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이즈의 미학, 볼륨 업!
오민, 카밀 노먼트(Camille Norment) 2인전 <어긋난 파동, 흔들리는 시간>(5. 22~7. 19)이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렸다. ‘노이즈’를 주제 삼아 불협과 소음이 기성 질서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과정에 주목했다. 오민은 영상설치 <동시> 연작, 노먼트는 몰입형 설치를 선보인다. 필자는 이번 전시에서 오민의 사운드를 시각 중심의 경험 체계를 전복하는 다성적 감각으로 읽어냈다.
치밀하게 설계된 디지털 스크린과 알고리즘의 빈틈없는 예측 가능성이 지배하는 오늘날, 무빙이미지예술은 어떤 영토를 개척할 수 있을까. 오민, 카밀 노먼트 2인전 <어긋난 파동, 흔들리는 시간>은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오민은 그간 시청각적 오류나 체계의 불협화음으로 치부되던 ‘노이즈’를 소거의 대상이 아닌, 새로운 감각 구조가 출현하는 생성의 임계점으로 전환한다. 그의 <동시> 연작(2026)은 이러한 문제의식이 다채널 영상설치와 퍼포먼스의 결합을 통해 도달한 시공간적 결과물이다. 모더니즘 미학이 예술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매체 특정성에 주목했다면, 오민의 실험은 음악의 다성성, 미술의 공간성, 영화의 시간성을 하나의 점으로 교차시킨다. 9개의 스크린 채널을 통해 동시에 상영되는 시간 기반 설치 <동시>에서 이미지와 사운드는 더 이상 서로를 지배하거나 보조하는 타자가 아니다. 각 채널은 독립된 사건으로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결합하며, 매체 간 위계를 해체하는 혼종적 대위법의 가능성을 펼쳐 보인다. 이러한 동시성과 다채널 프레임워크는 매체 장치의 역사 속에서 보다 유구한 고고학적 기원을 획득한다. 오민이 최초의 다채널 영상설치의 초기적 형태로 참조하는 17세기 바로크 시대 아타나시우스 키르허(Athanasius Kircher)의 저서 『빛과 그림자의 위대한 예술』(1646)은 이 지점에서 중요한 미학적 단서를 제공한다. 당시 광학 기술을 집대성한 키르허의 영사 메커니즘은 회화적 위계와 단일 소실점을 흔드는 초기 형태의 시청각적 환경을 실험했다. 오민은 이를 오늘날의 다채널 스크린과 입체 사운드 시스템으로 번역하여, 소리와 이미지가 서로를 종속시키지 않는 ‘인과적 진공 상태’를 공간적으로 물질화한다. 이는 다채널 설치를 서사적 재현 장치가 아닌 음악적 스코어 체계로 파악하려는 선언적 시도다.
선형적 시간 체계가 과거와 현재, 미래 사이의 인과적 위계를 통해 사건을 배열한다면, 오민의 다채널 매체 환경이 구현하는 동시성은 그 질서를 거부한다. 중요한 것은 개체를 단순히 나열하는 차원을 넘어, 복수의 층위가 결합하는 과정에서도 각각의 고유성이 훼손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감산 없는 합산’의 순간은 스크린의 분할과 사운드의 공간화를 통해 구체적인 경험으로 치환된다. 오민에게 ‘동시’는 복잡한 것을 단순화하기 위해 개체들을 구별하여 배열하는 것이 아니다. 복잡한 상태를 복잡한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태도, 즉 종합이 아닌 각 층위의 보존을 통해 이 원리는 실현된다.
‘위계’ 없는 대위법
<동시, 콘퍼런스>는 이러한 구조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작품은 ‘학회’라는 제도적 형식을 차용하면서도, 그 내부의 일방향적 전달 구조를 해체한다. 두 개의 스크린에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발화하는 퍼포머가 등장한다. 한쪽은 텍스트를 암기해 정제된 방식으로 전달하는 얼굴의 클로즈 업 숏이고, 다른 한쪽은 동일한 내용을 즉흥적으로 변형해 친구에게 말하듯 뱉어내는 퍼포머의 풀 숏이다. 이들은 즉흥 연주자처럼 서로의 발화 리듬과 밀도를 능동적으로 조율한다. 관람자는 클로즈 업된 화면의 미묘한 신체적 떨림과 풀 숏 화면의 언어적 밀고 당김을 동시에 포착해야 하는 지각적 시차를 경험한다. 관람자의 눈과 귀는 물리적 시공간의 어느 한 축에 고정될 수 없으며, 스스로 지각의 경로를 생성해야 하는 탈위계적 구조의 중심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구조는 관람자의 동선에 따라 끊임없이 중첩되며, 시간을 하나의 인터페이스로 재구성한다.
복수의 시청각 층위가 개별성을 유실하지 않은 채 공존하는 이 독특한 역학은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과정 철학을 경유할 때 더욱 구체적인 미학적 주석을 획득한다. 화이트헤드에게 두 사건이 동시적이라는 것은 기계적인 결합이 아니라, 상호 인과적 지배 없이 수평적으로 공존하는 독립적 계기들의 집합, 곧 ‘동시태’를 의미한다. 분할된 스크린 속 개별 타임라인들은 서로를 지배하지 않는 병렬 관계를 형성하며, 청각적 다성성이 화이트 큐브 공간에서 물질화되는 방식을 증명한다. 나아가 이 계기들이 서로를 소거하지 않은 채 하나의 사건으로 중첩되는 과정은 화이트헤드 가 ‘합생’이라 부른 상태, 곧 여럿이 결합해 하나가 되면서도 각각의 복잡성을 온전히 보존하는 원리와 맞닿아 있다.
오민의 동시성은 바흐의 대위법과 현대 음악의 알레아토리 구조를 참조하며 논리적 정당성을 확보한다. 바흐가 복수의 개별 선율을 하나의 주선율에 종속시키지 않고 위계 없이 직조했다면, 오민은 이를 다채널 스크린과 시청각 레이어로 번역해 ‘공간화된 대위법’을 완성한다. 이는 피에르 불레즈(Pierre Boulez)의 ‘통제된 우연성’과도 맞닿는데, 고도로 구조화된 연습을 통과한 신체만이 현장의 우연적 변수를 오차가 아닌 동등한 요소로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계획된 과거와 즉흥적 현재의 융합은 렉처 퍼포먼스 <동시, 즉흥, 연습>에서 실연(實演)의 형태로 확인된다. 작가가 강단에 올라 자신의 디바이스에 축적된 아카이브를 실시간으로 제어하는 퍼포먼스는, 매체 스스로 자신의 조건을 질문하는 메타-미디어적 설치로 전환된다. 여기서 ‘즉흥’은 무작위적 우연이 아니라 구조 내부의 변수를 수용하는 신체적 실천이다. 이때 시간은 복수의 층위가 공존하는 입체적 구조로 전환되며, 과정과 결과는 ‘되기(becoming)’ 안에서 근본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동시, 포트레이트>는 위계 없는 대위법의 원리를 보다 감각적인 층위에서 체현한다. 촬영 현장의 비정형적이고 불규칙한 움직임은 하나의 서사로 수렴되지 않으며, 영상과 동시에 흘러나오는 영어와 한국어 내레이션은 이미지와 어긋난 채 독립적인 궤적을 형성한다. 음성은 이미지를 설명하거나 보조하는 종속적 지위를 탈피해, 영상과 불일치하는 별개의 흐름으로서 공간을 점유한다. 전통적인 시청각 매체가 유지해 온 소리와 이미지의 지배 구조는 오민의 다채널 프레임워크 안에서 완강하게 거부된다. 동일한 시간대 안에서 방출되는 저마다의 선율, 영상, 조명의 신호들은 서로 부단히 간섭하고 결합하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협화음과 지각적 어긋남은 단일한 질서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성의 증거가 된다. 그간 제거해야 할 기술적 오류에 불과했던 노이즈는, 오민이 구축한 공간에서 고정된 소실점이 해체된 자리에 출현하는 데이터의 복합성 그 자체로 되돌아온다.
오민의 작업은 단일 스크린 중심의 재현 체계를 해체하고, 다채널 매체 환경 내부에서 감각의 다성성을 복원한다. 선형적 시간을 다층적 지속의 병치로 전환하는 <동시> 연작은, 정보의 매끄러운 통합을 지향하는 동시대 알고리즘적 질서에 대한 형식적 저항이자, 복잡성을 시공간적 물질로 전환하는 하나의 전위적 실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