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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람展

디스토피아의서사

최우람展9.9~2023.2.26국립현대미술관서울

202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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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기계생명연합연구소(United Research of Anima Machine, URAM)는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연구 기관이다. 이 연구소의 설립자이자 미지의 생명체를 탐구하는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세상에 없는 이상한 기계 생명체를 창조하는 발명가이기도 한 연구소장 최우람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이므로 그와 나의 인연부터 밝혀야겠다. 2000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의 의뢰를 받아 김정희, 박영택과 함께 전시를 기획했을 때 나는 ‘멋진 신세계의 거주자들’이란 주제로 최우람을 초대했었다. 이 전시에서 최우람은 동전 몇 개로 자판기에서 쉽게 살 수 있으며 마시고 아무렇게나 버린 코카콜라 깡통을 이용하여 바닥을 기어 다니는 소라게를 제작했다. 소라나 고동의 패각을 짊어지고 생활하는 집게의 특성에서 착안한 이 작은 ‘움직이는 조각’은 빈 깡통에 숨겨진 집게발을 내밀어 바닥을 탁탁 치며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낯설고도 흥미로운 갑각류였다. 기계 소라게는 작가의 의도와 요청에 따라 전시장에 아니라 화물용 엘리베이터에 설치돼 짧은 음용의 쾌락을 즐기고 함부로 내팽개친 소비 사회의 쓰레기인 깡통의 복수를 예고하듯 어두운 승강기 내부를 배회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마이크로로보트란 회사에서 기계의 동작 원리를 익히던 패기만만한 엔지니어이자 청년 예술가였다.

멋진 신세계의 기계 생명체

그런데 내가 2004 부산비엔날레 현대미술전의 전시감독으로 그에게 출품을 의뢰하자 ‘제트 하이에이투스’란 낯선 학명이 붙은 기이한 무기물 생명체와 함께 그 물체에 대한 짧은 연구 보고서를 보내왔다. 보고서에 적은 ‘미국 모하비 사막의 비행기 폐기장에서 처음 관찰된 제트 하이에이투스는 여객기 엔진과 흡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데 음속 폭음(sonic boom) 없이 음속 이상의 속도로 막대한 풍속의 기류를 역류하여 비행한다’라는 가설이 마치 수폭 실험으로 지하에 잠든 고질라가 깨어나 인간 세상을 공격한다는 공상 과학 영화처럼 황당하면서 재미있었다. 이때쯤 그는 기계생명연합연구소의 모태가 될 실험실을 설치하고 인간이 버린 온갖 폐기물 더미에서 서식하는 기계 생명체를 찾아 흥미진진한 모험에 나섰을 수도 있다.

2007년이 저물 무렵, 나는 김종영미술관의 비상근 학예연구실장으로서 미술관이 매년 기획, 개최하던 ‘오늘의 작가’로 최우람을 추천하고 개인전을 추진하기 위해 그의 작업실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많은 시간을 들여야 완성할 수 있는 작업의 특성으로 일 년이란 짧은 기간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답만 듣고 돌아서야 했다. 깔끔하면서 조직적인 그의 성격처럼 기계 부품을 가지런히 정돈해 놓은 작업실은 작은 철공소 혹은 로봇 공학자의 연구실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으나 괴생명체의 유전자를 채취해 배양하는 기구나 혹은 그들의 장기를 적출해 분석하는 수술실이나 실험실은 보지 못했다. 그러다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을 기념한 전시에서 최우람은 제5전시실 외부 천장에 거대한 기계 생명체인 <오페르투스 루눌라 움브라>를 설치했다. 2008년 리버풀비엔날레와 2009년 폴란드 포츠난에 설치하였던 작품의 새로운 버전이기도 한 이 거대한 괴물은 절지동물이나 애벌레를 연상시켰지만 지구에서 발견된 바 없는 낯선 생명체로서 비늘과 같은 껍질을 펼치며 호흡했다. 리버풀에서 발표한 괴물이 리버풀 앞바다에 침몰한 배의 기계를 섭취하며 자라난 생명체가 비엔날레 현장에 출몰한 꼴이니 서울관에서는 한강에 잠겨있는 온갖 기계 부품을 흡수한 괴물이 조금씩 진화하여 몸체를 키우고 보다 발달한 조직으로 무장한 채 서울관에 등장한 꼴이라고 할까. 그 후 그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연구소(URAM)에서 발견 또는 발명한 괴생명체에 대한 소식을 듣질 못했는데 <MMCA 현대차 시리즈 2022>의 작가로 선정된 최우람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인류의 어두운 미래를 경고하는 묵시록적 서사를 주제로 한 새로운 기계예술을 발표한다니 미술관으로 가서 그가 이번엔 어떤 기계로 무슨 이야기를 풀어놓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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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작은 방주’란 제목으로 열린 전시는 서울박스의 <원탁>과 <검은 새>로부터 시작하여 죽음을 상징하는 흰 꽃 <하나>가 있는 방을 지나 <작은 방주>에 이르러 35쌍의 날개가 군무를 펼치는 장엄한 모습을 본 후 생명을 상징하는 붉은 꽃 <사인>을 거쳐 <샤크라 램프>와 <알라 아우레우스 나티비타스>를 보고 밖으로 나와 각각 해와 달을 상징하듯 현대자동차의 전조등과 후미등으로 만든 거대한 두 개의 구체로 구성되고 있다. 이런 구성은 전시장 조건에 따라 약간의 계획 변경을 했을지라도 일관된 서사 구조 아래 작품을 배치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전시에서 달라진 것은 무엇일까. 먼저 앞에서 말한 기계 생명체들이 모두 금속이란 경성의 재질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 전시에는 방역 요원과 의료진이 입은 방호복의 재질인 인조 섬유나 택배를 위한 포장 상자와 같은 연성의 재료를 활용하고 있다는 점과 의사(疑似) 학명을 지닌 기계 생명체 대신 지구에 실재하는 생명체를 표현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차이에도 인류의 미래를 불길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의 디스토피아에 대한 예언적 성찰은 이 전시에서도 나타난다. 먼저 서울박스의 까마득한 천장에 매달린 <검은 새>가 선회하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바닥에는 인조 밀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들이 정해진 시간마다 어깨에 진 원반을 떠받치며 일어섰다 앉는 운동을 반복한다. 불행하게도 이 허수아비의 머리는 원반에 공처럼 올려진 채 그 위를 아슬아슬하게 굴러다닌다. 두뇌가 없는 가련한 존재인 허수아비는 천개를 떠받치고 있는 아틀라스라기보다 노역에 동원된 노예이거나 무한 경쟁의 회로로 떠밀려 정해진 규칙에 따라 단순 행위를 반복하는 현대인 또는 가망 없는 욕망의 달성을 시도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 운명을 짊어진 인간을 상징한다. 그래서 마치 인공위성처럼 높은 곳에서 이들의 무한 반복하는 노동을 내려보는 <검은 새>는 이 상황을 제어하는 슈퍼 컴퓨터이거나 거대 감시체계를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이어 작은 방에서 흰 꽃 <하나>가 꽃잎을 열었다 닫는 모습을 보고 <작은 방주>가 설치된 제5전시실로 들어서면 먼저 세 개의 <무한 공간>과 마주치는데 그 앞에 서면 거울 효과에 의해 깊은 미로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착시 현상을 경험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작품들은 방주의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이자 끝없는 미궁이며 허상의 공간이기도 하다. 방주가 작동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약간의 인내심이 필요하다. 기다리는 동안 전시실은 방주의 퍼포먼스를 보기 위해 모인 관객들로 꽉 찬다. 움직임뿐만 아니라 빛, 소리 등을 동원하기 때문에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참여를 유혹하는 키네틱아트의 매력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이윽고 출항을 알리듯 기계의 관절이 작동하는 소리와 함께 신기하고 장엄한 방주의 퍼포먼스가 시작한다. 출항을 암시하는 포장 상자로 만든 35쌍의 날개가 마치 배의 노처럼 조금씩 움직이다 격랑과 노도를 만나 날개를 펼치고 마침내 해일에 휩쓸리는 상황을 연출하며 퍼포먼스는 절정에 도달한다.

그런데 항구에 있어야 할 등대가 이 배의 가운데 실려있는가 하면 항해를 지휘해야 할 선장이 각각 앞과 뒤에서 손을 내뻗어 각자 방향으로 지휘하고 있어서 이 배가 어디로 갈지는 알 수 없다. <두 선장>의 등 뒤에 제임스웹 우주 망원경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우주 공간을 항해할 것 같기도 하지만 전진도 후진도 못하는 상태인데 등대조차 배를 인도하기는커녕 독자적으로 작동하고 있으니 항해의 결말을 예측할 수 없다. 이것은 목적지가 뚜렷하게 정해지지 않은 가운데 끝없이 표류해야 하는 방주의 운명을 암시한다. 벽면에 투사된 끊임없이 열리는 문을 촬영한 영상이 그것을 알려준다. 5분 간격으로 무한 반복하는 이 영상은 문을 나서더라도 계속 이어진 문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방주가 정박해야 할 땅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좌우 벽면에 설치한 닻과 천사는 방주의 항해가 목적지를 상실한, 애초에 목적지라곤 없는 상태임을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즉 끊어진 닻은 목표 없음이나 쓸모없음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정박하지 못하고 끝없이 표류해야 하는 방주의 운명을 상징하며 이미 지쳐 날개가 꺾인 천사 또한 희망의 상실과 추락을 암시한다.

방주는 구원의 약속일까

이 전시의 제목이자 주제인 방주에 대해 돌이켜보자. 굳이 성서 고고학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구약성서의 노아의 대홍수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들의 전설적인 왕이자 서사시인이었던 길가메시의 이야기로부터 전래한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길가메시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언젠가 이 지역에 대홍수가 발생하자 강의 상류로부터 밀어닥친 물이 범람하여 하천 유역에 있던 고대 도시를 집어삼키고 한때 뭍이었던 지역이 바다에 묻혀버린 사건이 일어났음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노아의 홍수는 그것을 신을 거역한 인간으로 향한 신의 징벌로 바꿔놓았다. 그런데 대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는 과거지사가 아니다. 지구 온난화와 기후 위기로 산불과 홍수가 빈번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신의 징벌이 아니라 인간이 자행한 파괴가 가져올 자연의 징벌을 두려워해야 한다. 더욱이 지금까지 출몰한 코로나바이러스와는 다른 정체불명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에 의한 팬데믹 상황에서 도시가 봉쇄되는가 하면 어떤 도시에서는 장례식장이 시신으로 포화 상태에 이르고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라 비대면이 새로운 일상이 되는 위기의 터널을 힘겹게 통과하면서 재난과 재앙의 이유인 질병 역시 자연의 수탈과 착취를 바탕으로 문명을 누려온 인간에게 가이아가 내린 복수는 아닌지 반성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방주는 재난이나 재앙이 불러올 절멸의 암울함으로부터의 탈출과 구원을 의미했다. 그래서 방주는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이었으나 최우람의 <작은 방주>는 그 희망조차 부질없는 욕망임을 묵시적으로 드러낸다. 그래서 그가 기계 생명체를 발표할 때부터 가져왔던 문제의식, 즉 인간의 욕망의 결과인 문명이 오히려 인간을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디스토피아적 전망이 이 전시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기계 생명체가 인간을 위협한다는 증거는 없다. 따라서 인간이 폐기한 기계에서 에너지원을 흡수하여 생명을 획득한 미지의 생명체는 탐색의 대상이었지 격멸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목적지를 상실한 방주의 항해는 인류의 최후가 인간 자신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일 수 있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가까운 훗날, 인간이 인류세로 규정했던 시대가 인류의 종말을 예고하는 서사로 기록될 수도, 아니면 그 기록조차 인간이 자초한 대재앙으로 사라져버릴지 모른다. 그래서 이 작은 방주를 계기로 우리 스스로 물어야 한다. ‘멋진 신세계’는 우리가 정박해야 할 약속의 땅이 아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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