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터의 사랑법

아트인컬처 평론 프로젝트 ‘피칭’ 제16회 선정자
2025 / 05 / 01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손미의 시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는 이 질문으로 시작한다. 삶의 반복과 끝, 그 자글자글한 틈새로 파고드는 감정의 망설임 속에서 우리는 또 한 번 시작을 감행한다. 삶을 이어가고, 다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말이다. 이 시구에 담긴 질문은 단순한 감정적 회의라기보다는 상실 이후에도 지속되어야 하는 존재와 실천에 대한 고민이다. 시의 물음을 전시의 맥락으로 가져온다면 ‘죽음’은 ‘전시의 끝’이다. 사랑과 사람은 각각 전시라는 상황, 그리고 이를 수행하는 주체 사이를 유동적으로 오가는 위치성을 지닌 존재라 상정할 수 있다. 이때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는 큐레이토리얼 노동이 감당해야 할 존재론적 과제로 전환된다.

큐레이토리얼 노동은 단지 전시를 조직하는 기술적 행위에 머물지 않는다. 이는 타인의 감정과 시간을 자신의 리듬으로 조율하고, 예술가의 세계를 관객과 연결하는 감각적인 중재의 과정이다. 감정의 층위에서 이 노동은 깊고 정교하며, 동시에 자기 소진의 형태가 되기도 한다. 특히 전시가 끝난 후에도 남는 감정과 경험이라는 흔적은 큐레이터 개인의 신체와 기억에 어떤 ‘느낌’으로 남아 또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내가 다시 사람을 사랑해도 되는가?” 이 반복되는 물음은 전시 이후에 지속되는 기묘한 ‘느낌’이라는 것을 탐구하게 하며, 이를 기록해야 할 필요성, 기록 행위가 파생하는 또 다른 수행성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게 한다. 전시가 하나의 사건이라면, 그 앞뒤를 포함하는 사건의 전체 과정은 어떤 방식으로 기억될 수 있으며 또 어떤 느낌으로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자기 이론(autotheory)’으로 접근할 수 있다. 로런 포니에(Lauren Fournier)는 『자기이론: 자기의 삶으로 작업하기』(2025)에서 자기 이론을 자기에서 출현한 이론으로 보고, 주관적으로 신체화된 경험을 기존의 이론 사이에 나란히 둔다. 이는 담론과 프레임, 혹은 사유와 실천의 양태로 이론에 관여하려는 자의식적인 방식이다. 그리고 자기 이론에 등장하는 수행적 글쓰기는 불안정성과 유희의 성찰적 의미를 지닌 채 기억에 접근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잠재성을 지닌 양태로서의 자기 이론은 자신의 신체와 마음의 특수성에 근거해 지식과 통찰력을 생성하도록 한다. 차이점뿐 아니라 유사성을 공유하는 다른 사람들과의 불화 속에서도 번창한다.

이렇게 위계 서열과 체계적 억압을 무너뜨리는 자기 이론 속에서 큐레이토리얼 노동을 함께 쓰고 말하는 시도는 꾸준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 한국의 콜렉티브 푸리가 출간한 아트씬의 노동에 관한 책 『슈톨렌』(2024), 마코와 앱스가 미술계의 다양한 주체에 귀 기울이려 기획한 포럼 <포지셔닝 워크 위크>(2. 23~24 수건과화환), 화이트노이즈에서 마련한 독립큐레이터의 토크 프로그램 <가늘고 긴 기획 큐레이터 시리즈>(2025) 등이 그 사례다. 전시 이후 남겨진 감정, 기록되지 않는 흔적, 그것이 자신에게 작동한 방식을 다시 말하고 질문하는 시도이다. 이는 전시 이후에 지속되어, 전시와 전시의 공백에서 열린다. 감정과 기억의 흔적을 감당하며 구성해 나가는 자기 실천의 연장선이다. 그리고 큐레이토리얼 노동에서 이야기하는 ‘자기 이론’을 쌓아가는 과정이다.

공백의 시간에서 생긴 보이지 않는 연결은 큐레이토리얼 노동자로서 자신의 몸과 감정의 반응을 외면하지 않는다. 자신을 통과한 감정과 노동의 흔적을 자기 이론으로 기록하고 발화하는 일은 단순한 자기 고백이 아니다. 그것은 제도와 실천 사이의 긴장이다. 그리고 혼자만의 인내와 소멸, 혹은 직급의 상승을 통한 극복이 더는 유일한 해답이자 미덕이 될 수 없음을 밝히며 옆자리 동료가 내일도 이곳에 남을 수 있도록 힘을 보태는 실천이다. 따라서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라는 질문은 사랑이라는 순간을 넘어선다. 그것은 예술실천에서 ‘사람’을 경험과 구조의 경계 너머의 것으로 사유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이다.

전시는 과거로 남는다. 그렇지만 그 자리에 남은 모든 것, 가령 철수하다 떨어진 먼지와 닳은 벽, 채 반납되지 않은 감정과 약속들을 아끼고 살피는 일이 바로 큐레이팅이 자기 이론이 되는 지점이다. 여전한 마음으로 전시를 지속하고, 다시 사람을 사랑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