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술 80년을 한자리에
“이것은 기획전인가, 아트페어인가?” 서울아티스트페스티벌2025(11. 3~30 롯데엠아트센터, 이하 SAF)를 마주한 컬렉터라면 으레 던질 법한 질문이다. 그리고 SAF는 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미술장터다. 50인의 작가, 대규모 부스, 화려한 미감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디스플레이는 영락없는 아트페어의 활기를 띠지만, 그 이면에 흐르는 묵직한 주제 의식과 큐레이팅은 미술관의 기획전을 방불케 한다. 1세대 단색화가에서 시장과 미술관 곳곳에서 활약하는 중진 화가, 그리고 1980년대 이후 출생한 울트라컨템퍼러리 아티스트까지. 이들의 회화 조각 설치 사진 사운드 미디어아트가 한데 모여 페어의 스펙트럼을 완성했다. ‘서울 동시대의 미술지형도’라는 비평적 화두를 시장의 언어로 풀어낸다.
이번 SAF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궐위(闕位)’다. 기획을 총괄한 비선재갤러리 장낙순 회장은 오늘을 “권력과 권위가 해체된 궐위의 시대, 즉 ‘인터레그넘(Interregnum)’의 시기”로 규정했다. 뉴욕이나 런던, 파리, 베를린 등이 독점하던 서구 중심의 미학적 권위가 흔들리는 틈을 타, 서울(한국)이 글로벌 미술담론의 새로운 중심축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SAF가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이유다. 그렇다면 왜 기획전이 아니라 미술장터여야 했을까. 여기에도 궐위라는 테마가 작용했다. 오늘날 시장과 제도권의 경계는 무의미해졌다. 작품이 지닌 상징성과 내러티브는 담론뿐 아니라 시장적 가치에도 필수 요소다. 평론가의 평가만큼이나 시장의 호응 또한 중요한 비평적 반응으로 여겨진다. SAF의 부스전은 기존 아트페어의 백화점식 나열에서 벗어나 세대, 매체, 사상의 축을 따라 작품을 배열했다. 거래보다 감상을 먼저 열어놨다. 작품의 감동이 ‘소장 욕구’로 자연스럽게 전환되도록 전시-시장 구조를 유기적으로 통합했다.
단색화, 물성 실험, 미시 서사
전시장으로 시선을 옮기면 이러한 콘셉트는 더욱 분명해진다. 페어의 첫 번째 축은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단색화다. 한국 추상회화의 선구 ‘오리진’ 그룹의 창립 멤버인 신기옥과 최명영이 그 포문을 연다. 신기옥의 <Line Rhythm>은 수직과 수평의 필선을 무수히 중첩해 내면과 현실이 만나는 접점을 격자 구조로 시각화한 연작이다. 최명영은 롤러와 송곳, 손가락으로 물감을 쌓고 지우는 행위를 반복해 시간이 축적된 촉각적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를 제작해 왔다. 이번 전시에는 <Conditional Planes> 시리즈로 감상자를 침묵의 사유로 이끈다. 그리고 두 흐름은 곧 포스트 단색화로 이어진다. 김춘수의 <Ultra-Marine>, 장승택의 <Layered Painting>, 신수혁의 <Critical Point> 등 블루칩 포스트 단색화가의 대표 시리즈가 출품됐다.
두 번째 축은 회화의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재료와 기법을 통해 장르의 경계를 확장한 작가군이다. 이들은 전통적인 붓과 물감을 넘어 흙, 쇠, 레진, 디지털 언어까지 끌어들인다. 가장 한국적인 소재인 한지를 현대 조형 언어로 승화한 전광영과 박석원이 대표적이다. 전광영은 고서(古書)의 한지로 감싼 삼각형 조각을 무수히 접합해 감각적인 부조를 제작해 왔다(<Aggregation>). 박석원은 한지를 겹겹이 쌓고 절단하는 <적의(積意)> 시리즈로 자연의 원초성 좇는다. ‘벽돌 화가’ 김강용은 실제 모래를 접착제와 섞어 벽돌을 그려 실재와 허상의 경계를 허물고, 이기성은 캔버스에 쇳가루를 뿌리고 산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영겁의 시간과 순환의 원리를 시각화해 왔다(<kalpa>). 김영헌은 캔버스에 혁필의 아날로그적 붓질과 디지털 글리치(glitch) 같은 기하학적 색면을 충돌시켜 가상과 현실이 혼재된 동시대 환경을 포착한다.
마지막 축은 1980년대 이후 출생한 신세대 작가다. 개인의 서사와 취향, 대중문화 코드가 뒤섞인 혼종성이 울트라컨템퍼러리의 특징. MZ 세대 컬렉터가 주목하는 미미(MeME)는 자존감을 잃은 현대인을 위해 <피그미(Pigme)>라는 돼지 캐릭터를 탄생시켰다. 피그미는 하트 고글을 쓰고 하늘을 날면서 행복의 메시지를 유쾌하게 전한다. 우고 리(Ugo Li)는 개인의 애장품을 캔버스로 옮긴다. 작가는 붓질의 숙련도보다 ‘취향’이 회화의 본질이라 말한다. 춤을 추듯 경쾌한 필치로 일상의 순간을 시적으로 포착했다.
동화 같은 분위기로 어른의 동심을 자극하는 ‘키덜트’ 감성도 돋보인다. 배우미는 ‘글로리아’라는 소녀 캐릭터를 통해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환기하고, 이다래는 느리지만 묵묵히 나아가는 거북이를 의인화해 소소한 행복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정영희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회화로 오마주해 왔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 별에 왔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와 같은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며 현대인의 고독한 마음을 위로한다.
장낙순 회장은 “이번 전시는 단순한 축제가 아니라, 동시대미술의 생성과 관계의 운동이 시각·정신적 공명으로 드러나는 자리”라고 강조했다. 대부분의 아트페어가 테마를 특별전 영역에만 제한하는 가운데, 전체 부스를 하나의 주제로 엮어낸 SAF의 시도는 그만큼 의미 있는 시도로 다가온다. 이것은 기획전인가, 아트페어인가? 불황의 터널에서 그 답은 ‘반반’, 둘 다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