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약을 뚫는 제약
최근 문화예술계는 장애인 접근성을 점점 더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 ‘장벽을 없앤다’는 의미의 ‘배리어 프리’부터 ‘(장벽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으나) 그럼에도 존재하는 장벽을 의식하며 노력한다’는 의미의 ‘배리어 컨셔스’까지. 접근성은 ‘정당한 편의’로 다뤄지거나, ‘접근성 매니저’와 같은 형태로 등장하곤 한다. 이는 장애인의 몸이 아닌 주변 환경을 장벽으로 규정하는 장애의 사회적 모델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 흐름에서 접근성을 부차적인 옵션이 아니라 작품에 통합하려는 미술계의 시도 역시 이어질 수 있었다. 접근성이 보완을 넘어 기존의 미적 체험을 대체하고, 그 전제가 되는 몸을 재사유할 수 있도록 하는 실천을 나는 ‘감각 번역’이라고 불러왔다.
2019년 열린 오로민경의 개인전(9. 6~30 팩토리2)은 관람자가 무선 헤드폰을 착용하고 전시장을 거닐면 위치에 따라 가까운 작품을 음성으로 묘사해 주는 서비스를 했다. 개별 작품이 아니라 전시 자체를 청각적으로 번역하는 시도였다. 시각 정보를 청각으로 온전히 전달하는 동시에, 조형이나 이미지를 언어화했을 때 전시 관람 순서를 제약하게 되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지난해 탈영역우정국에서 열린 <스팟라이트, 평평한 무덤들에게>(11. 1~10)전은 감각 번역의 연행(performance)이었다. 참여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대본으로 쓰는 일과 그 대본을 통해 이뤄지는 배우와 관객의 공동 연행이라는 이중의 감각 번역이 발생했다. 이는 작품의 묘사를 넘어 전시의 체험 자체를 재편하는 일이었다. 감각은 설명되기보다 회화, 조형, 영상, 연기라는 이질적인 예술 형식으로 범람했고, 관객은 작품을 만지고, 밟는 등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운 촉각으로 모여들었다.
감각 번역은 접근성 문제를 동등하게 투명한 정보의 전달에서 동등하게 불투명한 미적 체험으로 재구성한다. 사진작가 박현진의 개인전(11. 15~12. 7 팩토리2)은 이 흐름을 감각의 경계 자체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간다. 박현진은 프로젝트를 위해 보편적 접근성을 지향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아인투아인’의 조향사 김준범과 협업했다. 감각 사이의 경계, 소통의 한계는 당연할 수밖에 없는가? 김준범은 향수로 특정한 경험을 전달하려 촉각을 온도, 경도, 움직임으로 세분화했다. 박현진은 이를 시각적으로 연출해 촬영하거나, 김준범의 향료를 필름 숙성 용액에 활용해 현상 과정에서 하나뿐인 이미지를 이끌어 냈다. 코점막에 묻었으면 향이 되었을 향수는 필름의 감광 물질과 만나 우연한 이미지로 변신한다.
소통은 언제나 특정 형식으로 경험을 잘라내는 매체를 통해 이뤄진다. 따라서 소통은 ‘제약’이다. 박현진은 향수에서 기인한 촉각적, 후각적 소통을 사진이라는 매체로 시각적으로 확장하지만, 사진 역시 시각이라는 또 하나의 제약 안에 있다. 그러나 소통이 제약이라면 제약은 또한 소통이기도 하다. 사진에 대한 관객의 묘사가 대체 텍스트로 개입하며 전개되는 ‘경험→향수→후각→사진→시각→문자→촉각→향수→후각→…’이라는 감각적, 물질적 연쇄에서 향수, 사진, 문자는 그때그때의 감각 사이에 경계라는 제약을 불어넣는다. 그러한 제약으로 그어진 경계를 넘나드는 소통, 즉 제약의 소통을 동시에 이루어낸다.
<감각 tran-sense-lation 횡단>전은 바로 제약의 소통, 혹은 제약을 뚫는 제약으로서의 감각 횡단과 그것이 가능한 ‘잠깐’의 세계를 보여준다. 감각 횡단은 소통을 향한 반복적인 시도가 감각 사이의 경계를 허물 뿐만 아니라 새롭게 짓는 일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여기서 제약은 장벽을 없애야 한다는 선언, 혹은 결국 다가갈 수 없는 지점에 대한 인정에서 그치지 않는다. 제약은 실패를 체념의 계기가 아니라 경계를 넘어선 소통을 이끄는 계기로 삼는다. 불가능에 대한 인정은 기존 제약 안에서 감각과 매체를 재배열하면서 틈을 상상할 수 있는 새로운 소통의 시작이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전달되는 건 손에 잡히지 않는 분위기나 닿으려는 노력의 흔적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감각 횡단에서 어떤 세계가 이끌려 나온다는 사실이다. 횡단을 통해 열린, 낯선 소통이 이루어지는 잠깐의 세계. 그리고 그 세계는 다시금 허물어질 것이다. 제약을 뚫는 제약의 반복, 그 반복이 이끌어 낼 또 다른 잠깐의 세계를 통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