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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작가상2020展

2021/01/24

우여곡절의 현대미술 전람회
올해의 작가상 2020展 2020. 12. 4~4. 4 국립현대미술관 서울(http://www.mmca.go.kr/exhibitions/exhibitionsDetail.do?exhId=202001090001231)
/ 임 근 준(미술·디자인 이론/역사 연구자)

국립현대미술관과 SBS문화재단의 <올해의 작가상>을 어찌하면 좋을까. 2012년 출범해 올해로 제9회를 맞은 이 경쟁상 제도는, 화려한 출발과 달리 회를 거듭하며 여러 문제점을 드러내왔다.
본디 <올해의 작가>는 1995년부터 2010년까지 매해 한 명의 대표 작가를 선정해 ‘커리어 서베이’ 형식의 대형 개인전을 열 수 있도록 후원하는 제도였다. 임영방 관장 시절 마련한 이 전시 프로그램으로 전수천, 윤정섭, 황인기, 권영우, 김호석, 노상균, 이배(이영배), 전광영, 권옥연(원로 부문), 승효상, 전혁림(원로 부문), 곽덕준, 한묵(원로 부문), 김익영, 정점식(원로 부문), 윤광조, 서세옥(원로 부문), 이종구, 정현, 정연두, 장연순, 서용선, 박기원 총 23인이 전시를 치렀다.
중견 작가든 장노년 작가든, 기존의 작업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평가하고, 또 새로운 신작을 발표하는 기회였으므로, 크게 화젯거리가 되지 못하는 경우라 해도 작가 활동에 큰 도움이 됐다. (큰 논란으로 이어졌던 1996년의 경우를 빼면 거의 언제나 그랬다.)

올해의 작가를 선정하는 형식의 숨은 정치적 뿌리

사실 미술계에서 올해의 작가를 선정하는 형식으로 개인전을 주최하기 시작한 기관은 진보 성향의 서울미술관(당시 관장 김윤수)이다. 1982년 평론가 11인이 작가 11명을 추천하는 형식으로 <평론가가 뽑은 문제 작가전>을 열더니, ‘중앙 일간지’ 미술 담당 기자 9인이 ‘82년의 작가’로 신학철을 선정해 첫 개인전을 주최했다. 이후 신학철은 민중미술 운동을 대표하는 스타로 발돋움했다.
미술기자상 수상 개인전 제도는, 이후 독립해 1983년 이왈종과 1984년 김태호를 수상자로 선정했다. 이왈종은 건강 문제로 개인전을 열지 못하다가 2년 뒤 동산방에서 전시를 치렀고, 김태호의 개인전은 현대화랑에서 열렸다. 이후 이청운, 강희덕, 고영훈, 정경연, 김병종, 석철주, 육근병 등이 수상했다. (1991년엔 기념 개인전을 열어주는 형식의 토탈미술대상이 출범하기도 했다. 1997년의 제5회를 끝으로 사라진 것으로 기억한다.)
임영방 관장이 마련한 <올해의 작가>전 제도는, 서울미술관의 사례를 국립미술관으로 가져온 성격이 짙었다. 1996년도의 수상전에 한국미술평론가협회(회장 오광수)가 본격적으로 비평을 가하며 문제 제기를 했던 것도, 실은 작가나 도록에 실린 평문이 문제가 아니었다. 정치색을 놓고 다투는 파벌 싸움의 성격이 강했다.
하면, 그럭저럭 잘 운영돼오던 <올해의 작가>전을 경쟁전 형식의 <올해의 작가상>으로 개편한 배경은 무엇일까? 일단 관장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는 작가 선정의 무원칙성이 문제였지만, 더 큰 이유는 신자유주의적 바람몰이에 있었다.

때늦은 신자유주의적 바람몰이와 경쟁전 형식의 대우그룹 같은 뿌리

소위 ‘CEO형 관장’으로 발탁된 배순훈 전 정보통신부 장관이, 영국의 터너미술상을 벤치마킹해 경쟁전 형식의 <올해의 작가상> 제도를 출범한 주인공이다. 일차적으론 그랬다.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은 새로운 제도를 도입한 이유로, “작가 선정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이야기했고, “역량 있는 작가 발굴”과 “프로모션”을 약속했다. 즉, ‘우리도 전 지구화 시대에 부합하는 스타를 키워보자’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한데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그런 방식은 이미 시대에 뒤쳐진 것이 돼 있었다. (2014년 출범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현대차 시리즈도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공동 번영의 환상은 붕해하고 있는데, 뒤늦게 초대형 미술을 추구한다? 난센스 아닌가.)
한국 현대미술계에 다소 늦게 신자유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던 해는, 2004년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약 5년 동안, 1998/99년 등장한 쌈지스페이스, 대안공간루프, 대안공간풀, 프로젝트스페이스사루비아다방 등 대안적 공간들이 한국 동시대미술을 ‘하드캐리’했지만, 2004년을 기점으로 중심축은 미술관과 미술시장으로 급속히 이동했다. 당해 10월 19일 삼성미술관 리움이 세계박물관대회와 함께 개관하자, 대우 김우중 회장의 딸 김선정 큐레이터는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 2004: 박찬경 정연두 플라잉시티>를 경쟁전 형식으로 치르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구겐하임미술관의 휴고보스프라이즈를 벤치마킹한 에르메스미술상은, 2016년 격년제 단독 수상전 형식으로 재전환했다. 2010년대 초반, 여러 미술상 제도가 경쟁하는 양상이 전개되며, 피로감이 쌓인 탓이 컸다.
국립현대미술관과 SBS문화재단의 <올해의 작가상> 제도는, 출범과 동시에 에르메스미술상, 두산연강예술상을 압도했다. 예산으로나 권위로나 최고의 미술상인 것처럼 뵀다. 초기의 과열 양상은 3회까지 유지됐다. 4회에서는 퀴어 미술가가 수상했으니, 나름 파격이었다. 문제는 바르토메우 마리 관장 시절인 2016년부터 긴장감이 확 떨어지기 시작한 것. 2016년 후원 작가인 믹스라이스 양철모는 상습적 성추행범으로 지목되자 공개 사과와 함께 작가 활동 영구 중단을 선언했고, 2018년의 작가였던 옥인콜렉티브의 이정민, 진시우 부부는 서류 위조 논란 끝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주최 측의 과도한 언론 플레이에 부담을 느낀 몇몇 작가는, 방송 프로그램에 대역 배우를 내세우거나, 시상식에 대역 배우와 대리인을 내보내는 등, 풍자적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팬데믹 상황에서 열린 아홉수의 <올해의 작가상> 전시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겨우 개막한 제9회 <올해의 작가상 2020>은 김민애, 이슬기, 정윤석, 정희승의 4인 경쟁전으로 펼쳐졌다. 제한적으로 전시 관람이 이뤄지던 가운데, <올해의 작가상>은 여성 차별적 관점의 작업으로 화제를 모았다. 정윤석의 섹스돌 관련 영상 설치작업 <내일>을 본 관객의 분노가 소셜 미디어상의 비난 여론으로 이어진 것. 후보 자격을 박탈하라는 해시태그 시위도 전개됐다. 나는 작품의 철거나 후보 자격 박탈 같은 주장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성/약자를 부당하게 재현했다는 점은 꼭 비판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정윤석의 신작 아닌 신작이, 이성애자 남성용 여성 섹스돌을 유비로 사용하는 방식은 대단히 관습적이고 평면적이다. 포스트휴먼이나 슈퍼휴먼의 관점에서 인간을 대리하는 오브제나 서비스 등을 다룬다는 알리바이 혹은 복선과 달리, 그의 카메라와 화면 편집은 여성의 모습을 한 섹스돌을 ‘성애적으로 타자화된 여성’으로 바라보고 또 제시했다. 대단히 노골적이었다. 반면, 그를 제작하는 여성 노동자는 처량하고 무기력한 존재처럼 그려졌다. 그건 진실이라기보다 진실의 직조 혹은 날조에 가깝지 않을까. (노동 현장에서 섹스돌을 그리 성애화하는 순간이 어디 있겠는가.) 여성 노동자를 모욕적으로 재현했다고 볼 수도 있다. 관객의 입장에서 불쾌감 혹은 그 이상의 분노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예술의 이름으로 관객에게 남녀 차별적 유사-포르노를 보게 만들겠다는 구식 전략이었을 텐데, 그런 게 비평이 된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다.
작가는 기자들에게 “중립적인 시선으로 담아내려 했다. 섹스돌 공장은 성적이고 젠더적인 갈등 현장이라기보다 소비자는 남성인데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대부분 여성이라는 점에서 불합리한 환경을 보여주려 했다. 어떤 입장도 담고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는데, 기만적 언술이다. 가치 중립을 방패막이 삼아 성차별적으로 재구성한 영상을 리얼리티로 강제해내는 방식이, 곧 그의 입장이다.
나는 <올해의 작가상>전을 두 번 관람했다. 동선 연결 문제로 두 번 모두 4전시실의 정윤석, 3전시실의 정희승, 2전시실의 이슬기와 김민애 순서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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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석<내일>전경

01. 정윤석의 <내일>

정윤석의 영상작업 <내일>의 메인 프로젝션은, 러닝 타임이 무려 2시간 34분이다. 평문 작성을 위해 미술관에 스크리너 링크를 요청했지만, 답변은 “작가가 작품이 상영되는 조건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스크리너 링크 제공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작품이 상영되는 조건을 중시한다고? 농담하나? 개막일엔 성적 표현의 수위가 높은 장면에 대한 경고 안내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개막 초기엔 간의 의자만 몇 개 놓여 있었고, 러닝 타임 안내도 없었다. 팬데믹으로 관람 시간이 2시간 단위로 제한돼서, 한 작품을 다 보지도 못한 관객에게 그만 나가라고 강제하는, 웃기지도 않는 촌극이 반복됐다. (추후 미술관은 네 명이 앉을 수 있는 소형 소파를 추가로 설치했다.)
정윤석의 2020년작 <내일>은, 2018년 개인전 <눈썹>의 확장판이다. 당시에 그는 후속작 2부와 3부를 계획한다고 말했으니 후속작으로 볼 수도 있지만, 같은 푸티지와 유비가 반복됐다. 추가된 것은, 섹스돌 5개와 함께 사는 일본인 기혼남 나카지마 센지(中島千滋)의 영상과, 고양이 카페를 운영하는 여성 이자와 히로미(伊沢ひろみ)를 허수아비 후보로 앞세워 AI 정치를 주창하다가 실패한 우파 남성 마츠다 미치히토(松田道人)의 영상이었다.
2시간 34분 동안 싱글채널 프로젝션으로, 정윤석은 정말 지루하게 자신의 논지를 제시했다. 지리멸렬하니까 지리멸렬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섹스돌 공장과 여남 노동자들과 제작 환경을 둘러보는 장면에서 시작해, 섹스돌과 함께 사는 것으로 국제적 악명을 얻은 나카지마 센지의 모습을 제시하고, 다시 중국인 노동자들의 인터뷰와 나카지마 센지 부부를 이어붙이고, 지쳐가는 중국의 농민공 여성과 섹스돌을 교차 편집하더니, 다시 일본의 주택가로 가서 나카지마 센지의 섹스돌을 화면에 담는다. 방송국 취재진이 나카지마 센지를 다루는 방식을 촬영-제시해 잠시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더니, 그렇고 그런 사연이 이어진다. 마네킹으로 화면이 전환하고, 시체처럼 쌓인 마네킹 장면을 재활용하고, 남성기로서의 롯데 타워를 제시하며 박영선 장관이 AI 로봇 소피아와 언론 플레이를 벌이는 장면을 이어 붙인다. 로봇 기본법을 이야기하니까, 이제 고령화 사회 위기에 빠진 일본 다마시의 시장 선거에 나선 AI 정당 이야기가 나올 차례. 여성 취재진이 가짜로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장면은, 인형으로서 인간을 제시하는 악의적인 유비 장치. 정치 불신에 빠진 사회 부적응형 일본인 남성들의 엉터리 토론과 실언이 나오고, 다시 오케이 구글 서비스를 이용하는 나카지마 센지 부부가 이어진다. 나카지마 센지가 섹스돌을 씻기고, AI 정당의 엉터리 유세와 기자 회견이 벌어진다. 나카지마 센지가 자신의 미디어 출연 영상을 모니터링하는 장면에, 다시 AI 정치를 대정봉환(大政奉還: 1867년 막부가 메이지 천황에게 통치권을 반납한다고 선언했던 정치적 사건)에 비유하는 슬픈 헛소리가 이어진다. 감독은 질 낮은 정치 토론을 ‘섹스돌이 인간보다 나을 수도 있다’는 주장을 위한 장치처럼 배치해놨지만, 설득력은 제로. (AI 정당의 남자들이 맥주를 마시며 선거 전략을 논하는 장면은, 아즈마 히로키의 음주 토론 장면과 대단히 유사해서 더 슬프고 무력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카지마 센지의 인터뷰—때로 취조에 가깝게 느껴지는—가 이어지는데, 감독이 작업을 만들어내기 위해 답변을 유도하고 또 유도하지만, 나름 방송 미디어에 익숙한 일본인 남성은, 결코 화끈한 답은 해주지 않는다. 분량을 뽑으려는 전형적 어뷰징 인터뷰가 지루하게 이어지지만, 남자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해선 양보가 없다. 다급해진 감독은 “‘결여’를 메우려 인형과 사는가?”라는 실례의 질문까지 던지지만, 나카지마 센지는 “내 눈앞에 메구미가 나타났을 뿐”이라고 응수한다. 대화로 드라마가 성립이 안 되니, 가라오케 장면으로 억지 드라마를 만든다. 1시간 50분이 지날 무렵인데, “외톨이별” 어쩌구 하는 노래 가사에 맞춰 감독은 남자의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뮤직 비디오처럼 그의 인생을 편집해 제시한다. 다시 고령화 사회의 다마시가 나오고, 노래방에서 ‘노래 가사 바꾸기’로 정당 홍보 노래를 녹음하는 마츠다 미치히토가 나오는데, 하필 특정 코드의 남성성을 상징하는 언더아머를 입혔다. 정치 전반에 대한 불만을 노래하는 남자는, 이어지는 인터뷰에서 ‘꼴통’으로 이미지를 굳힌다. 출근길 유세에선 마츠다 미치히토가 기어이 아자와 히로미의 마이크를 빼앗고야 말고, 다시 나카지마 센지가 나온다. 모친 사별과 부인의 냉정함에서 느낀 외로움을 고백하고, 감독은 다시 ‘망각’을 주제로 치매에 대한 유도 심문을 시작한다. ‘잊음은 죽음의 공포를 잊게 해준다’는 철학적 메타 발언을 뽑아내는, 역시 어뷰징 인터뷰다. 다시 다마시의 개표 현장. 이자와 히로미 후보는 0표를 얻고, 귀가하는 차량에서 남자들은 지질하게도 이자와 히로미를 탓한다. 감독은 나카지마 센지에게 섹스돌 공장의 인형 제작 과정을 보라고 요구하고, 물청소 단계의 섹스돌과 공기 청소하는 남자 노동자의 몸을 대비해 제시한다. (이 대비 장면이 작업의 핵심으로, 뒤편에 설치된 딥디크 영상에서도 핵심으로 재활용됐다.) 첫사랑의 이름을 붙인 섹스돌 이쿠에가 나오고, 코크링을 착용한 나카지마 센지가 샤워를 마친 이쿠에와 성교한다. (이 장면이 영화의 극적 고점이 된다.) 상투적으로 번개 치고 비오는 날이 이어지고, 드라마 영상을 보며 조는 남자. 촬영 중 전화를 받은 남자는 통화 상대에게 시큰둥하게 촬영 중임을 밝힌다. (이 남자는 미디어의 희생자가 아니라는 걸 간접 주장하는, 방어용 장치가 된다.) 짧은 암전 후 다시 화창한 교외 주택이 나오고, 일광욕을 마친 인형을 남자가 안고 집안으로 들어가면서, 영상은 2시간 34분에 이른다. 엔딩 크레딧도 없이, 다시 음악이 나오며 중국의 공장으로 루핑.
영화에서 정윤석은 단 한 번도 여성의 목소리와 시점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다. 사회에 부적응한 남자들의 시선과 목소리를 통해, 대체물로 제시되는 여성 모양의 섹스돌과 마네킹을, 최선을 다해 성적 타자로서 추적했다. 지극 정성으로 추적하니까, 길고긴 취재 과정과 편집이, 모두 섹스돌과 마네킹을 성애적으로 재현해내기 위한 알리바이 만들기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니, 나는 실제로 2시간 34분짜리 영상이 본편이 아니고 실은 부속 영상이라고 생각한다. 부가 작업처럼 제시된 반대편의 딥티크 영상 쪽이, 실은 진짜 본편이다. 딥티크 영상은 약 20분 정도의 길이었다.
쾅쾅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시작하는 두 폭의 화면은, 역시 공장의 아침 구호와 작업 환경으로 서두를 장식하는데, 사운드는 하나로 묶여 있다. 중국의 섹스돌 공장이 주재료고, 다소 연출이 용이했을 한국의 마네킹 공장 쪽 영상은 보완적 부가 재료로 활용된다. 비닐 자루에 담긴 마네킹은 시체로 유비되고, 음악이 나오면서 블레이드 러너에 영감을 받은 여타 포스트휴먼 영상들처럼 멋을 부리기 시작한다. (‘똥폼‘을 잡는다.) 공장 벽면의 성경 문구 낙서도 관습적으로 제시되고, 후반으로 가면 다시 현장의 소리와 음악을 뒤섞는다. 로봇 게임 영상과 사체 같은 인형을 짝지우고, 핵 실험용 더미를 피해자처럼 뵈도록 편집해 넣은 뒤, 공장의 영상으로 머리통, 다리 등을 인체처럼 보도록 유도한다. 마오쩌둥 초상이 비치고, 다시 현장의 소리가 사라진 상태에서, 인형의 머리통과 자는 여공의 머리가 비교-제시되고, 마네킹에 백색 도료를 도포하는 장면과 미래의 시민처럼 제시되는 섹스돌이 이어진다. 섹스돌을 사람처럼 묘사한 뒤 공장 벽면의 우주에서 본 혹성(지구?)의 이미지를 제시하고, 음악과 함께 인형의 예쁜 거대 가슴 등으로 보는 이를 흔들어보려고 애쓴다. 빛과 어두움의 모티프로 공장을 다루고, <논픽션 다이어리>에서 사용한 사건 재연용 마네킹이 잠깐 나오더니, 이산가족 찾기에 동원된 마네킹이 교차 편집되고, 깃털 눈썹을 억지로 붙여놓은 마네킹 이미지(감독이 집착해온 페티시 컷)가 재활용되고, 시체 같은 마네킹, 사람 같은 섹스돌 옆에서 누워 자는 남자 노동자를 잇는다. 구시대적 구린 유비의 연속으로 작가는 훈계한다. 섹스돌도 인간에 버금가는 주체라고. 다시 섹스돌의 커더란 가슴이 나오고, 옆구리의 구멍을 메우는 성경의 알레고리가 제시된 뒤, 핵심이 되는 유비, 즉 섹스돌의 물청소 장면과 공기 목욕으로 먼지를 제거하는 남자 노동자의 몸이 대비를 이룬다. 마무리는, 여인 좌상으로 앉은 마네킹에게 면사포처럼 씌워졌던 비닐이 벗겨져 날아가는 연출 장면과, 물을 내뱉는 호스의 대비로. 끝. 역시 엔딩 크레딧은 없다.
정윤석은 일민미술관 개인전 <눈썹>에서 큰 문제가 없었으니, 보완 장치를 추가한 개정판 작업 <내일>도 별 탈 없이 전시-상영되리라 생각했을 터. 하지만, 그새 또 시대상이 바뀌었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이라는 장소와 <올해의 작가상>이라는 기회는 작가의 문제점을 더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시장에서 여성을 대체하는 여성형 섹스돌이 대세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남성형 섹스돌도 제작-판매되고 있다. 하지만, 작가는 단 한 번도 남성형 섹스돌은 다루지 않았다. 여성의 목소리와 시선에 단 한 번도 이입하지 않았다. 농민공 여성들의 인터뷰는 방어용으로 전진 배치해놨을 뿐이었다. 다마시 시장 선거에 출마한 이자와 히로미의 목소리나, 그의 시점으로 보는 선거와 정치 상황에는, 완전히 무관심하다. 철저하게 여성 주체는 소외되고 타자로서 동원될 따름이었다.
이번 작업 때문에 나는, 정윤석의 출세작 <논픽션 다이어리>마저 다른 각도에서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됐다. 혹시 전작의 출발점도, 살인 범죄를 재연하는 범인과 마네킹을 담은 사진 한 장이었던 것은 아닌가? 피해자를 대리하는 마네킹과, 그에 대비를 이루는 젊은 살인범의 육체에서 어떤 매혹을 느끼고 작업을 전개한 것은 아닌가?
그런 의심을 지울 수 없는 것은, <논픽션 다이어리>에서도 정윤석은, 먼저 푸티지 영상을 교차 편집하며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만들어놓은 뒤, 추가로 운 좋게 얻어낸 두 명의 증언, 즉 고병천 반장과 한완상 전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의 스토리텔링으로, 포스트-시네마 구조를 확충해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윤석은, <내일>에서도 고병천과 한완상처럼 자신의 영상 훈계 메시지를 가려줄 스토리텔러를 찾아야 했고, 그렇게 섭외해낸 화자-피사체가 나카지마 센지와 마츠다 미치히토였다. 문제는 영상 매체의 특성을 잘 파악하고 있는 나카지마 센지가 원하는 이야기를 끝까지 들려주지 않았고, 마츠다 미치히토는 시대를 메타-분석할 능력을 결여한 주변부화한 인물이었다는 것. 결정적으로는 <논픽션 다이어리>에서 성별 정치학적 문제가 도드라져 뵈지 않았던 것과 달리, <내일>에선 여타 알리바이 장치에도 여성형 섹스돌과 마네킹을 성애화하는 방식이 성차별적으로 강조되고 말았다는 것. 영상과 관객을 좌우로 도열하는 14점의 사진도, 여성 모양의 물건을 성 노예적 여성으로 타자화하고 마는 관습적 시선 그 자체를 구현하고 있었다. 이를 두고, 여성 관객과 인터뷰와 촬영에 응한 여성들에 대한 모욕적 재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나? 애써 방어 논리를 찾아보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다.
게다가, 하필 정윤석의 전시 공간은, 사진가 정희승의 공간으로 연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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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승<침몰하는배에서함께추는춤>전경

02. 정희승의 <침몰하는 배에서 함께 추는 춤>

정희승의 사진 설치물 <침몰하는 배에서 함께 추는 춤(Dancing together in a sinking ship)>은, 47점의 사진 프린트와 박연주의 글을 담은 타이포그래피-시 엽서 더미, 선우정아의 음원 작업으로 구성된, 예쁜 작업이었다. 하지만, 사진에 담긴 인물이나 오브제를, 섹스돌과 중첩해서 바라보게 되는 기분 나쁜 경험은 피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사진가는 <침몰하는 배에서 함께 추는 춤>이라는 유비적 제목으로 죽음과 소멸의 암시를 던지는 것도 모자라, 별도의 배포 자료로, 밀란 쿤데라의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인용한 구절을 들이밀었다. “어떤 이들은 죽을 때까지 원 안에 남아 있는가 하면, 긴 추락 끝에 산산이 부서져 버리는 사람도 있다. (…) 결국 우리는 모든 만물이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이 우주의 주민이다.”
<침몰하는 배에서 함께 추는 춤>은, 이를테면, 미술계 작업과 작가를 이러저러한 각도에서 촬영-포집해놓은, 미술계 내부와 외부의 원형 궤도 질서와 추락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보고서다. 정윤석의 영상에 크레딧이 전혀 없는 것과 달리, 정희승은 자신의 작업에 포집되니 타인의 작업을 일일이 밝혔다. 촬영에 응한 인물도 모두 협업자로 이름을 적시했다. 아무튼 예쁜 설치로 제시된 현대미술계의 어떤 원 같은 질서에서 두 대의 스피커를 내장한 노란 벽면이 중심축을 이뤘다. 선우정아의 짧은 노래가 반복되는 가운데, 노란 가벽은 지구를 연상케 하는 형상(장종완의 드로잉 작업)을 촬영한 <구(Orb)>와 노 젓기 운동 기구로 신체를 단련하는 남자를 촬영한 두 폭의 사진 <노를 저어라(Row your boat)>를 제시했다. 즉, 구가 침몰하는 미술계의 배라면, 미술계에서 사람들은 열심히 노를 저어야 하는 팔자라는 이야기다. 스피커가 하나는 낮은 곳에, 하나는 높은 곳에 설치돼 있다. 의사-유형학적 방식으로 목록화된 사진으로, 미술계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신을 풍자했다.
이미지 자체는 퍽 관습적으로 뵈지만, 불과 10년 전만 해도 잘 프린트되지 않던 하이라이트와 어두움의 미세한 계조가 예쁘게 구현된 사진으로 보는 한국 현대미술계의 어떤 인맥과 질서는, 낯익지만, 낯설었다. 이러한 작업의 형식으로 미술계를 5년 주기로 기록한다면 어떨까. 정희승의 방을 떠날 때마다 나는, 사진가 육명심이 기록한 한국의 예술가를 떠올렸다. 육명심의 사진에 포착된 한국인은 하나같이 징하게 생겼는데, 정희승의 사진에 포착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신기루 같았다. 정윤석이 기를 쓰고 섹스돌을 실체적 존재로 뵈게 만들려 노력한 것과는 정반대의 추동이 작동한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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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기<동동다리거리>전경

03. 이슬기의 <동동다리거리>

반면, 이슬기는 전시작 <동동다리거리>(작업 과정에서 가제는 <달, 그림자, 구멍, 각설이 타령>이었다)에서 한옥의 창호 구조와 달그림자에서 영감을 받아, 슈퍼 그래픽에 가까운 벽화를 구현하고, 또 프로토타입으로 뵈는 병풍 형태의 조각작업을 만들어 세워놓았다. 민요와 격자 구조를 중첩한 유비를 제시했는데, 그렇다고 격자 구조가 음악의 번역은 아니었다. 달의 운동 주기와 민요의 장단에 반향하는 방식으로 벽화의 격자를 구성했다고는 한다. 한데, 기둥 구조에 화답하는 가벽 재질의 기둥 구조체를 설치한 것은, 건축물을 다시 창호 구조처럼 독해보라는 뜻이었을까? 아무튼, 서울관 천장의 그리드 구조를 다시 보게 되기는 했다.
원래는 문살의 구조로 만든 문과 가벽 등을 겹으로 설치할 예정이었던 것 같은데, 어쩐 일인지 구현되지 못했다. 문살 구조 스스로 ‘프리 스탠딩‘하는 조각을 만들고, 한 면에만 색을 칠할 생각이었다고 하는데, 아무튼 상상으로 그쳤다. 작업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권혁천 소목장, 심용식 소목장을 만나 자문을 구했고, 강성철 소목장, 한승우 건축가의 도움을 받은 모양인데, 아무튼 문살 형태로 커다란 자립 구조체를 만드는 게 쉽지 않았을 듯하다. (원래 그렇게 확장 가능한 구조가 아니니까.)
협업해온 지인들에게 6~7월 집 근처의 바닷물이나 강물을 담아 보내달라고 요청한 작가는, 유기체를 가득 머금은 11종의 물을 사람으로 간주하고, 장식적 형태의 유리 용기에 담아 목걸이처럼 늘어놓았다. (프랑스 앙스니의 라루와르강, 프랑스 몽트를레의 라루와르강, 스위스 바젤의 라인강, 프랑스 알자스 알키르쉬의 일르강, 덴마크 코펜하겐의 소연느 호수, 프랑스 북알프스 엉브랭 라뒤랑스강, 파리의 세느강, 뉴욕 오션비치, 포르투갈 리스본 타구스강 등에서 온 물이라고 했다.) 유리 작업의 구현을 위해서 작가는, 스테판 리보알, 박선민 등의 도움을 받았다.
반면 핀볼 머신의 조상님인 프랑스의 민속놀이 기구 바가텔(Bagatelle)을 재구성한 석 점의 놀이판은, 핀의 구성과 점수가 나는 오목한 구멍의 위치와 색이 모두 달랐다. 바가텔을 현대화한 조선의 미감으로 재구성한 작업인데, 실제로 쇠구슬을 제대로 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서, 역시 미완성 프로토타입으로 뵀다.
팬데믹 상황에서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겠지만, 사실상 만들다 만 상태로 전시를 개막한 것은, 좀 심하지 않았나 한다.
특히 문제가 된 부분은, 이슬기의 전시 공간과 김민애의 전시 공간 사이에 2중의 가벽이 설치되면서 형성된, 기이한 점이 지대였다. 이슬기의 문살 구조체가 좌절되면서, 벽화용 가벽이 설치되고, 그에 따라 이중의 가벽이 만들어진 모양. 아무튼, 김민애의 전시 공간으로 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어디서부터 작업인지 헛갈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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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애<1.안녕하세요2.Hello>전경

김민애의 <1. 안녕하세요 2. Hello>

김민애는 허상과 실체에 관한 조각-논리적 조각작업을 꾸준히 탐구해온 사람답게, 이번에도 조각가의 문법으로 전시에 임했다. 작업의 전체 제목은 <1. 안녕하세요 2. Hello>인데, 각각의 작업에 1-1부터 5-1까지 일련번호가 붙어 있어서, 어떤 순서를 암시했다.
일단 전시장의 통로 구조에 화답하는 입방체 형태의 화이트큐브 조각이 석 점 제작됐다. 각각 바퀴가 달려 있고, 거울도 붙어 있고, 또 손잡이도 달았다. 몰래 힘껏 밀어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바퀴에 잠금이 걸려 있어서 그럴 수도 있고, 혼자 밀 수 있는 무게가 아닐 것 같기도 했다.
1-1은 청년이 사는 원룸인 것처럼 음각으로 문과 창문을 제시하고 있었는데, 원본이 된 통로에 맞춰 배치하면서 거울을 붙여놓았기 때문에, 통로 쪽에서 보면 착시 효과가 발생했다. 박스 아래로 핸드폰을 넣어 촬영해보니, 안쪽은 철 구조에 합판으로 돼 있고, 천장을 뚫어서 서울관의 천창이 뵀다.
1-2도 역시 위가 뚫린 백색 입방체 구조인데, 다소 각도를 틀어놓았다. 길처럼 제시된 콘크리트 눈속임 접착 시트지(2-6)가 조각의 작도에 맞춰서 바닥을 질주하는데, 이는 그의 <아트스펙트럼 2014>(삼성미술관 리움 2014) 출품작이나 2018년 아르코미술관의 기획전 <기억의 틈>에 출품한 작업을 연상케 했다.
1-3은 야외용 기념 조상의 좌대처럼 생겼는데, 기본 크기는 1-2와 같지만, 거울의 크기도 다르고, 또 입방체 상단에 조각상을 얹어놨기 때문에 더 크게 느껴졌다.
1-1, 1-2, 1-3 모두 가벽 업체에서 현장 제작한 오브제로, 가벽 해체 없이 전시장 밖으로 이동할 수 없을 듯했다.
1-4-1과 1-4-2는 전시 공간을 둘로 나누는 상승 계단을 품은 박스에 화답하는 일종의 가짜 창문으로서의 LED 조명 간판이었다. 역시 동종의 작업이 2014년에 시도된 바 있다. (LED를 사용한 이유는 예각의 구현 때문.)
1-5는 소장품 하이라이트 전시 때문에 인계책으로 폐쇄 조치된 계단 공간에 적색 카펫(파이론텍스)을 깔고, 인계책을 상향 조절한 뒤, 사운드 설치를 넣은 모습이었다. 말이 사운드 설치지, 빌리 조엘의 노래 <더 스트레인저>를 틀어놓은 게 전부였다. 공간을 낯설게 보라는 뜻인가 했더니, 노래의 구조가 액자형이라, 프레임에 프레임이 시도되는 전시 형태와 상호 조응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아무튼 1번 시리즈는 모두 전시장의 기본 공간 질서에 일차적으로/물리적으로 화답하는 방식으로 만든 작업들이었다.
반면, 2-1은 인조 잔디로 구성된 놀이 공간 같은 무엇인데, 기본 평면 사각형이 1-1과 같은 크기였다. 즉, 바깥인데, 실내의 성격을 띠었다. 그리고 관중석 같은 계단 구조의 조각 넉 점이 한 세트를 이뤘다. 일종의 경기장. (내부에 장난감 크기의 폭탄 3D 모형과 작가의 아들이 더는 갖고 놀지 않는 축구공 모양의 물렁한 천공이 놓였다. 육아는 전쟁이라는 뜻인가? 그건 전연 아니라고 한다.)
2-2는 접착식 타일을 붙여놓은 물류용 팔레트 구조체인데, 역시 크기가 1-1과 거의 같았다. 일종의 실내 공간으로 구성된 이 조각 위로는 간이 의자 네 개가 놓여 있었다. (전시장에 검은 점처럼 놓인 의자는 모두 9개.)
2-3은 백색 유광 페인트를 칠한 면과 칠 도구들로, 1-2 옆에 놓였다. (독수리 트로피 조각 뒤 벽면에서 안쪽 전시 공간까지 10m 구간을 직사각형으로 유광 도색했고, 1-2 전체를 유광 도색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직사각형의 유광 벽면은 1-2의 이동 궤적이나 어떤 그림자처럼 독해되기도 했다.)
2-4는 벽에 붙은 손잡이고, 2-5는 다시 가짜 창문이 되는 간판이었다. (이 간판은 더 구식인 형광등 형식이었다.)
2번 그룹의 작업들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장소에 반응하는 방식으로 제작한 듯하다.
3-1은 1-3 위에 올라앉은 조각인데, 백조 형상인가 했더니, 기러기라고 했다. 즉, 3번 그룹의 작업들은 본인과 타인의 예전 작업을 지시하는 참조적 성격을 띠었다. 아무튼, 진짜 기러기 형상은 아니고, 기러기 조각에 오토바이용 방수포를 얹은 모습인데, 안쪽엔 우레탄 폼만 들었다고 했다. (비고: 기러기는 자신의 개인전 <기러기>(아뜰리에에르메스 2018)를 참조적으로 지시하는 장치다. 당시 전시장의 벽면엔 참새, 비둘기, 갈매기, 닭, 청둥오리, 오리, 거위, 캐나다구스, 백조가 저부조로 설치됐지만, 기러기는 부재했더랬다.)
3-2-1은 앞서 열렸던 전시의 잔해다. 아이웨이웨이의 출품작 <폭탄>을 일부러 남겨뒀다. (작가 스튜디오의 허락을 구했다고.) 역시 리움에서 히로시 스기모토 전시의 잔해를 활용한 것과 유사한 방식이었다.
3-2-2는 이게 웬 에너지 낭비인가 싶은 미사일 조각상이고, 3-2-3은 폭탄 조각상인데, 아이웨이웨이의 작품에 등장한 미사일과 폭탄을 골라 3D 프린팅 방식으로 제작한 결과물이었다. 사회 비판적 작업에 대한 야유처럼 독해되기도 했지만, 직립 구조를 갖는 자코메티 이래의 현대조각에 대한 풍자 같기도 했다. 3D 구조 정보는 인터넷에서 찾았다고 했다.
반면, 함께 직립 구조로 제시된 4-3은 기념품 볼펜 모양이었는데, 갖고 있던 펜 가운데 사진 판매전 <더 스크랩>에서 굿즈로 제작-유포된 펜을 고르게 됐다고 했다. (작가는 우연이라고 했지만, 역시 보기에 따라, 냉소적 풍자가 됐다.) 펜 형태의 조각상은 조형물 제작 업체에 실물을 주고 확대 모형 제작을 의뢰했다.
4-1은 크리스털 재질의 독수리가 작은 기념비 형태로 구성돼 있는데, 레디메이드 트로피 재료로 만들었다고 했다. 마르셀 브로타에스가 생각났지만, 역시 작가 본인의 개인전 <기러기>(아뜰리에에르메스 2018)를 지시했다. (구시대풍 백색 좌대에 호두나무 받침대가 크리스털 조각을 지지하고 있다.)
4-2는 폭탄이 터지는 형태를 관습적 모양으로 차용한 커다란 스테인리스 스틸 재질의 화분인데, 거대한 재떨이로 독해되기도 했다. 
5-1은 주요 작업의 단면 정보를 종합해놓은 꼴의 작품인데, 폴리카보네이트 소재의 평면으로 만든 입체 구조체로, 바퀴를 달아놓았다. (새 모양, 잔디 모양을 읽어낼 수 있었다.) 2018년작 <바퀴로 움직이는 조각>과 유사한 형태였다.
이러한 세부 작업 정보가 전시장 벽면에 은색 글씨로 적혀 있긴 하지만, 도무지 읽히지가 앉아서 하나하나 맞춰보기란 다소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게 다 뭐였을까?
일단 전시장을 크게 둘로 봤을 때 첫 번째 공간은 일종의 실내로, 두 번째 공간은 일종의 야외, 즉 서구의 공공장소로 상상됐다. (일단 자연광이 유입되므로.) 그런데 폭탄이 떨어지고, 그에 반응하는 화분이 존재하고, 방이 스포츠 경기장처럼 펼쳐지고, 부재하는 기러기 세 마리가 모두를 내려다봤다.
사실 이것저것이 논리적으로 뒤죽박죽되는 상황에서 가장 거슬리는 요소는, 손잡이였다. 예전에 작가가 계단의 난간으로 작업을 전개한 적이 있다고는 하나, 누가 봐도, 양혜규의 2019년작 <손잡이들(Handles)>을 ‘디스’하고 있는 것처럼 뵀기 때문이었다. (작가는 다시 한번, 우연의 일치라고 했다.) 게다가 때마침, 서울관에서 양혜규 작가가 원형 문손잡이로 설치작업 <구각형 문열림>을 구현해놓은 터라, 김민애의 전시는 자연스럽게 양혜규의 현대차 시리즈 전시 <O2 & H2O>로 연결됐다.
아무래도 김민애는 경쟁전의 작가들보다는 자기 자신을 양혜규와 아이웨이웨이의 경쟁자로 사고했던 것일까? 언제부터 그는 이렇게 자신의 작업을 희생해가면서 현대미술의 허구적 면모를 풍자하게 됐을까? 그건 과거 박모가 시도했다가 실패한 길 아니었나?

추신) 나는 <올해의 작가상>이 1인 수상과 미드 커리어 서베이 전시 형식으로 바뀌어야 더 좋겠다고 생각한다. 현대차 시리즈가 지금의 형식으로 유지된다면, <올해의 작가상>은 더욱 내실 위주로 가야 옳다고 본다. 이제 제10회를 앞두고 제도 개선을 논의할 시점이다.

가나자와21세기미술관(2024.11.01~)
[만료]고흥군청(2024.11.01~2025.01.08)
[만료]한솔제지(2024.11.13~2025.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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