everywhere)>라는 기조 아래 원주민과 퀴어, 아웃사이더 예술을 대거 조명했고, 2022년 카셀도쿠멘타15 역시 인도네시아 전통의 나눔 경제 ‘룸붕(lumbung)’을 내세워 글로벌 사우스의 연대를 실험했다. 기후 위기와 탈인간 중심주의를 탐구했던 근래의 무수한 비엔날레까지 겹쳐보면 그 기시감은 더욱 짙어진다. 그러나 이번 기사는 기어이 뻔해지기로 했다. 오히려 그 익숙함을 더욱 깊이 파고들어, 닳아버린 동전의 궤적을 끝까지 추적해 보기로 했다. 개막의 열기가 한참 지난 9월에 베니스비엔날레를 꺼내 든 이유다. 전시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 아니라, 그 소란이 가라앉고 유의미하게 또 여전히 번지는 것들에 대해 전하고 싶었다.

그중 인상 깊었던 몇 작품을 옮긴다. 왈리드 라드의 <Postscript to the Arabic Edition>은 제국주의와 전쟁의 폭력이라는, 비엔날레에서 닳고 닳은 주제를 겨냥한다. 작가는 레바논 내전 이후 거래된 무기 상자 뒷면에서 아랍 전통회화를 발견한다. 그는 그 상자들을 그림 면이 드러나도록 세워 놓았다. 전쟁을 규탄하는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지만 미술사가 무기의 경로를 따라 흘러가다가 가장 뜻밖의 자리에 나타났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이, 폭력이라는 낡은 주제를 전혀 다른 각도로 비틀어놓는다. 예술이 폭력과 무관한 순백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상의 도구와 등을 맞댄 채 존재한다는 것. 예술과 전쟁, 일상과 역사 사이의 아득한 거리는 이 낡은 나무 상자 앞에서 단숨에 좁혀진다. 가장 무고하다고 믿어왔던 존재의 뒷면에도, 언제나 동시대의 비극이 그림자처럼 도사린다.

알프레도 하르의 <The End of the World>는 생태를 테마로 다뤘다. 붉게 물든 긴 방을 만들고, 그 끝까지 걸어가야 닿는 받침대에 4cm 남짓한 희토류 큐브 하나를 올려놓았다. 벽 라벨에는 그 금속이 얽힌 지정학의 그물이 담담히 적혔다. 손톱만 한 금속 하나가 스마트폰과 반도체와 전쟁을 쥐고 있다는 규모의 역설. 긴 방을 걷게 하는 그 몇 걸음의 거리가, 익숙한 주제를 몸으로 실감하게 만든다. 아르세날레 입구에는 가자에서 살해된 시인 레파트 알아리르의 시 몇 줄이 놓여 있고, 그 뒤로 할레드 삽사비의 영상 <khalil>이 관람객을 감싼다. “내가 죽어야 한다면 / 당신은 살아남아 내 이야기를 전해 달라”는 시구는 하나의 유언이다. 삽사비의 영상에는 굽은 스크린 위로 보랏빛 물감이 명멸할 뿐, 거기에는 더 이상 읽어야 할 의미는 없다. 둘의 결합을 통해서만 시가 전한 상실과 당부는 온몸을 통과하는 파동이 되고, 영상은 의미가 된다. 디아스포라라는 낡은 단어가, 머리로 아는 개념에서 몸으로 앓는 상태로 옮겨가는 순간이다.

나머지 작품들은 이어지는 지면을 위해 남겨둔다. 예술은 진부함을 피하지 않는다. 기꺼이 낡은 주제로 들어가 마멸된 표면을 새롭게 갱신해 냈다. 그다음은 우리의 차례다. 동전의 지워진 무늬를 기어코 더듬어 낼 새로운 눈으로 ‘가치’들을 마주할 준비가 되었는가. 이제 우리가 기꺼이 진부해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