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루한 파국
병원 수위로 일하며 잔혹 동화를 그린 헨리 다거(Henry Darger), 다양한 층위에 있는 사람들의 그림을 지칭하는 아르브뤼(Art Brut), 정신병동에서 일하며 환자들의 현란한 그림을 수집한 의사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 이들 사례에서 보이듯 광기와 창조성은 서로 긴밀한 관련이 있다. 오늘날 SNS에서 ‘#self-harm’ 같은 해시태그를 달고 자해를 ‘전시’하는 이들은 20세기의 환자들처럼 여전히 그림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아마추어적’ 그림이 이제는 인터넷에서, 해시태그와 패션 코어의 형태로 재현된다는 점이다. ‘#menhera core’, ‘#yami-kawaii aesthetic’ 등의 태그와 함께 온라인에 떠도는 미감은 대개 귀엽고 잔인하면서도 멍한 감각으로 표현되며, 이들은 개인 SNS 계정에 게시되는 것으로 완성된다. 이 같은 흐름이 앞서 언급한 사례처럼 아마추어 미술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정신 질환자의 미술은 이미 하나의 서브컬처적 조건이자 흐름이지 않을까.
대표적인 사례로 한국 여성 작가 리단은 퀴어이자, 중증 정신 질환을 앓는 당사자이다. ‘X(구 트위터)’에서 주로 활동하며 자신의 병과 삶을 이야기해 왔다. 2017년 『조색기』라는 만화에서 솔직하게 털어놓은 ‘정병러 에피소드’가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리단은 의약품의 ‘리튬’의 이명이기도 한데, 리튬은 케이 레드필드 제이미슨(Kay Redfield Jamison)이 저서 『자살의 이해』(2012)에서 조울증과 조현병으로 인한 자살 위험률을 급격히 낮출 수 있는 만능 처방제로 소개한 물질이다. 리튬이 만능 처방제가 된 것은 1949년부터이다. 비용이 저렴하고 약의 효능이 ‘대부분의 사람’에게 좋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50년 이상 지난 지금, 이러한 만병통치약이 존재함에도 여전히 자살률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가 뭘까. 이는 리튬 같은 약물을 포함한 정신 치료 요법에서 더는 해법을 찾을 수 없을 때, 즉 한 주체가 절망감을 소소한 일상의 불행감 정도로 치환할 수 없으며, 그 고통이 격하되지 않는 순간에 자아의 죽음을 소망하기 때문이다.
리단은 2023년 스페이스미라주 개인전 <Being Boring>에서 이런 소멸에 대한 충동이 뚝뚝 묻어나는 작품을 선보였다. 가령 절규와 신음을 동시에 뿜어내는 듯한 신체를 묘사한 <입하>, 몸의 경계가 허물어져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장면을 그린 <신체의 이음매>가 그러하다. 또한 ‘얌전한’ 환자의 범주에 들지 못한 환자들끼리 우글거리는 <정신병도 버린 사람>은 정신병이 개인적인 것인지, 사회 구조적인 것인지 질문한다.
한편 레즈비언 섹스를 암시하는 <레즈 이외엔 속하지 않는 나라에서 왔어>와 <Too Gentle to Play>는 ‘정병인’의 성적 정체성과 광기를 논할 때 퀴어나 트랜스젠더가 이중으로 구속받는 현실을 보여준다. 예컨대 이중 정체성을 지닌 사람은 DSM-5(정신 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에 의한 광범위한 스펙트럼의 규정으로 광기가 정의되며, 성 정체성 자체가 장애로 진단되어 자신의 병리와 퀴어 정체성이 하나로 다뤄진다. 또한 트렌스젠더의 경우 그렇게 정의되어야만 호르몬 요법 같은 의학적 치료를 받을 수 있기도 하다.
어쩌면 정신병과 퀴어 정체성을 동시에 지닌 당사자에게 주체, 자아란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은 죽지 않는 한 끝까지 수행될 수밖에 없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이방인’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말이다. “인간이 자기 언어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이방인인 채로 남아있을 때, 경제적이며 사회적인 결정이 그를 구속해 올 때, 정신 분열증 같은 병리학적 형태를 가능하게 하는 문화에서 살 때 인간은 현실 세계로부터 소외되며, 어떤 객관성도 보장해 줄 수 없는 ‘사적인 세계’로 내몰린다.” 이 사회적 내몰림과 고립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퀴어 당사자인 동시에 정신 질환자인 예술인은 어떻게 돌봄 받아야 하는가. 하지만 우리는 이미 매달 방문하는 정신과 의사나 상담사 앞에서조차 자신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현실에 놓여있다. 되풀이되는 증상, 어긋나는 접촉, 되돌아오는 무기력 등 리단의 작품이 말하는 지루한(Being Boring) 파국의 지점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