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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여성-아무개의 곤란 
/ 유 지 원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젊은 여성 기획자’가 되어 있었다. 참여 작가 전원이 여성이었던 첫 기획 전시부터 여러 여성 창작자와 협업해온 활동 가운데 자리 잡은 호명이었다. 달리 부정할 마음은 없지만, 대다수가 남성인 자리에서 ‘젊은 여성 대표’로서 발언을 해야 하거나 ‘여성이슈’―여성을 끼워 넣어야 하지만 ‘페미니즘’은 너무 ‘세다’고 느낄 때 쓰는 합성어―를 다루어 달라는 요청에 달가워해야 할지 자존심이 상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러한 곤란은 여성으로 정체화한 20~30대 창작자와 매개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부대끼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유의미한 경향성을 끌어내기에는 둔탁하고, 단일한 집단으로 묶기에는 그 구성 요소가 이질적이며, 그렇다고 간과하기에는 심상치 않은 ‘젊은-여성-아무개’라는 범주가 아예 황당무계한 것은 아니다. 2016년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과 ‘#미술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기점으로 1980~90년대 여성들은 ‘알파걸’의 환상을 벗고, 페미니즘의 언어로 자신의 경험을 재구성하며, 적극적으로 여성 동료와 연대했다. 세분화된 세대 및 배경, 입장은 서로 달랐지만, 여성이라는 범주에 강력하게 동일시하는 흐름은 선명했다. 미술계와 미술대학 내 성폭력에 대한 고발, 공동체적 인식과 대응, 제도 마련에 대한 논의와 실천, 그리고 여성 창작자 가시화와 이슈 파이팅 성격의 프로젝트가 이어졌다. 물론 2020년은 ‘미술계 Y 성희롱 사건’을 비롯하여 바뀐 것이 없다는 좌절감을 불러일으킨 한 해였으나, 표준 계약서에 성평등 관련 조항이 추가되고 공공기금 수혜자가 반드시 성평등 교육을 받아야 하며, 미술대학마다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다각도로 고민한 작업이 다수 출연하는 등 동시다발적인 노력의 성취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특히 지난 몇 년간 여성의 경험을 가시화하고 여성 창작자 및 관객을 임파워링하는 데 초점을 맞춘 프로젝트의 양적 성장은 고무적이다. 특히 여성 창작자가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밝히거나 작업을 페미니즘의 맥락에서 설명하는 일에 부당하게 설정된 문턱을 낮추고, 동료를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이는 여전히 몇 가지 곤란을 수반한다. 하나는 정체화와 범주의 문제다. 가시화를 우선시하는 기획의 팽창은 ‘젊은 여성’이라는 범주를 부연하기보다 고립시키는 역효과를 낳는다. 이는 마치 문화미술계에서 여성 예술인을 위한 자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를 열외로 치는 교묘한 백래시와도 부지불식간에 포개진다. ‘여성적’인 것은 필히 맥락상 지엽적이며 형식적으로 빈약하다는 오명이 끈질기게 잔존하는 가운데 여성 창작자의 작업물이 어떠한 형식적, 매체적, 양식적, 담론적 성취를 이루었는지 짚어내기를 거듭 포기 혹은 실패할 때, 미술계 내 ‘여성’은 당위만 무거운 일종의 블랙홀 기호로 전락한다. 수많은 창작자가 자신을 ‘여성-작가’라고 정체화하거나 호명되는 한편 그 함의는 빈약하고 노이즈의 질량만 증폭된다면, 이는 무척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젊은 여성’을 가시화하는 기획은 2010년대 이후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기 전부터 존재했던 여성 창작자의 실천을 간과하는 동시에 반복하는 모순을 마주한다. 페미니즘 리부트의 주요 속성인 디지털 공간에서의 기동성과 기성세대와의 불화는 급진적인 변화에 대한 절박함을 방증하는 한편 형식적, 담론적 단절을 낳았다. 이러한 자장 내에 ‘지금’ ‘여기’의 ‘젊은-여성’의 현실을 내보이는 프로젝트의 효용과 의의는 시간이 갈수록 역치가 높아짐에 따라 반락될 위험이 있다. 또한, 여성 연대와 여성의 발언을 앞세우지만 페미니즘 미술의 계보와는 거리를 두려는 간극에서 여성미술이 그간 다루어온 시각 언어와 방법론은 갱신되기보다 엇비슷한 모습으로 공회전한다. 다시 말해, 외형상 오마주에 가까운 작업이 생산되는 가운데 이를 다룰 축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1)
강조하건대 여성적인 것, 여성의 경험, 여성 창작자를 전면에 내세운 기획은 그 실행 주체와 맥락에 따라 분명 실천적 효용이 있다. 가령, 국공립 기관은 여성 참여자의 비중을 늘리고 관련 기획의 수를 대폭 확대하는 것 자체로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가시화의 전략이 요구된다. <올해의 작가상 2019>가 최초로 후보 4인 전원을 여성으로 선정하고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한 것은 개별 작품이 얼마나 여성의 의제를 첨예하게 다루었는지의 여부와 무관하게 파급 효과가 있다. 또한, 때로는 개별 작품에 대한 섬세한 비평보다 여성 혐오적인 작품에 반대한다는 내용을 눌러 적은 민원과 사태를 적어 내려간 기사가 더 확실한 압박을 발휘하기도 한다. 다만, 운동성은 단일 전선에서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불화하는 동기로 움직이는 서로 다른 규모의 행위자들이 전혀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임의적인 네트워크에서 창발하고 팽창한다. 여성-기호를 전면에 내세운 소규모 프로젝트는 많은 경우 이미 동의하는 미술계의 구성원이나 관객에게 선택적으로 열려 있기 때문에 분화하고 여타 요소들과 맞붙지 못한다면 고립될 위험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촘촘한 전선을 맵핑해야 할 것이다.

재현과 계보에 대한 자기 검열

고려해야 할 많은 전선 중 젊은-여성-아무개가 자주 마찰하게 되는 것은 자기 검열이다. 특히, 폭력에 대한 반성이다. 여성 작가는 시선과 재현의 역동을 살필 때, 대상 혹은 폭력의 피해자와 동일시하여 이를 보다 민감하게 고려하게 된다. 최근 사이버 성범죄의 양상들은 이미지를 실체와 완전히 분리하는 플레이를 깊이 의심하게 만들었다. 딥페이크 기술이 여성 아이돌을 성적 대상화하는 데 사용되고, 리벤지 포르노가 여성의 삶과 존엄을 위협하는 가운데 여성의 이미지를 작업의 소재로 끌어오는 데는 팽팽한 숙고가 요청되는 것이다. 이러한 윤리적 감수성과 치열한 고찰은 모든 창작자에게 요구되는 것이지만 특히 여성 창작자 각자에게 첨예한 문제로 다가온다. 나아가 무언가를 관찰하고 접근하는 순간, 즉 ‘나’를 관찰자로 두고 어떠한 대상이 설정되는 순간 융기하는 잠재적인 폭력은 여성 창작자를 더 집요하게 괴롭힌다. 많은 경우, 젊은-여성-아무개는 상황을 통솔하거나 자신의 관점에 의거하여 특정 대상을 프레이밍 하는 것 자체에 어려움과 거부감을 느끼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는 유난히 여성이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작업을 할 때, 대상 설정의 진정성, 리서치의 충실함과 재현의 방식 등을 더 촘촘하게 검열당한 경험을 축적하고 내면화한 원인도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소위 ‘파격적’이거나 피사체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작업에는 자신이나 매우 가까운 이를 대상으로 선정하는 자해의 수순을 밟는 것이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또 다른 검열은 계보에 대한 것이다. 분명 두드러진 예외가 존재하지만, 많은 젊은-여성-아무개가 창작이나 기획의 시작점을 역사적 흐름에 맥락화하거나 굵직한 개념으로 설명하는 데 소극적이다. 미술사와 담론의 맥에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미술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간 여성의 목소리를 소외하며 축적된 담론은 시대가 바뀌었다고 그 속도에 발맞추어 여성의 자리를 내어놓지 않는다. 남녀 불문하고 창작자는 작업 세계가 둔탁한 언어로 포착되는 것을 꺼리게 마련이지만, 작업 세계가 해석, 해명, 정당화되는 과정에서 남성의 작업물이 차차 담론의 언어로 정돈되는 사이 여성의 그것은 ‘섬세하다’는 값이 없는 수사로 만족해야 하는 것은 다분히 문제적이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여성주의 및 여성 가시화 기획에 열망을 보였던 것은 배웠지만 체화하지 못하고 튕겨 나갔던 큰 단어들과 대조적으로 거기에는 자신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재현과 계보에 대한 자기 검열은 젊은-여성-기획자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작가와 작품을 수단 취급하여 자신의 관점을 일방적으로 관철하기보다 여러 참여자의 욕망을 이해하고 원만하게 매개하는, 특정 사조나 줄기를 네임 드롭핑 하듯 흘리며 기회를 엿보는 것이 아니라 침착한 관찰과 섬세한 언어를 구사하는 젊은, 여성, 기획자! 전선을 정비하고 태도를 정립할 때, 소셜 네트워크와 더불어 대두된 자기 전시의 정치는 난점을 더한다. 자기 전시의 시류는 태생적으로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하는 시각예술계에서 ‘독립기획자’라는 위태로운 정체성과 결합하여 그 어떤 행보나 결과물이든 개인의 차원으로 소급해버린다. 인정하기 뼈아픈 사실이지만, 젊은-아무개의 성취는 자장에 파장을 일으키기보다 순식간에 자기 자신으로 역류하여 ‘뭘 하는지 자세히 모르겠지만 여하튼 요즘 바쁘시겠어요’라는 상찬으로 종결되곤 한다. 젊은-여성-아무개 1인은 기어코 겹겹의 의심과 자기 검열, 부당하게 높은 기준을 항시 마주하는 다른 젊은-여성-아무개와 연결될 수 있을까? 궁극의 인정투쟁 활극 가운데 상기한 검열을 넘어 개별 실천 사이의 차이를 벌려 젊은-여성-아무개라는 모호한 범주를 분할해내는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이처럼 과제를 벼려낸 후에도 개운치 않은 구석이 있다. 사회 각 분야에서 ‘멀쩡한’ 남성의 성폭력으로 인해 공동체가 산산조각 나버리면 이를 재건할 의무가 당연한 듯 여성에게 남겨지고, 유리 천장 따위 여자들이 부숴버리라는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 익숙한 함정에 빠져든 것 같다. 결국 여성 창작물과 기획에 대한 돌파구를 찾고 담론을 창안해내는 것 역시 여성의 몫으로만 남겨질 것인가? 무서워서 말도 못 하겠으니 조용히 작업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할 특권이 주어진 이들은 어쩔 것인가?
물론 여성에게만 부과된 책무를 반으로 갈라 남성에게 나눠주자는 단순한 접근으로 귀결될 수는 없다. 지난 몇 년간 남성이 아이를 돌보고, 가사노동을 하는 모습을 집중 조명하며 ‘가정적인 남성’을 상찬하는 TV 예능 프로그램이 결과적으로 여성 방송인의 자리를 몰아냈던 것처럼, 여성이 발언해야 할 기회를 오히려 박탈하는 부작용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단지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남성들이 ‘남성성’, ‘남성스러움’, ‘남성적인 것’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다. 보편적인 인간을 대변하는 듯 스스로를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이들이 남성-기호를 놓고 곤란을 겪는다면,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모두의 경험이 아니라 남성의 경험이었으며, 이 세상이 그렇게 생긴 것이 아니라 남성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거나 보이지 않았던 것이라고.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젊은-남성-아무개가 되어 있었다고.

1) 동일한 함정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언급하자면, '99 여성 미술제: 팥쥐들의 행진' 다음 해인 2000년에 백지숙은 “새로운 미술언어를 발견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80년대 민중미술이 90년대에 들어 쇄신을 이루지 못했던 점을 상기하며 페미니즘 또한 “새로운 어법의 모색이 필수적”이라고 짚은 바 있다. (백지숙, 「'99 여성 미술제 팥쥐들의 행진을 복습하다」, 『여성과 사회 11』, 2000, p. 260.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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