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세기 괴물의 도상학
지난 10월 개봉한 영화 <프랑켄슈타인>은 메리 셸리가 지은 동명의 고전 SF소설을 각색했다. 19세기 고딕 양식을 완벽하게 구현한 영화미술로 큰 화제를 모았다. 필자는 영화의 미학을 도상학적으로 읽어낸다.
영화는 1857년 북극의 거대한 빙괴 위에서 시작한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얼음의 바다>(1823년경)를 떠올리게 하는 풍경 위로 인간을 압도하는 낭만주의적 정서가 짙게 깔린다. 끝을 알 수 없는 고립 속에서, 덴마크 함선의 선장은 의문의 생명체로부터 한 남성을 구조한다. 빅터 프랑켄슈타인, 괴물의 이름으로 알려졌으나 실은 그 창조자다. 영화 속 인물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창조를 수행한다. 빅터는 조각난 시신을 스케치하며 죽음을 해부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을 드러낸다. 엘리자베스는 곤충을 관찰하고 수채화로 옮기며, 세밀화가에 가까운 눈으로 생명을 이해한다. 두 사람이 지닌 시선의 차이는 피조물을 대하는 방식에서 선명히 드러난다. 빅터의 후원자 하를란더는 사진 스튜디오에서 젊은 여성과 과일, 해골을 한 프레임에 담는 취미를 가졌다. 이는 17세기 바니타스 정물화를 연상하게 한다. 하를란더는 빅터를 통해 매독이 퍼진 육체를 건강한 몸으로 대체하려는 인물이다. 다만 자신의 피사체가 ‘죽음을 기억하라’던 오래된 도상이라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다. 죽음을 포착하면서도 끝내 그 죽음을 응시하길 거부한다.
세 인물의 시선은 금기의 실험이 이어지는 고딕식 급수탑에서 충돌한다. 빅터의 실험이 이뤄지는 탑의 입구에는 “물은 생명이다”라는 문장과 메두사의 두상이 새겨져 있다. 시신을 접붙이는 실험실 내부에도 메두사의 부조가 공간을 압도한다. 고대 로마 이래 메두사 도상은 도시의 물과 관련된 시설을 수호하는 장식으로 쓰였다. 물에 대한 숭배와 두려움은 생명과 죽음을 향한 인간의 태도를 보여준다. 메두사는 생의 질서에 도전하는 빅터에게 조용한 경고를 보낸다. 이 경고의 형상은 빅터와 그의 피조물을 비추는 더 큰 신화적 의미로 확장된다. 메두사는 피조물과 빅터를 비추는 신화적 초상이다. 창조자와 피조물이 마주치는 공간에는 반드시 메두사가 있다. 두 인물이 재회하는 저택에서도 메두사는 바로크풍 회화로 호출된다. 메두사는 신들의 권력 다툼으로 괴물이 되었고, 빅터의 야욕은 무한한 재생 능력을 지닌 피조물을 낳았다. 두 존재의 운명은 북극에 좌초된 호리손트호의 풍경과도 맞닿는다. 극점을 지배하려는 19세기 유럽의 북극 탐사 경쟁, 죽음을 정복하려는 인간의 오만, 그 끝에는 언제나 외면당한 생명이 있었다.
영화는 인간과 괴물을 가르는 기준을 묻는다. 이 질문에 가장 가까운 답을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엘리자베스다. 고통을 응시할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 생명을 지킬 것인가 파괴할 것인가. “선택은 영혼의 자리”라던 그의 대사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윤리다. 피조물은 창조자에게 버려진 뒤 감정과 언어를 스스로 선택하며 인간성에 다가갔다. 그 바탕에는 연민과 이해, 용서를 가능케 하는 감정이 있다. 감독은 오래되었으나 사라지지 않은 낭만주의적 감수성을 2025년에 재호출한다. 이는 지난 미학의 복원이 아닌, 타인의 고통을 끝까지 응시하고 책임지려는 감정의 윤리를 되찾는 시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