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nding Light展
2020 / 08 / 05
몰입의 공간
Bending Light展 6. 5~8. 14 페이스갤러리 서울(https://www.pacegallery.com/exhibitions/-bending-light/)
/ 우 정 아
제임스 터렐 <Atlantis, Medium Rectangle Glass> LED 조명, 에칭한 유리, 얕은 공간 142.2cm×185.4cm 2시간 30분 2019
1970년, 뉴욕의 페이스 갤러리에서 로버트 어윈과 피터 알렉산더를 포함한 서부 출신 미술가 13인의 전시 <캘리포니아 컬러의 10년(A Decade of California Colors)>이 열렸다. 『Artforum』의 전시 리뷰 첫 단락은 “촉망받는 학자와 철학자들이 캘리포니아로 이주하면 몇 년 동안 그저 테니스를 치거나 수영이나 한다”고 시작한다.* 1960년대 이래로, 평론가들은 지적인 뉴욕에 비해 유희적이고 향락적인 캘리포니아의 문화가 그 기후에 걸맞게 얄팍한 감각에 호소하는 가볍고 퇴폐적인 키치를 낳았다고 평가했다. 어윈, 알렉산더, 그리고 제임스 터렐 등의 작품은 ‘피니쉬 페티쉬(finish fetish)’라고 불렸는데, 이는 수작업으로 작품을 마감하는 이들이 오토 바디와 서핑 보드의 예쁘고 반짝이며 매끄러운 표면에 집착하는 캘리포니아의 자동차 매니아 및 서퍼들과 다를 바 없다는 의미였다. 정확히 반세기 후인 2020년, ‘피니쉬 페티쉬’의 거장들이 서울의 페이스 갤러리에 등장했다.
지금은 ‘6초 광고’의 시대다. 지난 수십 년간 30초였던 광고의 황금률도 밀레니얼 세대의 참을성 없는 클릭을 버티지 못했기 때문이다. 금방 시작한 영상이 광고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까지의 그 짧은 1-2초 동안 사용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지 않으면 바로 스킵되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시대에,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두 시간 반짜리 영상을 내놓은 터렐은 사화산 <로덴 분화구>를 구입해 40년 동안 조성해 온 이 작가의 무모함을 다시 한 번 증명한다.
갤러리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눈길을 사로잡는 터렐의 <Atlantis, Medium Rectangle Glass>(2019)는 크지 않으나 가늠할 수 없는 깊이를 가졌다. 직사각형의 공간 속에서 어렴풋이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파스텔톤의 색면은 대단히 느린 속도로 명멸하면서, 그 어떤 서사나 자극 없이 주위의 음성을 소거하고, 시간의 흐름을 멈춘 듯이, 시선을 강렬하게 사로잡는다. 그런데도 작품의 물리적 실체를 알아차리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깊은 공동(空洞) 같았던 벽체 안의 공간은 실은 한 뼘 정도의 얄팍한 깊이를 뒤덮은 PVC 스크린이고, 그 뒷면에 이 작품을 위해 새로 조성한 좁은 방이 있고, 그 안에 LED 조명이 설치됐다. 터렐의 작품은 이처럼 조명의 알고리즘이나 말끔하게 뚫어 놓은 벽면이 아니라 서서히 변화하는 빛과 색을 감지하는 눈의 작용, 아니 어쩌면 견고한 벽과 텅 빈 허공조차 분간해내지 못하는 안구의 허술함일지 모른다.
다른 쪽 벽면에는 로버트 어윈의 일련의 형광등 <Belmont Shore>(2018)가 가지런히 붙어 있다.** 어윈은 불을 켜지 않은 형광등에 다양한 색의 투명한 젤을 덮고, 그 사이사이의 미세하게 다른 벽면 간격에 회색 선을 세심하게 칠했다. 흰 벽과 안료, 형광등과 틀과 그 그림자는 보는 눈의 위치와 움직임, 전시장의 조명에 따라 불이 켜진 것 같기도, 꺼진 것 같기도 한 환영과 회색 선이 그림자인 것 같기도, 조명틀의 일부인 것 같기도 한 착시를 낳는다. 맞은 편 기단 위에 가지런히 놓인 피터 알렉산더의 투명 레진 조각들 또한 단정하고 명쾌한 형태를 가졌으되, 색채는 푸르나 정확히 푸르지는 않고, 검푸른 보라색이나 딱히 하나의 색을 특정하기 곤란하게 미묘한 차이와 밀도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터렐의 맞은 편에는 댄 플래빈의 형광등 <무제>(1984)가 걸려 있다. 이번 전시에서 유일하게 뉴욕 출신이자, ‘캘리포니아와 달리’ 지적이고 금욕적인 뉴욕의 미니멀리즘을 대표하는 작가이나, 그 또한 조명이 공간을 관통해 조성하는 하나의 시각적 현상으로서 작품을 제작해 왔다. 전시장 코너를 가로지른 플래빈의 형광등은 두 벽 사이의 공간을 붉은 색과 푸른 색이 어우러진 빛과 공기의 덩어리로 변모시켰고, 그 빛의 묵직한 볼륨 속에서 ‘형광등’이라는 하나의 사물은 존재감을 잃는다. 한때 할 포스터는 관객을 점점 몰입의 경지로 몰고 가는 플래빈의 작품을 두고 ‘미니멀리즘의 재앙’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뉴욕의 플래빈과 엘에이의 터렐, 그 사이의 예쁘장한 색으로 충만한 공간은 실제로 머리를 비운 채 ‘몰입’이 가능한 환경을 만든다.
넘치는 이미지의 시대에 텅 빈 무언가를 이토록 오래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터렐과 플래빈 사이의 빛, 어윈과 알렉산더의 사물들 주위의 공간은 사진이나 동영상으로는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표현하고도 싶으나, 이 작품들은 사실 눈이란 그렇게 믿을만한 기관이 아니라는 걸 증명한다. 자극적인 영상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실제로는 아무것도 눈 여겨 보지 않고 살아왔는지 모른다. 어윈은 자신의 목표가 ‘당신이 오늘 본 것보다, 내일 조금 더 많이 보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지각 능력의 고양이 의식의 전환을 이끌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의 변혁을 불러오리라고 믿었던 20세기의 마지막 낙관주의자들이었다. 세상을 느끼는 내 몸을 극도로 의식하고, 사물을 판별하는 스스로의 인식을 끝없이 의심할 때, 더 나은 사회를 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간절히 필요한 존재다.
* Joseph Maschek, “A Decade of California Color”, Artforum (January, 1971), pp.72~73.
** 터렐과 어윈은 1967년부터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에서 인근 과학기술 연구소와 연계하여 마련한 레지던스 프로그램, <아트 앤 테크놀로지(Art and Technology)>에 함께 참여하면서 사물로서의 미술에서 공간 경험으로서의 미술로 작업의 영역을 확장해왔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실험심리학 및 지각심리학과 같이 인간의 감각 작용에 대한 실험 및 연구에 집중했고, 감각적 자극이 극도로 변형된 상황에서의 생리적 반응을 직접 경험한 끝에 주어진 공간과 조명을 조정하여 일련의 시각적 현상을 창출하는 작업의 방식으로 전환했다. 우정아, 「로버트 어윈: 지각과 공간의 예술」, 『미술사학』(24호, 2010), pp.415~443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