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COMERS 77×김맑음

폐허와 스크린 사이에서, 미끄러지지 않을 수 있다면
/ 김 맑 음

2019년 한 비평가의 동시대 미술에 대한 진단은 넘쳐나는 ‘포스트-’ 파도 속에서 다소간의 멀미를 느끼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동시대 모든 새로운 경향을 꿰는 만능열쇠”라는 그의 표현처럼, ‘포스트-’라는 용어가 들어가면 앞서 나가는 무엇인가를 추적해야만 할 것 같으면서도 어떤 것을 추적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지시하는 대상에 적확하게 맞아떨어질 것이라는 전제가 어렴풋이 있다. 이는 클라인의 병과 같은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 시작과 끝점이 만나 구분이 되지 않는 형상을 떠올리게 한다. ‘포스트-담론의 소화불량’ 속에서 그는 니콜라 부리오가 포스트프로덕션에서 언급한 미술의 재맥락화나 재프로그래밍에서 출구를 찾는다. ‘또 다른 내러티브의 생산 가능성’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1)
유사한 감각의 연장선에 있는 이의 질문과 답변은 하나의 이정표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또 다른 내러티브를 찾을 것이라는 소박한 목적을 전시장 안에서 변변치 않게 놓치곤 한다. 시간을 기반으로 하는 내러티브를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은 곧 거대 서사 사이를 파고 들어가지 못한다는 상태의 반증이기도 하였으며 혹은 극단적으로 나아간다면 지지체로 삼고 있는 역사가 부재하다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부재는 이미 2000년대 이후 과거에 회귀하려는 복고적 현상 기저에 숨겨져 있는 것이었고, 그것을 ‘유령적 시간성’이라 명시하며 드러내는 시도도 이미 낯설지 않다.2)
그렇다면 이정표를 세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문자 그대로의 비유에서 시작해보자. 가능하지 않는 이유를 찾는다면 크게 두 가지를 예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그 기반이 되는 땅이 물러서 무엇인가를 세울 수 없다는 물리적인 상황, 그리고 두 번째는 이정표 자체가 정확한 정보를 담지 있지 않아서 표지판의 기능을 할 수 없는 내용적인 상황으로.

물리적인 상황: 폐허와 스크린 사이에서

태어날 때부터 컴퓨터, 휴대전화 등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를 미술계라는 특수한 영역 안에서 바라본다면, 그들은 일종의 신생공간 세대로도 치환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기술의 급속한 발전이 비교적 젊은 시기에 일어났던 그 시기와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기존 미술 전시공간과는 다른 형태의 공간들이 생겨났고, 모든 전시를 담고 있다는 웹사이트의 체에 걸러지지 않는 정보들처럼 온라인 공간에 위치하게 되었다. 신생공간을 운영한 주체들이 아닌 그곳을 찾아다니는 관람객의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 전시 공간에 대한 정보들은 줄곧 SNS 플랫폼이나 독자적인 홈페이지를 활용되어 전달된 것과도 궤를 함께한다. 가입하지 않으면 접근하기 어려운 온라인 환경을 중심으로 전달되면서 제한적인 하지만 동시에 소수의 관객은 일종의 컬렉터처럼 개인적인 아카이브 영역으로 전시 장소까지 포섭하여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특히나 이러한 전시 공간들은 도시 곳곳에서 ‘미술을 이런 곳에서 관람할 수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곳곳’에 있었고, 그곳으로까지 이동하는 거리 역시 이전의 공간들과 달리 많은 시간을 소요하게 만들었다. 혹은 전시 공간이라는 성격을 지니지 않더라도 일시적으로 임대를 받아 전시를 하면서 전시 공간들의 지형도를 그리는 것이 더 산재된 모습에 가까웠다. 이 산재된 공간들에 이르고자 이동하는 짧지 않은 시간과 거리에서 마주한 것들은 이질적인 도시의 이면이었다. 문화 시설이 들어서는 도시의 맥락과는 많이 떨어진 곳들이 많았기 때문인데, 이중 대다수는 시에서 재개발 지구로 정한 영역과 경계선을 함께 하기도 하였다. 인공적인 폐허의 이미지는 이미 전시 공간 외부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주변 맥락에 대한 잔상은 전시장 안에서 데칼코마니로 이어지게 된다. 전시 공간 내부는 마치 조반니 피라네시(Giovanni Piranesi) 판화에 나타나는 가상의 폐허처럼 건물 바깥의 도시가 뒤집혀 들어온 모습이 된다. 흥미로운 지점은 그 가상의 폐허를 구축하는 데 작품들 역시 어느 정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질적인 것들이 하나의 작품으로, 그리고 전시로 구성되는 방식은 일정 부분 재개발 지구와 신도시의 모습을 중첩한 가상의 폐허와 유사한 조합법이다. 그리고 이 구성 방식은 작가들의 이후 작업에도 적지 않게 잔상을 남기고 있는 듯하다. 레디메이드, 더 나아가 리사이클에 가까운 오브제의 사용과 조형성을 극대화한 형상은 그러한 방식으로 공존하고 있다.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가서 신생공간 세대를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로 치환해보자. 디지털과 함께 자란 세대는 그 발전 과정과 함께하면서 디지털을 낯선 것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디지털적인 특성이 전시장으로 이식되는 것은 이제 너무나 자연스러운 순리였다. 그리고 픽셀로 이루어진 이 디지털의 특성은 주변 도시 풍경처럼 안티-엘리어싱되지 않는 건물과 함께하면서 그 가상을 매우 견고하게 이루어내고 있었다. 그 누구도 삶을 영위하는 공간이 그 모습과 유사하지 않기 때문에 이 가상적인 이미지는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전시가 쉽게 열리지 못하는 지금 시점에서 이는 소위 말하는 온라인 전시의 모습으로 위상을 바꾼다. 주변 도시의 흐름이 탈각될 수밖에 없는 이 온라인 전시는 다소 단정한 모습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전시의 기본적인 리플릿 정보인 전시 도면을 이곳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 구성이 공간과 관련 없음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다. 다음 발걸음을 어디로 옮길지 떠올리는 동선의 시간적인 순서나, 전시 공간을 마주하였을 때 우선적으로 시선이 닿는 것은 온라인 전시에는 없다. 다만 화면 내에서 같은 비율로 작가나 작업의 이름이 등장하고, 그것을 클릭하면 정보가 팝업하는 형태가 대다수를 이루고 있다. 물론 클릭과 스크롤을 통해서 임의로 구획을 구분하고 볼 수도 있겠지만, 팝업과 하이퍼텍스트 링크의 연속선 위에서는 사실상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공간은 사라진다.
도시의 폐허 잔상과 스크린이 동전의 양면처럼 뒤집히는 이 과정은, 즉 그 두 양상이 서로 붙어있어 공통적인 지대를 공유하고 있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줄곧 ‘과거에 대한 향수’로 일컬어지는 이 폐허는 매끄러운 스크린과 같은 질감일 수도 있다. 매끄럽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이들이 폐허를 표면으로 소비하다가 조금 더 깊게 들어갔을 때 그 끝에서 멈추지 못하고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

내용적인 상황: 내러티브가 아니라면

물리적인 공허 위에서 많은 작가들이 매체 실험을 바탕으로 기획 의도 자체가 실험의 과정과 결과를 보여주고 있는 현상을 반추해본다면,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던 방향은 처음 전제로 하였던 ‘내러티브’가 아닐 수도 있다. 내러티브를 찾는 것이 변변치 않게 실패했던 것은 앞서 살펴보았던 도시의 폐허와 스크린이 일종의 도면을 기반으로 동선을 찾지 못하는 상황과 겹친다. 시간성을 담보로 하는 내러티브가 시차적 위계를 갖는 발걸음을 잃어버린 곳에서는 그 시작점과 끝점을 찾을 수 없다. 방향이 버려진 곳에서 무엇을 찾아야 할까.
폐허인 스크린을 고려하여 디지털과 아날로그에 대해 논의를 펼친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의 이야기에 기대어본다다. 그에게 디지털은 아날로그를 기반으로 해야 디지털 스스로 시각적인 존재로서 드러나는 것이 가능하다고 간주된다. 이는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상호 배타적으로, 하나의 종말이 하나를 발생을 의미하는 양태라는 주장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오히려 아날로그가 디지털보다 항상 초과한다고 보는데 “지각에 있어서는 주변을 에워싸고, 공감각적으로는 도플러 운동을 하며, 배꼽모양의 배경을 이루며, 그 길을 따라 모든 지점에 내재하는 가상적 중심으로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서서히 후퇴”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수미가 이 과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비대칭적으로 함께 사유해야 하는 지점이다. 아날로그는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는 주름이기 때문이다.3)
주름은 굴곡을 만들어내고, 그 굴곡은 결국 무엇인가를 매끄럽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소이다. 하지만 시각장 표면에 남는 이 주름의 방해는 오히려 내러티브의 반대 지점의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할 것이다. 그 힘을 이곳에서는 ‘마찰력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미술사에 다른 이름으로 변주되어 나왔던 수많은 개념들과 미래가 도래한 것으로 여겨지는 디지털도 시간성도 포섭하지 못하는 그 힘 말이다.4)
이 맥락에서 최근 ‘발간’된 『뉴스페이퍼』5)는 그 마찰력에 대해 의미 있는 대척점을 서로 엮은 지면이라 할 수 있다. 신문의 형태가 되면서 텍스트나 이미지가 흔히 근간에 두고 있는 두께감 있는 지류가 아닌, 마치 스크린처럼 얇아졌지만 그만큼 특유의 질감이 강조되는 연회색의 신문용지가 지지체가 되었다. 사실 이를 지지체라고 부르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연약한 구조이다. 동시에 지면이 얇게 붙잡고 있는 내용들은 일부에서는 광고처럼, 일부에서는 게임처럼, 그리고 일부에서는 정말 이미지와 텍스트처럼 자리를 잡으면서 홈페이지의 팝업들이 무작위로 튀어나온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내러티브적인 순서와 위계는 찾을 수 없다. 단지 시각적인 취사선택이 이루어지고, 그 조합은 임의로 결합되었다가 해체되는 것이다. 그렇게 디지털은 아날로그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마수미의 관점에서 아날로그를 극단으로 밀고 나가면서 그 차이를 넘어 유사한 교집함을 찾게 한다. 신문을 펼치고 넘기기 위해 표면을 미는 과정에서 디지털 매체를 밀어내는 그 느낌과는 분명 다른 ‘마찰력’이 교집합이 제외된 영역에서 우리를 붙잡을 것이다.
결국 이정표 세우기를 실패하는 과정은 오히려 지금 이 세대 미술의 초상이 구체적으로 명시된 표지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역설의 모습은 김사과 소설의 주인공들의 그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제 지면이 끝나는 모서리를 넘기기 전 나/우리의 초상이라 생각되었던 그 모습에 한 문장을 덧붙여 본다. ‘이정표’를 마무리하는 그 문장.

“이제 제니와 리는 매주 서울 시내의 교회를 돌며 자신들이 살아온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다. 이야기는 거듭될수록 그럴 듯 해진다. 더욱 비참해지고, 더욱 슬퍼지고, 더욱 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제니와 리는 자신들이 하는 이야기를 점점 더 믿을 수가 없게 된다. 반복 속에서 그들의 과거가 너덜너덜해진다. (···) 말하면 할수록 그들의 과거는 희박해진다. 어쩌면 이제 제니와 리에게 더 이상 남은 과거는 없다.”6)

아니다, 아직 우리에게는 미끄러지지 않게끔 하는 마찰력이 남아있지 않은가.

1) 이진실, 「계시와 의심 사이: 믿음의 알레고리로 테크노크라시를 해부하기」, 『2019 SeMA-하나평론상: 한국 현대미술 비평 집담회 자료집』(서울시립미술관, 2019), pp.24~43.
2) 남웅, (윤율리, 구정연 편), 「안녕한 듯, 안녕하지 않은, 안녕한 것 같은, 안녕들 하십니까?」, 『메타 유니버스: 2000년대 한국미술의 세대, 지역, 공간, 매체』, 미디어버스, 2015.
3) 브라이언 마수미, (조성훈 역), 「아날로그의 우월성에 관하여」, 『가상계』, pp.238~248.
4) ‘마찰력’이라는 단어는 공교롭게도 필자가 쓴 회화에 대한 두 편의 글에 공통적으로 들어갔다. “캔버스의 흰색에서 물감의 채색과 바니쉬까지 색채들이 얇게 켜켜이 쌓이고 겹쳐지면서, 뒤섞인 이 흔적은 그의 회화가 쉽사리 미끄러지지 않도록 마찰을 일으킨다.” <임노식: Pebble Skipping>(통의동보안여관, 2020) 카탈로그; “스크린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사방에서 오는 몸짓의 마찰…”, 「캔버스가 부풀어 오르면 미닫이문을 여시오」, <부풀어오르는 세계>(드로잉룸, 2020) 카탈로그.
5) 권혁규, 허호정 편, 『뉴스페이퍼』, 2020년 12월호.
6) 김사과, 『테러의 시』, 민음사, 2021.

COVER
정유진 <폭삭벽> 종이에 프린트 50×30×10cm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