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사람의 평범하지 않은 컬렉팅

2026년 8월호 에디토리얼
2026 / 08 / 01
프리즈 서울(2025) 전경 Photo by Wecap Studio. Courtesy of Frieze

“한국에도 평범한 사람들이 미술작품을 구매하는 문화가 있는지 궁금하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코야마 토미오가 던진 질문이다. 8월호 특집은 키아프, 프리즈 서울을 미리 짚는다. 토미오코야마갤러리의 설립자 코야마를 비롯해 안혜령(리안갤러리 대표), 박혜연(탕컨템포러리아트 서울 디렉터)을 만나 시장의 현황과 올해의 전략을 물었고, 두 아트페어에 출전하는 국내외 유수 갤러리의 대표 작가를 함께 조명했다. 코야마의 질문은 일본과 한국 시장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일본의 컬렉터층이 대부분 평범한 대중인 반면, 한국은 대기업과 공공 미술기관, 일부 부유층이 다수인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도 그렇냐는 것. 나는 최근 젊은 직장인 컬렉터가 눈에 띄게 늘었다고 답했다. 아트페어 관람객이 매년 늘고, 중저가 작품의 수요가 넓어지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은 내가 기사에서 여러 번 읽고 써왔던 문장이었지, 취재 현장에서 피부로 확인한 것은 아니었다. 답하는 동안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통계를 인용한 것이 아니라 분위기를 옮긴 것이다. 이 지면을 위해 준비해 둔 원고는 따로 있었다. 거래 규모의 하락, 블루칩 편중, 특별전이 다루는 이슈…. 페어를 앞둔 시점에 시장의 체온을 재는 글은 매년 필요하고, 올해는 재계약까지 겹쳐 쓸 말이 더 많았다. 그러나 그 표들을 다시 펼쳐 놓고 보니 제대로 답하지 못한 질문이 계속 맴돌았다. 숫자는 시장의 표면을 보여주지만, 그 내부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는 말해 주지 않는다. 코야마가 물은 것은 후자였다. 그래서 이번 에디토리얼은 우리를 돌아보기로 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미술작품을 ‘구매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작품은 개인의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 시장에서 사라진다. 기업과 기관이 구매한 작품은 언젠가 다시 무대로 돌아온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 산 그림은 거실에 걸린 채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시장의 언어로는 비유동성이지만, 달리 보면 한 점의 작품이 한 사람의 생애 안으로 들어가 함께 늙어가는 일이다. 전시의 시간은 길어야 두 달이고 관람의 시간은 몇 분이다. 소장의 시간은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다. 미술이 삶의 시간과 만나는 방식은 사실상 그것뿐이다. 벤야민은 컬렉터를, 사물을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양쪽에서 떼어내 다른 질서로 옮기는 사람이라 보았다. 거실의 그림은 쓸모도 없고 값도 매겨지지 않는 자리에서 매일 눈에 밟힌다. 우리는 이런 구매를 흔히 ‘가치 소비’라 부른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세계를 지지하는지 지출로 드러내는 일. 한 사람이 작품을 사는 순간, 그는 자신의 지향을 표명하는 동시에 그 지향이 계속 존재할 수 있는 조건에 돈을 댄다. 작가가 다음 작업을 시작할 수 있게 하고, 작은 화랑이 다음 전시를 열 수 있게 하며, 결과적으로 한 사회가 어떤 미술을 재생산할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문화를 누리는 일이 사회권에 속한다면, 개인의 구매는 그 권리를 시민이 스스로 떠받치는 행위에 가깝다. 소비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성격은 연대에 가깝다. 다양성은 선언으로만 지켜지지 않는다. 그것이 작동하는 때는 누군가 값을 치를 때다.

그렇다면 평범한 사람들이 미술작품을 구매하는 ‘문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평범한 사람이 작품을 산다는 것은, 평범하게 그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이해가 있어야 구매하는 문화가 생긴다. 여기에 수반되는 언어를 만들고 유통해 온 것이 미술잡지일 테다―교육과 기획, 대중문화 등의 역할을 열거할 수 있겠지만 책임질 수 있는 것만을 남긴다―. 지난 지면에 실린 단어를 떠올려 본다. 물질성, 수행성, 전유, 탈맥락화. 그중 어떤 말은 분명 대체할 수 없다. 그 개념이 아니면 붙잡히지 않는 작업이 분명히 있고, 정확한 언어를 포기하는 것은 매체의 직무 유기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그 말들이 정확해서 쓴 것보다 익숙해서 쓴 적이 더 많았다. 어려운 말은 종종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 사유를 생략하는 방법이었다. 어떤 문장이 특정한 씬 안에서만 통한다면 그것은 그 씬의 사정이지 외부의 무능이나 결핍이 아니다. 나는 오래 그 사정을 독자의 몫으로 돌려왔는지 모른다. 이번 호를 내고 편집부는 휴가를 떠난다. 나는 베니스비엔날레에 다녀오기로 했다. 아마 내내, 코야마의 질문은 계속 나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 시간을 다 보내고 돌아올 때 평범한 이 지면이 조금 더 평범한 언어를 갖고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