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버튼 ON… 울보들의 성지

OCI미술관, 젊은 작가 이은경 개인전
2026 / 06 / 01

화가 이은경. 그는 감정을 숨기는 일이 미덕이 된 세상에서, 그동안 억눌린 ‘눈물’을 화폭에 거침없이 쏟아낸다. 성별, 경력, 외모를 잣대로 차별받았던 울분의 경험을 모티프 삼아 현대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를 폭로해 왔다. OCI미술관에서 이은경의 개인전 <수도꼭지 연대기>(4. 17~5. 30)가 열렸다. 회화에 키네틱 요소를 도입한 대형 설치를 비롯해, 눈물에 얽힌 양가적인 감정을 담은 회화와 드로잉 등 총 69점을 공개했다.

<길이 보여요> 화선지에 잉크, 수채 23×34.6cm 2025 OCI미술관 제공

이은경의 첫 개인전 <수도꼭지 연대기>는 흔히 눈물이 멈추지 않는 상태를 ‘수도꼭지’에 비유하는 데서 출발했다. 여기서 ‘연대기’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기록이 아닌, 감정을 매개로 서로 공감하고 연결되는 ‘연대 (連帶)’의 감각을 뜻한다. 작가는 매일 일기처럼 그려온 드로잉을 전시를 위해 펼쳐보는 과정에서 ‘울고 있는 인물’이 유독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전시의 핵심 키워드로 삼았다. 그가 그려낸 울음 속에는 단순히 슬픔뿐만 아니라, 슬픔을 억눌러야 하는 상황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 떠난 이들에 대한 애도와 그리움 등 복잡한 감정들이 얽혀있었다. 현대 사회, 특히 한국은 눈물을 감정적이고 여성적인 것으로 치부하며 프로답지 못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작가는 슬픈 일이 있을 때 충분히 슬퍼하는 시간을 가져야 그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누군가 크고 시끄럽게 우는 모습을 통해 역으로 관객이 자신의 슬픔을 확인하고 치유하는 ‘눈물의 공공 사원’을 제안한다. “사람들이 견디고 있는 고통이나 스트레스의 역치가 굉장히 높다고 생각했다. 사회적으로 감정 표현도 억압적이고 경직돼 있어서 그걸 표현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래도 서로를 돌보면서 잘 살자는 말을 하고 싶었다.”

작품 속 인물들이 슬픔을 공공연하게 전시하고 억눌린 감정을 표출하는 데에는 작가가 사회 초년생 시절 겪었던 경험이 배어있다. 미대를 졸업한 후 지인의 제안으로 건강 기능 식품 회사에 디자이너로 입사했던 그는, 마초적이고 위계적인 업무 분위기로 늘 위축감에 사로잡혔다. “은경 씨는 미대생이라 저런 거 좋아해”라는 핀잔을 들으며, 마치 몸의 일부만 잘려 이식당한 듯한 단절감을 느끼기도 했다. 3년 반의 직장 생활을 마치고 대학원에 입학한 뒤부터는 개인적인 울분과 감정을 소화하기 위한 그림에 집중했다. 동양화 전공자로서 눈물이라는 정서와 잘 맞아떨어지는 종이의 유연하고 취약한 물성을 주로 활용하면서도, 표현하려는 분위기에 따라 유화, 아크릴, 연필 등 다양한 매체를 혼합해 극대화된 감정을 담아냈다. 참아왔던 감정을 화폭에 쏟아내니 점차 타인의 고통을 돌아볼 심리적 여지가 생겼다. 슬픔이 단순히 개인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사회 구조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아픔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적인 치유에서 출발한 회화가 타자의 비애를 끌어안는 연대의 장으로 확장하는 순간이었다.

눈물은 스스로를 구원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직관적으로 표현된 슬픔의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 초입에 설치된 <울지 마세요>(2026)는 화면이 접혀있어, 보는 각도에 따라 본래의 우는 얼굴이 미묘하게 찌그러져 억지로 웃는 표정으로 변한다. 눈물과 웃음이 공존하는 삶의 모순을 짚어냈다. 이어지는 <태평양같고 활화산같은>(2026)은 평면회화에 움직임과 소리를 더한 키네틱 설치작업이다. 종이의 탄성과 내구성을 활용해 두 인물이 서서히 서로 마주 보게 되는 이 작품은, “우선 마주 보아야 타인의 감정을 발견하고 위로로 연결될 수 있다”라는 작가의 철학이 담겼다. 텍스트나 상징을 사용하는 대신, 사운드와 움직임이라는 간결한 구조로 타인과의 연대에 이르는 과정을 형상화했다. 그 맞은편 공간에는 12인의 우는 표정을 먹과 잉크로 드로잉한 <우는사람>(2026)이 놓였다. 인물의 개별적인 특징을 최대한 덜어내 감상자가 저마다의 내밀한 감정을 화면에 자연스럽게 투영하도록 유도했다. 혼자 우는 일은 외롭고 부끄러운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함께 울면 슬픔은 더 이상 감춰야 할 약점이 아니라 서로를 단단하게 연결하는 가장 강력한 매개가 된다.

개인전 <수도꼭지 연대기> 전경 2026 OCI미술관 제공

대형 설치작이 슬픔의 형상을 선보였다면, 이어지는 드로잉과 평면작업은 작가의 개인적 경험에서 길어 올린 소소한 에피소드를 관객과 공유한다. 이은경은 부조리한 현실과 억압적인 상황을 무겁게 폭로하기보다 풍자적인 제목과 유머러스한 화면으로 승화시킨다. <못생겼으니까 말 안 놓을래>(2025)나 <나대지 않기>(2025)처럼 솔직하고 담백한 필치로 그려낸 작업에는 피해 의식을 견디지 못해 머리가 기형적으로 부풀어 오르거나, 억울함을 뱉어내려 주둥이가 튀어나온 인물들이 등장한다. 불합리한 상사를 우스꽝스럽게 때리며 권력을 빼앗거나, 너무 울어서 눈이 숫자 ‘3’자로 퉁퉁 부은 인물 등 위트 있는 형상으로 뜻밖의 숨구멍을 찾는 쾌감을 안긴다.

<싸대기 대만 때려도 되냐?> 화선지에 잉크, 수채 26.5×38.2cm 2025 OCI미술관 제공
<다 여자> 화선지에 잉크, 수채 28×34cm 2025 OCI미술관 제공

마지막은 무려 11.4미터에 달하는 대작 <호곡도>(2026). 전시의 긴 서사를 하나로 압축해 마무리한다. 앞선 작품의 인물들을 캐릭터화해 다시 등장시켰다. 작품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 “맘껏 소리 내어 울어도 좋은 곳”을 뜻하는 ‘호곡장(好哭場)’에서 제목을 빌려왔다. 일본의 두루마리 그림인 에마키모노(絵巻物)와 지옥도의 동세, 인물 배분을 차용했다. 밀도 있으면서도 즉흥적인 색채를 구사하기 위해 동양화 재료 대신 유화를 택했다. 불지옥 같은 현실을 지나 전진하며 마침내 친구와 극적으로 재회하는 여정을 그렸다. ‘그래도 죽지 말고 잘 살자’는 작가의 절절한 메시지를 압축했다.

이은경의 작업은 개인의 불화와 상실에서 출발해 타인을 향한 위로와 접속으로 나아가는 치열한 과정이다. 자신만의 울분을 토해내던 화폭은 이제 같은 구조 속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타자’들의 비애를 끌어안는 연대의 장이 되었다. “과거 학생운동을 한 경험이 있는데, 그 이유가 어떤 정치적 입장이나 이념을 지녀서는 아니었다. 그저 눈앞에 누군가가 울고 있기에, 그걸 견딜 수 없어서 활동했다. 그만큼 나에게는 눈앞에 있는 사람의 감정이 어떤 것보다도 강력한 동기와 설득력을 지닌다.” 눈물에는 스스로를 구하고, 타인을 움직일 힘이 있다. 그렇기에 작가는 눈물이 나약함으로 치부되는 시대에 기꺼이 ‘울보들의 성지’를 짓는다.

<호곡도> 종이에 유채 57×1,140cm(부분) 2026 OCI미술관 제공
<호곡도> 종이에 유채 57×1,140cm(부분) 2026 OCI미술관 제공
이은경 / 1993년생 부천 출생. 서울대 동양화과 학사 석사 졸업. OCI미술관
(2026)에서 개인전 개최. <DTC영아티스트프로젝트> (대전 DTC아트센터 2025), <머리 어깨 무릎 발>(우석갤러리 2025), <미종결사건>(우석갤러리 2024),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서울대학교아트돔 2023) 등의 단체전 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