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류의 빛깔, 불화의 미학

소련 아방가르드 영화 56년 만의 국내 개봉
2026 / 04 / 01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의 <석류의 빛깔>(1969)이 정식개봉했다. 18세기 아르메니아 시인 사야트 노바의 일생을 시적으로 풀어낸 실험적 전기 영화다. 최초 공개 당시 소비에트 정부는 난해함과 민족주의적 색채를 문제 삼아 필름을 난도질했다. 필자는 이 영화를 ‘불화의 미학’이자 치열한 정치적 저항으로 읽어낸다.

영화가 첫 장면에서 내거는 문장은 역설에 가깝다.“나는 고난뿐인 삶과 영혼의 소유자다.” 직선적인 고백 뒤로 펼쳐지는 것은 도무지 해독 불가능한 시각 언어다. 하얀 천 위에 놓인 석류 세 알이 붉은 즙을 흘리고, 강철 단검이 얼룩진 그곳에 놓인다. 언어가 가리키는 방향과 이미지가 향하는 궤적의 균열이 영화의 출발점이다. 1968년 당시 소비에트 체제는 영화를 교육과 계몽의 도구로 규정했다. 한 장면은 다음 장면을 낳고 한 쇼트는 다음 의미를 예비해야 하며, 보는 이에게 모든 의도가 투명하게 전달되어야 했다. 파라자노프는 바로 그 ‘투명성’의 규율을 배반한다. 그가 스크린에 소환한 것은 비잔틴 이콘(icon)의 대칭성과 정면성, 페르시아 채색 필사본의 평면적 장식성, 그리고 살아있는 인간을 그림처럼 고정하는 활인화(tableau vivant)였다. 지붕에 젖은 책을 펼쳐 말리는 어린 시인, 카펫을 펼쳐 보이는 여인들의 동작은 뚜렷한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화면은 중세 아르메니아 필사본의 장식 패턴처럼 반복과 병치로 구성될 뿐이다.

기독교 성화에서 성인은 관람자를 똑바로 마주 본다. 투시도법은 작동하지 않으며, 신체는 평면 위에 납작하게 펼쳐진다. 3차원 공간의 재현보다 성스러운 순간과의 대면만이 기다릴 뿐이다. 이 영화 역시 그렇다. 배우들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렌즈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수도원 장면에서는 열네 명의 수도사가 석류를 베어 물고, 포도를 짓이기는 그들의 다리가 화면에 클로즈업된다. 이것은 서사의 진전을 설명하는 재현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의 본성을 드러내는 ‘현현(顯現)’이다. <석류의 빛깔>은 영화이면서 회화이고, 무대 위의 조각상이며, 끝내 성화로 회귀한다. 어느 단일한 매체의 문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 혼종성은 의미의 고정을 단호히 거부한다. 권력은 명료한 것만을 통제할 수 있다. 그러나 읽히기를 거부하는 이미지 앞에서, 권력의 언어는 작동을 멈춘다.

파라자노프의 저항은 제목에서도 되풀이된다. 원래 시인의 이름을 내걸었던 <사야트 노바>는 당국 검열관에 의해 <석류의 빛깔>로 강제 변경됐다. 고유 명사 대신 사물의 이름이 들어앉았지만, 파라자노프는 그 사물의 상징성마저 비튼다. 석류는 아르메니아 전통에서 다산과 생명을, 기독교 도상 체계에서 그리스도의 피와 부활을 의미한다. 영화에서 석류는 칼에 찔리고 짓눌린다. 곧이어 한 청년이 시인의 주검 위로 포도주를 쏟아붓는다. 생명의 기호가 죽음을 지시하는 표식으로 처참히 전락한다. 이러한 전복은 극 중 주연 배우 소피코 치아우레리의 신체를 통해 절정에 달한다. 치아우레리는 사야트 노바부터 그가 사랑한 안나 공주, 수녀, 부활의 천사까지 다역을 한 몸에 겹쳐 수행한다. 욕망하는 자와 욕망의 대상, 남성과 여성, 산 자와 죽은 자가 하나의 육체에 중첩된다. 국가가 개인에게 요구한 것은 분명한 정체성과 선명한 윤곽이었다. 그러나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신체는 곧 체제가 강요한 이분법적 질서를 무력화하는 무기였다.

1969년, 영화는 재편집되었고 제목은 바뀌었으며, 여러 장면이 삭제되었다. 그럼에도 <석류의 빛깔>은 살아남았다. 국가 권력이 필름을 난도질할지언정 영화가 품은 저항의 감각까지 도려낼 수는 없었다. 이해되지도 설명할 수도 없는 이미지의 불화…. 그 불투명함이야말로 권력에 대한 마지막 방어였다. 이것을 명백한 승리라 부르기엔 어렵다. 차라리 비극적 연장, 미완의 저항에 가깝다. 그러나 완결되지 못했기에 해석은 여전히 열려있고, 이미지는 계속해서 호출된다. 길들여지지 않는 것. 그것이 파라자노프가 남긴 가장 선명한 유산이다.

석류의 빛깔, 불화의 미학 • ART IN CUL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