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젊음, 사랑 그리고 미술
여름 방학의 어느 한가한 오후, 가사 노동을 하던 중 아트인컬처 편집부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혹시 『블루 피리어드』 보셨나요?” “아니요, 이름은 알지만 보진 못했습니다.” 『블루 피리어드』(2017~)는 미술을 소재 삼은 만화다. 크게 보면 도쿄예술대에 들어가기까지 입시를 둘러싼 1부(1~6권)와 이후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2부로 나뉜다. 고교 편의 목표는 ‘대학 합격’. 그렇기에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입시생이 겪는 특유의 불안과 좌절,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 쉽게 이입할 수 있다. 2부보다 1부가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내가 입시 학원 문을 처음 두드린 것은 1998년. 매일 12시간씩 의자에 앉아 석고상만 그린 기억이 전부다. 만화에 묘사되는 요즘의 입시 전형을 보아도 본질은 그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입체를 평면으로 옮기기 위해 동원되는 오랜 수단, 즉 ‘보고 그리기’라는 미술의 가장 원초적인 기본기 말이다.
실제로 원작자인 야마구치 츠바사는 작중 주인공이 목표로 하는 도쿄예술대 출신이다. 그래서인지 만화책에는 작가의 경험이 짙게 녹아있어, 입시를 통과한 신입생들이 새로운 환경에서 맞닥뜨리는 혼란을 충실하게 재현해 낸다. 특히 대학 편에 들어서면 입시미술은 본격적으로 ‘전면 부인’당한다. 첫 수업 시간, 흡사 미야모토 무사시처럼 생긴 한 교수가 서슬 퍼렇게 던지는 대사는 이 작품의 터닝 포인트를 상징한다. “입시용 그림은 작품이 아닙니다.” 곧이어 다른 교수가 다가와 말한다. “이거, 회화로 표현하는 의미가 있나?” 사실 이 대사는 현대 미술교육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핵심적인 질문을 내포한다. 한편 이 작품은 ‘스포츠 근성 만화’의 문법을 따르고 있다. 소년 만화의 왕도를 따르는 이러한 구조는 현실과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실제 미술계는 승패를 겨루는 대결 구도가 아니며, 미션을 받고 그것을 해결해 나가는 퀘스트 방식으로 작동하지도 않는다. 입시미술에서는 ‘대학 합격’이 명확한 결승점일 수 있겠으나, 대학에서 교수에게 인정받거나 학점을 따는 것이 일종의 ‘승리 조건’처럼 묘사되는 것은 만화적 과장이다. 현실과 구분해야 할 또 하나의 지점은 예술에 대한 주인공의 ‘자의적 해석’이다. 주인공이 홀로 고민하며 예술을 정의 내리는 방식은 전개와 캐릭터의 성장을 위한 극적 장치로서는 유효할지 모르나, 그것은 동시대에 예술이 작동하는 원리와는 사뭇 다르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예술작품이란 이런 거야’라고 해석하는 것은, 실제 예술의 지평에 도달하기엔 너무나 먼 길을 돌아가는 비효율적인 방식이 될 수 있다.
작품에서 주인공의 약점은 주로 ‘약한 멘탈’로 표현된다. 그러나 미대생으로서 진짜 문제점은 따로 있다. 바로 ‘전시를 너무 보러 다니지 않는다’는 것. 이는 비단 만화 속 주인공만의 문제가 아닌, 오늘날 한국 미대의 씁쓸한 현실이다. 매 학기마다 학생들에게 동시대미술의 지형을 읽을 수 있는 좋은 전시를 추천해 주지만, 귀찮음을 무릅쓰고 전시장을 찾는 학생은 손에 꼽는다. 그럼에도 이 만화가 흥미로운 지점은 미술계 주변부에 존재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캐릭터를 다채롭게 등장시킨다는 점이다. 미대 졸업 후의 취업 고민, 입시 및 아동 미술학원 강사, 제도권 밖에서 활동하는 비미술 교육 예술그룹, 그리고 대안적인 아웃사이더 아티스트까지. 작가는 전업 작가가 아닌 이들의 인생을 결코 지난하다고 여기거나, 실패로 낙인찍지 않고 입체적으로 묘사해 낸다. 중년이 된 지금 그 현실성에 공감하며, 잊고 있던 지난 기억과 그 시절 함께 치열했던 내 친구들의 얼굴을 차례로 떠올렸다. 미술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것이 주는 해방감에 취해 즐겼던 대학 생활의 낭만, 젊음, 그리고 사랑의 날들 말이다.
마지막으로, 입시 미술학원 강사 오오바가 대학에 합격한 주인공에게 건넨 대사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작품은 포기하면 거기서 완성되어 버려.” 예술의 완성이 어디쯤일는지, 이는 20대를 훌쩍 지난 지금의 나에게도 여전히 답을 모르겠는 질문이 아니던가. 우리는 여전히 저마다 푸른 낭만·젊음·사랑이라는 배를 타고 이 시대를 치열하게 항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록 현실과의 괴리가 조금은 존재할지라도, 폭염이 기세를 부리는 이 한여름, 시원한 에어컨 아래에서 즐기기에는 더없이 좋은 만화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