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포먼스, 감각의 ‘싱크’
황수현의 퍼포먼스 <싱크 디 싱크>(TINC 2025/2026)과 음이온의 연극 <개기일식 기다리기>(세종S씨어터 2026)는 서로 다른 몸이 하나로 연결되는 감각에 주목한다. <싱크 디 싱크>는 동일한 안무를 펼치는 배우 간의 교감을 선보이고, <개기일식 기다리기>는 가상의 개기일식을 창작자와 관객이 함께 상상하고 기다린다. 필자는 같은 시공간, 예측 불가능한 차이가 결합해 빚어내는 ‘감각의 공동체’를 제안한다.
두 사람이 있다. 황수현의 퍼포먼스 <싱크 디 싱크>는 같은 말을 내뱉고 같은 움직임을 수행한다. 같은 것은 다른 몸을 통과하며 오차가 생긴다. 반복되는 말은 어느새 의미와 분리되어 음절, 소리, 호흡에 가까워진다. 서로에게 닿으려 몸을 기울이고 소리를 포개어보지만 가까워질수록 소리와 움직임은 서로를 교란한다. 여기, 두 개의 시간이 있다. 여러 사람이 있다. 음이온의 연극 <개기일식 기다리기>에서 여러 사람은 공간에 흩어져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곧 도래할 ‘개기일식’을 향해 모두가 느슨하게 기울어있다. 서로 다른 속도와 마음으로, 누군가는 눕거나 걷고, 어디선가는 방송이 진행된다. 여기, 여러 개의 시간이 있다. 지금 여기 함께 있다고 해서 우리가 같은 시간에 존재할까. 그간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하나의 선으로 여겨졌지만, 실제로 경험하는 시간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하나의 현재에도 각기 다른 속도와 기억이 포개지며 각기 다른 예측과 지연이 발생한다. 오민이 수년 동안 이어온 <동시> 프로젝트는 이렇게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서로 다른 시간을 이미지와 장면으로 펼친다. 오민, 카밀 노먼트 2인전 <어긋난 파동, 흔들리는 시간>(5. 22~7. 19 아르코미술관)을 통해 시간이 존재와 관계의 수만큼 복수로 증식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다른 시간들은 어떻게 하나의 사건을 통과하고 하나의 순간을 만드는가.
다른 시간, 다른 감각 그러나 ‘우리’
앞서 두 개의 시간이 존재했던 황수현의 퍼포먼스 <싱크 디 싱크>와 여러 개의 시간이 공존했던 음이온의 연극 <개기일식 기다리기>는 형식은 다르지만 같은 질문을 공유한다. 황수현의 경우 서로 다른 시간의 차이를 몸과 몸 사이로 가까이 당겨온다. 동일한 스코어를 공유하며 움직임을 수행해도 두 몸은 결코 똑같아질 수 없다. 신체의 형태와 무게, 호흡과 긴장, 반응의 속도, 순간의 망설임과 즉흥 등이 끼어들기 때문이다. 몸은 주어진 지시를 그대로 재생하는 중립적인 장치가 아니며, 수행의 순간마다 미세한 변형이 개입한다. 우리는 이 매체를 완벽하게 알거나 통제할 수 없다. 때문에 수행이 거듭될수록 오차는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두 몸이 점차 가까워지며 호흡을 교환하고 소리를 공유하고 몸을 포개는 사이에도 완벽한 싱크는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오차는 실패나 결함의 흔적이 아니다. 두 몸 사이에 벌어진 틈은 각기 다른 시간과 물질성을 가시적으로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 황수현이 말하는 ‘싱크’는 완전히 일치된 상태가 아니라, 서로의 상태를 예민하게 감각하며 자신의 움직임을 수정하는 과정이다. 거듭되는 수정은 두 몸을 이전과 다른 상태로 밀어낸다. 그리고 이 틈으로 관객의 시간이 모인다. 공연이 시작될 무렵 밝았던 하늘은 두 몸의 움직임이 이어지는 동안 서서히 어두워졌다. 옛 교회였던 공연장의 창문이 노랗게, 붉게, 다시 검푸른 빛으로 변했다. 공기는 점점 더 더워졌고, 두 몸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관객들은 조용히 앉아 몸과 몸 사이의 오차에 주의를 기울였다. 공연장의 안과 밖, 공연의 시간과 실제 시간이 서로 싱크를 맞추는 듯했다. 그곳에 앉은 수십 개의 시간이 같은 틈에 잠정적으로 포개졌다.
그러나 우리가 같은 곳에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서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다. 랑시에르가 『해방된 관객』(2008)에서 말하듯, 관객은 주어진 스펙터클을 선택하고 비교하며 스스로 번역하는 능동적 해석자다. 가만히 앉아 두 몸 사이의 오차에 집중하더라도, 누군가는 움직임의 시차를 보고, 누군가는 호흡과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며, 누군가는 서서히 사라지는 빛과 더워지는 공기를 강하게 감지한다. 공통의 주의와 동일한 경험은 다른 말이다. 서로 다른 경험들이 하나의 사건에 얽힐 때 비로소 임시적인 공동의 순간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하나의 사건을 공유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시간을 맞춰야만 할까.
음이온의 연극 <개기일식 기다리기>는 이러한 질문을 다른 방식으로 펼친다. 이 연극에서는 180분 뒤에 일어날 개기일식을 기다린다는 설정 아래 여럿이 함께 시간을 보낸다. 배우와 관객은 같은 공간을 걷고 앉고 눕는다. 출입 또한 자유다.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으며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차이 또한 모호하다. 한쪽에서는 개기일식과 관련한 인터뷰가 이어지며, 원한다면 화면의 자막을 읽거나 스마트폰으로 방송을 들을 수도 있다. 실제 공간과 채팅창에서 교류가 이뤄진다. 이 연극의 모습은 랑시에르가 검토했던 근대 연극의 오래된 욕망, 즉 고정된 관객을 움직이는 신체로 바꾸고, 무대와 객석의 관계를 재편하려는 욕망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움직인다고 해서 곧장 해방된 관객이 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곳에 하나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대의 해체는 시간의 권한이 분산되는 일이기도 하다. 모두가 무대 위에 있으나 누구도 공연 전체를 볼 수 없고 전체의 시간을 점유할 수도 없다. 그러나 관객이 방치되거나 각자의 시간이 완전히 흩어진 것은 아니다. ‘개기일식을 기다린다’는 행위가 모두의 시간을 느슨하게 같은 방향으로 기울인다. 인터뷰와 중계, 작은 사건과 대화는 아직 오지 않은 순간을 거듭 상기시킨다. 여기서 기다림이란, 빈 시간이 아니라 방향을 가지고 설계된 일종의 스코어다. 서로 다른 시간은 병존에 그치지 않고 서로 개입하며 그 경로를 미세하게 바꿔낸다.
즉 황수현이 서로 다른 시간 사이의 오차를 드러내며 관객의 주의를 하나의 틈에 모은다면, 음이온은 서로 다른 시간에 같은 방향을 제시한다. 각각의 시간은 차이를 유지하며 같은 미래를 향해 잠정적으로 기울어진다. 여기서 개기일식은 다른 시간들을 잠시 같은 방향으로 휘게 만드는 불안정한 중력장이 된다. 세 시간의 기다림 끝에 화면이 어두워지고 조명이 켜진다. 사람들은 돗자리를 걷어내고 각자의 길로 흩어진다. 중요한 것은 개기일식이 실제로 도착했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기다리는 동안 무엇이 발생했는지다. 여기엔 지속되는 공동체도 동일한 경험도 없지만, 서로의 시간에 영향을 준 느슨한 흔적이 있다. 함께 있다는 것은 같은 표준시에 도착하는 일이 아닌, 찰나 동안 공동의 순간을 만드는 일이다. 마주치고 때로는 마찰하며 각자의 경로가 바뀔 때, 시간은 마침내 앞으로 나아간다. <개기일식 기다리기>의 빈 무대에 남은 잔열 속에서 <싱크 디 싱크>의 더운 공기가 떠올랐다. 수많은 시간이 조금씩 자리를 움직인 곳에 예상치 못한 다음 장면이 도래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