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희망과 싸우고 있다
제27회 전주국제영화제(4. 29~5. 8) 한국경쟁부문 초청작 <잔인한 낙관>. 영화는 개인전을 앞둔 한 청년 작가를 중심으로 화려한 전시 뒤에 숨은 미술계의 ‘진짜’ 현실을 담아낸다. 갤러리스트, 기획자, 미대생 등 아트씬 내부자들의 욕망과 불안을 가감 없이 포착해 영화계는 물론 미술계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영화를 연출한 신목야를 만나 작품의 문제의식과 그만의 영화적 문법을 물었다. / 이가영 기자
𝗔𝗿𝘁 영화는 제목부터 역설적이다. 이 서늘한 화두는 어디서, 어떻게 출발했나.
𝗦𝗵𝗶𝗻 로런 벌랜트의 저서 『잔인한 낙관』(2011)을 읽은 게 계기였다. 그는 더 나은 삶을 위해 붙드는 욕망이 오히려 장애물이 되는 상태를 ‘잔인한 낙관’이라 설명한다. 타인의 인정과 인맥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예술가들 역시 이러한 ‘낙관’을 겪어내지 않나. 이를 보여주기 위해 유망한 젊은 작가의 개인전 준비 과정을 중심축으로 삼았다. 다양한 미술계 인물이 관계 맺으며 운, 허세, 처세에 기대고 흔들리는 표정에 초점을 맞춰, 우리가 붙들고 있던 환상의 실체를 질문한다.
𝗔𝗿𝘁 저널리스트로도 대안공간 스태프로도 일한 이력이 있다, 이러한 경험이 시나리오를 구축할 때 어떤 자양분이 되었나.
𝗦𝗵𝗶𝗻 『허핑턴포스트』와 『바이스미디어』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6년간 뉴스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저널은 시의성 있는 이슈를 빠르게 포착해 전달하는 매체다 보니, 기자는 철저히 ‘매개자’의 위치에 머문다. 그 휘발성에 한계를 느껴 영화를 선택했다. 하지만 작업을 시작하고 나서는 불안정한 수입에 의존하며 계속해서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냈다. 그때 『잔인한 낙관』을 읽으며, 실현되지 않을 희망을 품고 고통을 반복해 겪는 시스템에서 예술가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또 생계를 위해 대안공간 얼터사이드에서 일하며 다양한 직업군을 경험하고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었던 시간도 중요한 출발점이 됐다.
𝗔𝗿𝘁 극 전개 중 맥락과 이질적인 이미지와 텍스트가 불쑥 등장한다. 관객의 몰입을 의도적으로 깨뜨리는 일종의 ‘거리두기’인데.
𝗦𝗵𝗶𝗻 영화 중간에 등장하는 무라카미 다카시의 <My Lonesome Cowboy>(1998)는 미술시장에서 거액에 거래된 작품이다. 전에는 순수미술이란 사회적 기대와 무관하게 개인의 예술관을 펼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업계에 들어와 보니 작가로 살아남기 위해선 미술적 맥락과 시대적 흐름이 맞물려야 하더라. 그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무라카미이고, 이 사례가 극 중 인물들의 욕망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한편 로댕의 <절망>(1892)은 좌대와 지지체 같은 작품의 부가적 요소마저 조형 언어로 끌어안은 조각이라는 점에 착안했다. 이번 영화를 픽션과 다큐멘터리, 그리고 텍스트가 혼합된 구조로 구상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상징으로 배치했다. 영화라는 매체가 단순히 ‘서사 전달’만으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𝗔𝗿𝘁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형식을 결합한 매체 실험도 흥미롭다. 두 형식을 함께 사용한 이유가 있다면?
𝗦𝗵𝗶𝗻 극영화의 틀 안에서 다큐멘터리를 소화하는 방식을 실험해 보고 싶었다. 캐스팅 단계부터 영화의 마지막 대화 장면은 완전히 다큐멘터리적으로 가보자는 합의가 있었다. 특히 퍼포머가 등장하는 마지막 시퀀스 이후의 모든 상황은 철저히 배우들이 주도했다. 그전까지의 장면은 모두 대본이 있었지만, 엔딩 씬은 몇 가지 미션만 주어진 배우들의 즉흥 연기다.
𝗔𝗿𝘁 그렇다면 감독이 생각하는 ‘환상이 걷어지고 난 뒤의 상태’는 무엇인가? 이 영화가 관객에게 어떤 질문으로 남길 바라나?
𝗦𝗵𝗶𝗻 나 역시 환상이 완전히 걷히는 것이 가능할지, 또 그것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남을지는 잘 모르겠다. 늘 질문을 품고 있지만 그 도달점은 여전히 미지수다. 그래서 내게는 영화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일종의 ‘수행’처럼 느껴진다. 다만 나는 지금 우리가 발딛고 살아가는 이 시대에 대한 궁금증이 끊임없이 든다. 그렇기에 관객이 영화를 통해 환상에 매달리며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한번쯤 자문해볼 수 있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