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이 ‘기념비’가 되는 순간

프리즈 서울 신세계라운지, 폴 콕스 특별전 <The Monumental Everyday>
2026 / 09 / 30
폴 콕스 개인전 <The Monumental Everyday> 부스 전경

매일이 특별할 수는 없다. 하지만 특별한 일은 매일 있다. 폴 콕스(Paul Cox)는 그 특별함을 발견하는 화가다. 작업실 창밖으로 날마다 이어지는 강과 언덕,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빛을 화폭에 옮겨왔다. 평범한 하루를 따뜻한 시선으로 오래 들여다보고 마침내 그 안에 깃든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 작가가 세상을 그리는 방식이다. 콕스가 프리즈 서울(9. 2~5 코엑스) ‘신세계라운지’에서 특별전 <The Monumental Everyday>를 열었다. 풍경화 연작 <Diary> 336점을 펼친다.

작업은 매일 저녁,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의 작업실에서 시작된다. 콕스를 가장 먼저 이끄는 것은 ‘백일몽’이다. 잠들지 않은 채 꾸는 꿈. 낮에 마주했던 풍경, 읽었던 책의 구절, 문득 떠오른 기억 등이 상상과 뒤섞여 느슨하게 떠도는 상태. 콕스는 이 몽상을 붓으로 붙든다. 손에 쥔 브러시와 눈앞의 종이에 몰입하며 “그 순간에 온전히 머무는 일”을 철칙으로 삼고, 심상을 색색의 구아슈로 되새겨 나간다. 그리고 이 과정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되풀이된다. 그가 이 연작을 ‘데이 페인팅’이라 부르는 이유다. 그렇게 화폭에 작업실 너머로 펼쳐진 시골 풍경이 옮겨진다. 완만한 언덕과 울타리 숲, 마을을 가로지르는 아루강이 화면에서 꿈틀거린다. 같은 언덕, 같은 강이라도 완성된 화면은 매번 다른 얼굴이다. 그날의 대기와 계절의 빛깔, 붓을 든 작가의 심상이 종이 위에 저마다 다른 온도로 스미기 때문이다. 콕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을 그리느냐가 아니라, 늘 곁에 있던 풍경에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해 내는 눈이다. 이런 태도의 뿌리는 작가가 보낸 유년에 닿아있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예술로 가득했다. 여름마다 네덜란드 중부의 오테를로 크뢸러뮐러미술관에서 반 고흐와 몬드리안, 인상파를 접했고, 10대에는 화가였던 삼촌의 소개로 피에르 알레친스키(Pierre Alechinsky)를 만나 처음 붓을 잡았다. 무엇보다 음악이 깊은 잔상을 남겼다. 작곡가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 아래에서 바이올린을 켜며 음악가를 꿈꿨다. 음악과 미술은 같은 감수성을 나누는 언어다. 작가에게 흰 종이를 채우는 일은 빈 오선지에 음표를 적어 넣는 작곡과 다르지 않다.

폴 콕스 개인전 <The Monumental Everyday> 전경

<Diary>를 읽는 열쇠도 여기에 있다. 동일한 크기의 종이는 일정한 간격의 마디가 되고, 하루하루의 관찰은 그 위에 놓이는 음표가 된다. 크레셴도와 디미누엔도는 한 색이 서서히 짙어지고 옅어지는 그러데이션으로, 도돌이표는 되풀이되되 조금씩 어긋나는 변주로 번역된다.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 또한 음악의 논리를 닮았다.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선과 선이 교차하며 면을 짠다. 손으로 실을 엮어 무늬를 만드는 태피스트리처럼, 느슨해 보이는 형상 아래에는 가로와 세로의 그리드가 단단히 깔려있다. 회화에 앞서 그래픽디자이너이자 포스터아티스트, 그림책 작가로 출판에 몸담아 온 이력이 이 감각의 바탕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리드가 ‘즉흥’을 억누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드는 규칙이지만, 그 안으로 흘러드는 대기와 계절, 기분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다. 일정한 박자가 오히려 선율을 자유롭게 하듯, 콕스에게 격자는 우연이 깃들 자리를 마련하는 틀에 가깝다. 불투명하고 빨리 마르는 구아슈는 이런 매일의 기록에 어울리는 재료다. 유화처럼 번들거리지 않아 빛을 되쏘지 않고, 차분히 가라앉은 색면으로 그날의 공기를 붙든다. 색을 섞어 하나의 톤으로 만들기보다 울타리의 초록과 강의 회청, 오솔길의 황토를 나란히 병치하는 방식도 눈여겨볼 만하다. 물감은 화면 위에서 섞이지 않지만, 한 발 물러서는 순간 관람객의 눈 안에서 뒤섞이며 하나의 대기로 피어난다.

<Diary> 종이에 구아슈 21×29.7cm(부분) 2026

풍경을 노래하는 시각적 교향곡

종이에 그리드를 긋고 색을 채워 나가는 이 더딘 노동에는 그림에 대한 콕스의 믿음이 담겨있다. 관찰과 사유, 인내의 시간이 쌓여야 비로소 ‘기념비’적인 결실에 이른다는 것. “인내심을 가져라, 한 포기 보잘것없는 풀조차 자신만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법이란다.” 언젠가 아버지가 했던 조언을 작가는 신념으로 삼아왔다. 그리고 그 믿음은 전시장에서 눈으로 확인된다. 동일한 규격의 그림을 위아래로 빼곡히 이어 붙인 설치가 이번 전시의 ‘킥’이다. 크기가 모두 같다는 점이 중요하다. 규격이 제각각이었다면 시선은 큰 그림에 위계를 부여했겠지만, 똑같은 종이에선 모든 하루가 동등한 무게를 얻는다. 그 어떤 날도 다른 날보다 사소하지 않다. 멀리서 보면 낱장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파노라마를 이루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형형색색의 선이 교차하며 빚어낸 작은 형상이 드러난다. 나무와 언덕, 산책길, 이웃의 얼굴…. 두 개의 거리는 두 개의 시간을 품는다. 바짝 다가선 눈앞에는 어느 하루의 저녁이 놓여있고, 몇 걸음 물러서면 수년의 시간이 한 벽으로 압축된다. 낱장을 좇던 시선은 어느새 악보를 읽듯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벽 전체를 훑는다. 가장 사적인 관찰이 흰 벽 위에서 웅장한 파노라마로 확장되는 순간, 전시 제목이 가리키는 ‘기념비적인 일상’이 완성된다.

이번 전시는 올해부터 5년간 프리즈 서울의 헤드라인 파트너로 참여하는 신세계그룹과 함께 마련했다. 평범하고 익숙한 매일이 지닌 아름다움을 나누자는 공감이 있었다. 수많은 작품이 경쟁하듯 시선을 빼앗는 프리즈 부스들 사이에서, 이번 전시는 정반대의 속도로 걸어간다. 아트페어의 이미지 홍수에 피로를 느낄 즈음, 라운지로 들어서면 바깥의 소음이 잦아들고 관찰과 사유로 빚어낸 일상의 은은한 아름다움이 다가온다. 라운지 외관을 채운 대형 파사드 <Diary 16 05 26>이 그 조용한 초대의 첫인사다. ‘2026년 5월 16일’. 이름조차 특별할 것 없는 하루. 그러나 이 평범한 저녁은 총총히 빛나는 색으로 엮은 교향곡이 되어 관람객을 감싸안는다. 매일 되풀이되는 일상은 이따금 무기력과 권태를 안긴다. 그러나 336장의 종이에 적어 내려간 콕스의 그림일기는 ‘어제와 똑같은 오늘은 하루도 없다’고 말한다. 맑은 날의 강물과 윤슬, 노을이 밴 언덕의 색이 저마다 다르듯, 우리의 평범한 삶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제각기 다른 빛으로 반짝인다. 속도와 효율만을 좇는 시대에 콕스의 전시가 남기는 것은 한 점의 그림을 넘어, 전시장을 나선 뒤 자신의 하루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하나의 ‘태도’다.

<Diary> 종이에 구아슈 21×29.7cm(부분) 2026
폴 콕스 / 1959년 파리 출생. 영문학, 미술사학 전공. 이타바시구립미술관(2021), 도쿄 크리에이션갤러리G8(2015, 2005), 마르세유 스튜디오포토키노(2015) 등에서 개인전 개최. 파리, 부르고뉴를 기반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