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 호흡하는 보따리

글로벌 아티스트 김수자, ‘선혜원 아트프로젝트 1.0’ 개인전
2025 / 10 / 01

‘보따리 작가’ 김수자. 글로벌 무대를 종횡하는 그가 10년 만에 서울 개인전으로 돌아왔다. 키아프 & 프리즈 미술축제 시즌에 삼청동 선혜원(鮮慧院)에서 <호흡—선혜원>(9. 3~10. 19)전을 공개했다. 선혜원은 1968년 SK그룹 창업주 사저에서 출발해 인재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어 온 기관이다. 올해 4월 기업 연구소이자 컨벤션 공간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SK는 선혜원의 역사를 대중에 알리는 목적으로 ‘선혜원 아트프로젝트’를 출범했고, 김수자 개인전이 그 신호탄을 터뜨렸다. 제주 포도뮤지엄(총괄디렉터 김희영)의 첫 서울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김수자는 1980년대부터 전통적인 천과 바느질이라는 일상 행위를 작업의 방법론으로 도입했다. 이불보를 바늘로 꿰매거나 헌 옷을 보따리로 감싸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여성의 가사 노동을 시각화했다. 이후 회화, 설치, 퍼포먼스, 비디오, 건축 등 다방면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인류 보편의 문제로 관심사를 확장해 갔다.

<호흡—선혜원> 거울 패널 가변크기 2025_선혜원은 한옥 채로 이루어진 복합 문화 공간이다. 건축가 조병수가 설계했다. 김수자는 경흥각 바닥에 거울을 깔아 관객을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총 4개 시리즈의 작품 11점을 선혜원 곳곳에 설치했다. 그중 하이라이트는 선혜원의 한옥 전각 경흥각(京興閣)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전환한 장소특정적 작업 <호흡—선혜원>(2025). 작가의 <호흡> 연작이 전통 한옥에 설치된 최초의 사례다. “초기부터 천, 격자문, 수평·수직 구조 등 한국적인 조형 요소가 내 작업의 바탕을 이뤄왔다. 경흥각의 문을 여는 순간, 이곳에서 반드시 작업을 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여기에 내가 오랫동안 탐구해 온 한국의 구조, 가구의 미학, 한글의 시각적 속성이 고스란히 살아있다고 느꼈다.” 작가는 경흥각의 바닥 전면을 거울로 채워 공간의 모든 요소를 반사하고, 그곳을 걷는 관객조차 작품과 함께 ‘호흡’하는 존재로 수용했다. 이 몰입형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관객은 시공이 뒤엉킨 차원에서 낯선 자신과 조우하게 된다. “<호흡>은 보따리의 건축적 해석이다. 나는 전통 건축물 자체를 하나의 보따리로 이해했다. 이때 거울은 공간을 완성하는 또 하나의 축이다. 관객은 거울 바닥 위를 걸으며 자신과 공간, 역사와 현재를 사유한다. 걷고, 호흡하고, 바라보는 모든 행위가 작품의 일부가 된다.”

개인전 <호흡—선혜원> 전경_전시는 이주의 감각을 환기하는 대표작 <보따리>(2022)를 공개했다.

“걷고, 호흡하고, 바라보는 모든 행위가 작품이다”

경흥각을 벗어나 로비에 들어서면 <연역적 오브제—보따리>(2023) 연작을 만날 수 있다. 독일 마이센도자기와 협업해 만든 이 작품은 조선백자의 상징인 달항아리를 모티프 삼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달항아리가 넓은 입구를 가진다면, 이 작품은 정수리의 바늘구멍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막혀있다. 작가는 달항아리에서도 보따리를 읽어냈다. 보따리와 마찬가지로 달항아리도 무언가를 감싸는 행위의 연장선에 있다고. 보따리 내부에 가득 찬 옷이나 살림살이에는 그 물건을 사용한 사람의 삶이 응축돼 있다. 반면 달항아리는 물리적으로 비어있지만, 작가는 그곳에 인간의 기억, 시간, 몸의 흔적, 공간의 이야기 등이 상징적으로 충만해 있다고 봤다. “내게 보따리와 달항아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물성에 상관없이 모두 존재의 깊이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연결된다. 두 오브제는 내 작업에서 평행적으로 발전해 왔고, 향후 또 다른 모습의 보따리가 탄생할 수도 있다.”

김수자 / 1957년 대구 출생. 파리 부르스드커머스
(2024), 레이던 라켄할시립미술관(2024), 메사추세츠 피바디에섹스박물관(2023)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개인전 개최. 현재 뉴욕, 서울, 파리를 오가며 활동. Photograph by Malthe Ivarsson, courtesy of the Frederiksberg Museums and Studio Kimsooja

<연역적 오브제—보따리> 옆에는 같은 재료로 제작된 평면작품 <땅에 바느질하기: 보이지 않는 바늘, 보이지 않는 실>(2023)이 배치됐다. 작가는 백자토가 마르기 전 바늘로 무수한 구멍을 뚫어 빛의 리듬과 방향을 수놓았다. 밤하늘 별자리를 닮은 도트와 표면의 거친 질감은 바느질이라는 제스처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다. 작가에게 바늘은 2차원의 평면을 관통하는 수단이자, 자아와 타자를 잇는 매개체다. 이어서 지하 1층 삼청원의 어두운 복도에서는 대표작 <보따리>(2022)가 드라마틱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작가는 천으로 싸고 묶는 전통 생활 도구를 개인의 미시사부터 역사의 거대 서사까지 모두 포괄하는 조각적, 개념적 매체로 승격했다. 그에게 보따리는 디아스포라의 상징이자, 삶의 흔적을 노래하는 노마드적 보금자리다. “나는 보따리 작업을 제작할 때 해당 장소의 정치, 사회, 문화적 배경에 주목한다.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에서는 전쟁 난민의 이동과 정체성을 표현했고, 광주에서는 민주화운동의 희생자를 애도하는 마음을 담았다. 최근 암스테르담에서 했던 작업은 750년 된 교회에서 각지의 이민자가 보내온 옷을 보따리에 담아 다문화적 공존의 메시지를 표현했다. 보따리의 색, 크기, 문양, 의미는 공간의 정체성과 나의 기억, 그리고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바늘은 아주 작고 얇지만 어떤 물건이라도 순식간에 뚫는 힘을 지닌다. 하지만 그 관통의 목적은 다른 이를 해치는 게 아니라 깁고 봉합하는 데 있다. 김수자는 스스로 바늘이 되어 공동체의 서사를, 역사의 상처를 한 땀 한 땀 꿰맨다. 그리고 관객을 자신의 우주로 초대한다. 거울 위에 자신이 바늘처럼 서있는 모습을 스스로 발견해 보라고. 과거와 현재, 실재와 가상, 나와 너를 교차하는 내러티브를 각자 기억의 실타래로 직조해 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