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찰, 미적 공론장
공공미술은 힘을 잃었고 민중미술은 촌스러워졌으며, 한국미는 그저 상품이 되었다는 진단이 흘러나온다. 이러한 진단에는 공공성, 저항성, 한국성이 이미 수명을 다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오늘날 이들이 유효하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가치 자체가 소멸했다기보다 반복된 노출 속에서 현실의 한계를 마주했기 때문이다. 공공미술은 행정 제도로 편입되면서 의미의 축소와 함께 언급이 감소했다. 민중미술은 저항성을 집합적 주체와 결합하며 사회 개입의 가능성을 열었으나, 점차 특정 도상에 고정되며 과거의 양식으로 치부되었다. 단색화 이후의 한국미 담론은 시장과 결합하여 현실의 맥락과 거리를 둔 채 설명되고 있다. 하지만 공공성, 저항성, 한국성은 장르나 양식이 아니라 예술이 공동체 현실에 개입하려 했던 ‘정치적 목표’이자 ‘염원의 언어’다. 이 가치들은 감상자의 삶과 맞닿는 자리에서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
김재현 작가는 서울 은평구 삼보사 지하 작업실에서 2년여의 시간을 보낸 뒤, 그 과정을 공개하는 오픈 스튜디오 <TBD>(2025. 10. 30~11. 2)를 열었다. 이 공간은 제도적 지원 대신 사찰과의 인연과 신뢰라는 우연한 관계에서 확보된 장소이다. 자본과 행정의 논리가 빈틈없이 작동하는 현대 도시에서, 사찰은 누구나 오갈 수 있는 개방성과 비물질적 가치를 품은 대안적 토대다. 작가는 미완의 작업 과정을 가감 없이 선보이며
‘이곳에서의 시간이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다. 이는 일상적 공간에서 주의를 이끄는 새삼스러운 장면을 포착하며 감각을 풍부하게 재생시키는 그의 작업 세계와 맥을 같이한다. 작가의 모습이 투명하게 드러난 오픈 스튜디오에서 공공성은 미완의 상태를 공유하고 타인의 개입을 허용하는 ‘감각의 윤리’로 나타난다. 작업실인 사찰은 좁은 의미의 종교적 공간을 넘어 다양한 사람이 오가는 일상 장소로 확장된다. 오픈 스튜디오는 감상자의 사적 경험과 맞닿아 의미가 생성되는 과정을 함께 탐색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시치 작가의 개인전 <시종일관>(2025. 9. 13~10. 31)은 대한불교조계종 템플 스테이 사업의 일환으로 서울 관악구 약수사에서 열렸다. 동시대미술을 다룬 책과 전시를 만들어온 독립 출판사 히스테리안이 기획했다. 미술계의 전형적인 담론 체계 바깥에서 이루어진 기획은 실내 공간 너머, 엄숙한 보존의 대상으로만 여겨지던 사찰 건물 외벽으로 확장되었다. 작가는 그라피티로 사천왕과 수호신 등 전통 도상의 상징체계를 재해석하며, 동시대적 영성과 감각으로 새로운 질서를 부여했다. 수백 년 된 장소의 시간성 위에 동시대의 문화가 충돌하는 사건은 전통을 현실의 벽면 위로 끌어올려 끊임없는 소환과 갱신의 과정을 드러낸다. 작업은 엄숙한 종교 도상을 현대적 재료와 조형 언어로 변주한 자체로도 인상적이지만, 무엇보다 약수사 외벽에 영구적으로 남아 계속해서 시민을 만나며 의미를 생성한다는 점에서 가치 있다. 종교 도상의 재해석, 사찰의 일상성, 그리고 ‘영구 보존’이라는 시간성에서 시치의 작업은 새로운 한국 미술의 조건을 탐색하고 호출한다.
사찰이라는 공간에서 동시대미술을 만나는 현상은 주목할 만하다. 두 사찰에서 목격된 장면들은 종교 기관, 지역 커뮤니티, 우연한 방문객 등 다양한 주체가 개입하며 제도 밖의 공간에서 예술이 생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사찰은 오랫동안 한국의 문화와 사유, 기술과 이미지가 축적되어 온 삶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근대 이후 주로 ‘보존해야 할 종교 시설’로 그 의미가 축소되었다. 동시대미술과 사찰의 조우는 오늘날 미술이
성립하는 환경과 조건을 환기한다. 사찰을 일상 공간이자 문화적 흐름이 만들어지는 사회적 공간으로 바라볼 때, 그것은 한국의 미술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성되는지 되묻는 현장이 된다. 또한 사찰을 동시대미술의 장으로 바라본다면, 불교미술은 박제된 유산이 아니라 현재의 감각에서 재해석될 수 있는 조건을 획득한다. 이처럼 사찰은 화이트 큐브가 상실했던 장소적 맥락과 삶의 긴장을 예술에 돌려준다. 예술이 성소와 속세가 맞닿는 이 공간을 선택한 것은 결국 고갈된 동시대미술의 담론을 다시 현실의 토양 위에 세우려는 시도로 읽힌다.
이 지점에서 공공성은 제도가 아닌 ‘감각의 윤리’로 돌아오고, 한국성은 이미지가 아닌 ‘소환의 사건’이 되며, 저항성은 거창한 정치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삶의 방향을 다시 선택하게 만드는 ‘감정의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저항성이란 결국 굳어진 제도적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의 자리를 스스로 정의하려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전시장 바깥, 예술이 새로운 감각적 정치성을 획득하며 일상의 틈에서 되살아나는 가능성을 우리는 지금 목격고 있다.
배경 · 시치 개인전 <시종일관> 사진 이인현 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