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고양이의 ‘팩폭’

한-벨 수교 125주년, 벨기에 대표 만화가 필립 그뤽 개인전
2026 / 03 / 04

벨기에의 ‘국민 캐릭터’ 르깟(Le Cat)을 탄생시킨 거장 필립 그뤽(Philippe Geluck). 1983년 신문 연재 만화로 첫선을 보인 르깟은 회화, 조각, 공공미술로 그 영역을 확장하면서 유럽 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가 보자르갤러리에서 개인전 <Yours Truly, Le Cat>(3. 7~27)을 앞두고 있다. 익살스러운 장면으로 사회 관습을 꼬집어 온 작가의 궤적을 조망한다.

<Mondrian Pas Sec> 캔버스에 아크릴릭 114×162cm 2019 © Philippe Geluck

― 2025년 공간썬더 개인전 <르깟 북촌을 만나다> 이후 약 1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았다. 이번 전시는 드로잉 원화는 물론 회화, 판화까지 아우른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는 르깟의 ‘새로운 얼굴’을 소개해 달라.
PG 지난 1년간 브뤼셀 르깟카툰뮤지엄 건립에 힘을 쏟는 한편, 스물다섯 번째 만화책을 출간했다. 동시에 화가이자 조각가로서의 작업을 병행하는 숨 가쁜 시간이었다. 예술은 나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설레게 하며,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게 한다. 신문 연재로도 충분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것만으로 완전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대형 캔버스 회화를 시작했고 이를 조각으로 구현했다. 이 모든 형식을 연결해 주는 존재가 바로 르깟이다. 관객이 내 작업을 특정 장르로 한정하지 않고 물성과 스케일을 자유롭게 오가는 르깟의 다채로운 매력을 발견해 주길 바란다.

― 1983년 벨기에 일간지 『르수아르(Le Soir)』에서 시작된 르 깟은 이제 벨기에를 넘어 유럽 문화의 아이콘이 됐다. ‘양복을 입은 뚱뚱한 고양이’라는 독특한 페르소나는 어떤 배경에서 탄생했나.
PG 시작은 지극히 개인적이었다. 1980년 결혼 당시, 청첩장에 아내와 나를 고양이로 그려 넣었고,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아기 고양이를 더해 출산을 알렸다. 몇 년 뒤 신문사로부터 새로운 연재를 제안받자, 그 고양이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두 발로 선 채 코트를 입고 넥타이를 맨, 말하는 고양이…. 둥근 안경을 쓴 내 모습에서 출발했지만, 곧 독립적인 성격을 갖추며 사회 전반을 논평하는 존재로 성장했다. 르깟은 어떤 권위에도 얽매이지 않는 수평적인 태도를 지향한다. 약자를 보호하고, 연대의 가치를 추구하며 권력을 비판한다.

<On En A Plein Le Dos> 브론즈 198×202×364cm © Studio FiftyFifty

50톤의 유머

― 르깟은 특유의 포커페이스로 촌철살인을 던진다. 장황한 서사를 덜어내고 3컷 만화의 간결한 구조를 취했다. 제한된 지면에서 철학과 유머를 동시에 다루는 전략처럼 보인다.
PG 바로 그 중립적인 표정 덕분에 독자는 르깟에게 자신의 감정을 투영할 수 있다. 연극학교에서 배운 ‘중립 마스크(Neutral Mask)’ 훈련이 작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무 표정 없는 가면을 쓰고 몸짓만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이 자연스럽게 캐릭터에 스며들었다. 3컷의 구성은 ‘발단–전개–결말’이라는 희극 구조를 따른다. 나는 이 흐름을 좇기도 하지만 의도적으로 깨기도 한다. 두 번째 칸에서 이야기를 끝내고 마지막 칸에 “이 공간은 광고를 위해 비워두었습니다”라고 쓰는 식이다. 관습을 비틀 때 유머는 더 또렷해진다. 아이디어가 어디서 오는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내게 유머는 철학의 한 형식이다. 독서와 대화, 신문과 라디오에서 접한 정보가 축적되었다가 어느 순간 문장이 된다. 저널리스트, 배우, 코미디언, 방송인으로 활동한 이력도 도움이 됐다. 무대에 설 때면 관객의 반응이 늘 가감 없다고 느꼈다. 웃음이 터지면 성공이고, 그렇지 않으면 실패다. 그 긴장감이 르깟의 호흡을 만들었다. 르깟 역시 관객을 바라보며 말하지 않는가. 마치 스탠드업 코미디언처럼 말이다. 나는 예술이 꼭 진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는 “예술작품은 두 종류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 말했다. 중요한 건 기쁨이든 슬픔이든 혼란이든 웃음이든 ‘감정의 발생’이다.

―르깟 조각전 <Le Chat Déambule>은 파리 샹젤리제, 모나코, 브뤼셀 공원 등 유럽 각지의 랜드마크를 순회했다. 육중한 물성과 경쾌한 해학이 충돌할 때 발생하는 아이러니가 흥미롭다.
PG 작가로 오래 살아남으려면 끊임없이 스스로 갱신해야 한다. 나는 연극과 방송처럼 팀 작업에서 시작해 점차 개인 작업으로 옮겨왔다. 오랫동안 나를 지켜본 독자들을 놀라게 하고 싶었다. 광장에 세운 50톤 규모의 브론즈 조각도 마찬가지다. 왕이나 영웅을 기리는 데 사용되어 온 재료로 유머러스한 캐릭터를 조각하는 일은 권위를 전복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한 기자가 “톤 단위의 가벼움”이라고 표현했는데, 그 말이 마음에 든다. 실제로 도시마다 세대와 언어를 불문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앞으로도 르깟에게 새로운 물성과 스케일을 불어넣는 형식 실험을 이어가려 한다.

― 2028년 브뤼셀에 개관할 예정인 르깟카툰뮤지엄이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다. 관객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PG 20년 가까이 매달려 온 필생의 프로젝트다. 이곳은 르깟만을 위한 기념관이 아니다. 다른 풍자 만화가는 물론, 시민 모두에게 열려있는 장소가 될 것이다. 장자크 상페(Jean-Jacques Sempé), 시네(Siné), 피에르 크롤(Pierre Kroll) 같은 선배들에게 헌정하는 전시도 기획하고 있다. 또한 고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고양이가 어떻게 소비되고 변주되어 왔는지 시각 문화의 관점에서 짚어볼 예정이다. 나는 관객이 전시장을 나설 때 조금이나마 행복한 기분을 안고 돌아가길 바란다. 누군가 “꼭 가봐야 할 전시”라고 말해준다면 더없이 기쁠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르깟 앞에서 웃음 짓는 장면…. 그 순간이야말로 예술이 부리는 가장 단순하고도 강력한 마법 아닐까.

필립 그뤽 / 1954년 브뤼셀 출생. 벨기에 INSAS국립영화전문학교 졸업. 파리 마이욜미술관(2025), 갤러리에스타데스 리옹(2025), 공간썬더(2025) 등에서 개인전 개최. 브뤼셀에서 거주 활동. © Studio FiftyFif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