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에서 피어난 동심

토탈미술관, 일본 젊은 화가 아야코 록카쿠 개인전
2026 / 01 / 30

일본의 차세대 화가 아야코 록카쿠(Ayako Rokkaku). 작가는 핑거 페인팅으로 알록달록한 동심의 세계를 화폭에 소환해 왔다. 그가 토탈미술관에서 개인전 (2025. 12. 5~2. 8)를 열었다. 우주 만물이 생성되는 ‘ 카오스’를 모티프로 무질서에서 태동하는 생명의 에너지와 리듬을 시각화했다.

<무제> 80×80cm 골판지에 아크릴릭 2025 토탈미술관 제공
<무제> 80×80cm 골판지에 아크릴릭 2025 토탈미술관 제공

― 2024년 쾨닉 서울에서 열린 <이름 없는 감정의 산>이후 1년 만에 열린 한국 개인전이다. 서울을 다시 찾은 소감이 어떤가? 이번 전시 제목 〈Breathing with the Chaos〉는 혼돈 속에서 ‘호흡한다’는 작가의 예술적 가치관을 반영했다. 전시 주제에는 어떤 고민이 담겨있는가?
Ayako 지난 1년간 전시 미팅차 서울을 종종 방문했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에 체류했던 지난해 11월은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평창동에서 산이 발갛게 변해가는 걸 지켜보며 작업에 몰입했다. 산책하듯 가볍게 산에 오르던 일상이 큰 위안이 됐다. 몇 년간 다양한 나라에서 전시를 하며 다채로운 문화와 자연을 접했고, 회화적 표현은 물론 입체, 영상 등 다루는 장르도 확장해 왔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선택하거나 배제하기보다 서로 다른 요소가 자연스럽게 영향을 주고받는 상태에 흥미를 느꼈다. 예측할 수 없는 무언가가 새로이 태어나는 과정, 그 자체를 ‘카오스’라고 부르고 싶었다. 부정적인 혼란이기보단 생명이 움직이는 조건이랄까.

― 이번 전시에서는 토탈미술관의 AI팀과 협업한 영상이 회화와 나란히 놓였다. 물성을 강조한 회화와 매끈한 디지털 이미지의 공존이 어떻게 다가왔나.
Ayako 전시장 밖으로 펼쳐지는 자연 풍경과 함께 작품, 영상이 뒤섞인 배치가 매우 흥미로웠다. 작품에서 중요한 요소인 색채, 소녀, 리듬 등을 추출해 새로운 형식으로 제시한 시도가 오히려 작업 세계를 선명하게 하고 상상력을 확장해 준다고 느꼈다. 손의 흔적이 영상에 드러나진 않지만, 그 개성은 살아있다고 믿는다.

<무제> 73×137×121cm 브론즈 2022 토탈미술관 제공

촉각의 회복, 회화의 확장

―브론즈 조각으로의 확장도 눈에 띈다. 회화 특유의 추상성과 즉흥성을 3차원에 어떻게 구현하고자 했나? 한편, 최근 회화에서는 형태가 흐려지고 추상적 제스처가 전면에 등장한다. 변화의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Ayako 회화의 형상을 그대로 옮긴 ‘피규어’에 그치지 않도록 경계했다. 점토에 회화적 추상성을 꽉 압축한다는 생각으로 조각을 빚었다. 곡선의 역동적인 흐름과 덩어리감으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브론즈가 지닌 육중한 클래식함에 가벼운 유머를 섞어 밸런스를 잡는 데 꼬박 2년이 걸렸다. 나는 본래 인물을 그릴 때도 대상의 외형보다는 생명체가 지닌 기운과 에너지에 집중해 왔다. 점점 그 에너지의 흐름 자체를 그리고 싶어졌고, 화면에서 보이지 않는 작은 생명의 존재를 느끼게 되었다. 추상은 색과 손의 움직임을 온전히 드러낸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이따금 어떠한 에너지를 강조하고싶은 지점에 구체적인 형상을 그리곤 한다. 은근슬쩍 캐릭터를 넣어 화면을 친근하게 만드는 방식은 아마 일본 특유의 정서일지도 모르겠다.

― 작가의 마스코트이기도 한 소녀의 표정은 어딘가 뾰로통하거나 무심한 표정에 가깝다. 명랑한 색채와 대비되는 건조한 얼굴은 작품에서 어떤 역할을 하나.
Ayako 소녀와 색채가 아이코닉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단순한 자기 복제가 되지 않도록 늘 새로움을 고민한다. 눈과 입은 멀리서도 또렷이 보이도록 강조하지만, 특정한 감정을 명시하지는 않는다. 다양한 감정이 잠재된 상태다. 화려한 색채 역시 보는 이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밝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무제> 섬유 강화 플라스틱에 아크릴릭 2025 토탈미술관 제공

―당신의 작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신체성’이다. 골판지를 재료로 삼아 선보이는 핑거 페인팅과 라이브 페인팅은 디지털 환경에서 희미해진 신체 감각을 다시 환기한다. 밝고 귀여운 이미지 때문에 ‘포스트 슈퍼플랫’ 계보로 언급되기도 하지만, 당신은 회화에서 원초적인 ‘손’의 터치와 질감을 결코 숨기지 않는다.
Ayako 스무 살 무렵 본격적으로 시작한 페인팅은 오직 ‘원초적으로 그리고 싶다’는 충동에서 출발했다. 어린 시절 내성적인 성격 탓에 구석지고 좁은 곳에 숨어 그림책을 보거나 그림을 그리곤 했다. 핑거 페인팅은 바로 그때 새로운 세계를 마주한 순간 느꼈던 불안과 설렘 같은 미묘한 감정을 되살린다. 한편 라이브 페인팅은 타인과 함께 이 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감각을 일깨운다. 처음에는 행인의 옷차림이나 표정을 참고했지만, 점차 그 장소를 감싸는 에너지를 표현하는 데 집중한다. 슈퍼플랫과의 연관성을 염두에 두고 그림을 그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상류 문화와 서브컬처, 제도권 미술과 대중문화의 경계를 허문다는 점에서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고는 생각한다. 내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손으로 그린 흔적,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다. 그려져 있는 게 무엇인지 인식하기도 전에 압도적인 에너지를 안기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아야코 록카쿠 / 1982년 도쿄 출생. 롱뮤지엄 충칭(2025), 쾨닉(베를린 2026, 서울 2024), 도쿄 갤러리타겟(2024) 등에서 개인전 개최. 도쿄와 베를린을 오가며 활동 중.

―작가에게 골판지는 회화의 취약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전면화하는 장치다. 골판지를 주 재료로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Ayako 골판지는 내게 가장 익숙한 매체다. 쉽게 구할 수 있고, 자유롭게 찢어 크기나 형태를 바꿀 수 있다는 해방감이 좋았다. 손끝에 닿는 따뜻한 감촉과 울퉁불퉁한 텍스처도 매력적이다. 이번에 선보인 <무제>는 여러 추상적 형태의 파편을 하나의 유기체처럼 모았다. 단순히 벽에 거는 대신 단차를 두고 쌓아 골판지의 양감과 물성을 강조했다.

―이제 마지막 질문이다. 예술가로서의 목표가 있다면?
Ayako 더 나은 표현을 추구하는 것. 내 작품이 잊고 있던 동심을 선물하고 마음에 빛을 밝혀주는 존재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