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것’, 회화와 패션의 미학

신세계갤러리 청담, 미국 작가 헨리 알렉산더 레비 개인전
2026 / 09 / 30
개인전 <성취의 끝에서 파멸을 보다> 전경

유명 패션디자이너 헨리 알렉산더 레비(Henri Alexander Levy)의 개인전(9. 2~10. 17 신세계갤러리 청담)이 열렸다. 레비는 패션 하우스 앙팡리쉬데프리메(Enfants Riches Déprimés, ERD)의 설립자다. 그는 미술을 공부했고, 회화를 패션의 미학적 뿌리로 삼아왔다. 이번 전시에는 회화, 입체, 드로잉 등 130여 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아시아에서는 첫 전시다. 전시 제목이 역설적이다. ‘최후의 성취는 폐허다 (Final Achievement is Ruin).’ 성취의 끝이 어째서 폐허인가. 여기서 ‘ruin’은 단순한 파멸이나 몰락을 뜻하지 않는다. 오래되고 닳고 바래고 풍화된 상태, 시간이 사물에 새긴 흔적까지 아우른다. 새것의 매끈함보다 오래된 것의 상처와 얼룩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 마모와 풍화도 미적 완성이 될 수 있다는, 이를테면 빈티지의 미학이다.

레비 작품의 핵심은 ‘낡은 것’들이다. 오래된 사진과 천, 남루한 의복, 한 시대를 거쳐온 다양한 문화적 기호들이 모티프로 등장한다. 수갑과 라이터, 벨트, 심리학 책 등 익숙한 오브제도 있다. 서로 다른 물건들의 아상블라주. 이 조합은 깔끔하고 세련되기보다 얼마간 당혹스럽다. 그러나 현대미술의 문법에 익숙한 눈에는 바로 그 당혹감과 낯섦이 매력으로 다가온다. 레비는 낡은 것을 복원하지 않는다. 이미 시간을 통과한 이미지와 오브제를 다른 문맥으로 옮겨 다시 충돌시킨다. 소재 자체가 ‘ruin’인 셈이다.

<무제(Brown Painting)>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릭, 오일 스틱, 연필, 직물 168.5×232cm 2026
개인전 <성취의 끝에서 파멸을 보다> 전경

대형 갈색 회화는 이번 전시의 중심이다. 갈색과 암갈색, 검정이 뒤섞인 어두운 화면 아래로 얼룩과 서로 다른 재료의 층이 비친다. 담배와 커피, 피와 차까지 회화의 재료로 끌어들인다. 물성이 서로 다른 재료를 한 화면에 뒤섞어 불완전한 감정의 구조를 만든다. 그렇다고 표면을 임파스토 기법으로 두껍게 발라 올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평평하다. 물질의 격렬함을 전면으로 밀어내기보다 화면 안쪽으로 차분히 가라앉힌다. 이 그림은 일견 추상표현주의 양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작품 앞에 서면 추상표현주의의 격렬한 감정의 분출과는 조금 다른 정서를 느낄 수 있다. 제스처는 절제되어 있고, 감정은 안으로 눌려있다. ‘정서적 압축(autoclave)’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오토클레이브’가 밀폐된 내부에 압력을 가하듯, 레비의 회화는 감정을 터뜨리기보다 응축한다. 넓은 암갈색의 필드가 묵직하게 버티고 있어, 그 위에 놓인 회화적 제스처 하나하나가 오히려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어두운 바탕은 이 작은 제스처를 삼키는 것이 아니라 그 진폭을 더한층 키운다. 감정의 양보다 밀도를 높인 회화다.

‘최후의 성취는 폐허다’

브론즈 조각 〈팔 없는 사람(Armless Dick Man)〉은 해골처럼 앙상한 인간 형상을 철장 안에 가두어 사슬에 매달았다. 팔과 손을 잃어 쓸모없어진 인간, 결핍과 소외의 인간! 사물의 ‘ruin’을 여기서는 인간의 신체로 옮겨왔다. 또 7m에 이르는 철망 구조물은 어딘가 통제와 감시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레비는 이전 패션쇼에서 레비는 철망 안에서의 퍼포먼스를 연출한 적이 있다. 이번 서울전에는 아쉽게도 퍼포먼스가 없었다. 수갑과 벨트, 철망 같은 요소를 함께 놓고 보면 ‘구속과 자유’라는 긴장이 떠오른다.
드로잉도 눈길을 끈다. 날것의 행위로 살아나는 선의 감각이 좋다. 화면의 손 글씨에는 특유의 정감이 흐른다. 문장의 내용에서는 때로 블랙 유머적 기운도 감지된다. 회화와 드로잉, 문자와 오브제, 입체가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도 전시장 전체에서는 하나의 세계 안에 머문다. 레비의 작품에는 이렇게 ‘ruin’의 다층적 힘들이 물리적, 사회적, 미학적 요소로 공존한다.

레비에게 회화와 패션은 별개의 두 세계가 아니다. 그의 말대로 패션 미학의 뿌리가 회화라면, 그의 예술적 감각은 미술에서 패션으로 이행한 것이다. 회화에서 구현했던 마모와 퇴색, 오래된 이미지, 어두운 색조와 시간의 흔적이 옷으로 이동한다. 낡고 바랜 의복의 표면 역시 하나의 회화적 표면이다. 회화에서는 이미 낡은 사진과 천을 새로운 맥락으로 불러들이고, 패션에서는 새것에 마모와 시간의 흔적을 입힌다. 두 장르를 잇는 감각은 같다. 레비의 미적 태도에는 그의 성장 배경도 겹쳐 보인다. 부유한 환경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고 성장했지만, 청소년기에는 방황과 반항의 어두운 시간을 보냈다. 레비의 브랜드 이름이 ‘우울한 부잣집 아이들(Enfants Riches Déprimés)’이 아닌가. 특권의 내부에 있으면서 그 질서에 불편함을 느꼈던 경험은 레비의 펑크적 감수성을 이해하는 하나의 배경이다. 그런 반항과 불화의 감각을 이제 마모와 훼손, 불협화음과 압축이라는 조형 언어로 승화했다.

모든 존재는 완성되는 순간부터 낡기 시작한다. 그러나 전시를 보고 나면 그 화살표를 거꾸로 돌려보고 싶어진다. 마모되고 풍화된 것, 낡고 버려진 것, 암갈색의 어두운 화면 속에서 다시 미적 성취가 발생한다. 폐허는 종착지가 아니라 새로운 조형의 출발점이다. 마모와 풍화라는 시간의 흔적, 그 폐허를 넘어 희미한 성취의 빛이 삐져 올라온다.

<A Psychiatrist Told Me I am Making a Game out of Painful Memories> 사진, 목재 판자, 하드웨어 테이프, 금속 새장 조각 51×41cm(부분) 2026
헨리 알렉산더 레비 / 1991년 미국 출생. 캘리포니아대 로스앤젤레스(UCLA) 순수미술과 중퇴. 모스크바 트라이엄프갤러리(2025), 파리 라파엘두라조갤러리(2023) 등에서 개인전 개최. <Subversive Design>(뒤셀도르프 NRW-포럼 2022) 등 단체전 참여. 패션 브랜드 앙팡리쉬데프리메(Enfants Riches Déprimés) 설립. 파리, 빈, 로스앤젤레스를 오가며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