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 미술, 돌의 매혹
최근 글로벌 미술계의 화두는 ‘인류세(Anthropocene)’이다. 국내에서도 관련 전시와 작품이 꾸준히 발표되고 있다.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는 기후 위기 시대의 미술을 주제로 <다시, 지구>(2025. 8. 28~2. 22)전을 열었고, <올해의 작가상 2025>(2025. 8. 29~2. 1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는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구해 온 언메이크랩이 후보에 올랐다. 국제적인 미디어아티스트 김아영은 뉴욕현대미술관 PS1에서 대규모 개인전(2025. 11. 6~3. 16)을 오픈했다. 필자는 이들의 작업을 관통하는 소재로 ‘돌’을 제시한다. 돌을 자연과 문명, 몸과 우주를 가로지르는 물질로 읽어낸다.
돌들이 말하고 춤추고 빛난다. 오염되고 파괴되는 행성에서,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가 살아가는 땅에서, 우리는 돌을 주워 액자에 걸고 아름다운 영상에 담아낸다. 우리는 돌로 행성의 위기를 다루며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일까, 아니면 현실을 직면하고 다시 지을 힘을 마련하는 것일까?
<다시, 지구>전의 장한나의 작품은 자연과 문명의 경계를 주제화한다. ‘진짜 돌’을 맞혀보라는 영상 <같거나 다른>(2025) 옆으로 현무암 사이에서 채집된 ‘뉴 락’들이 있다. 여기엔 식물이나 곤충을 채집해 기록하듯 손으로 스케치한 메모와 그 특성이 기록되어 있다. ‘인류세’와 ‘환경 오염’이라는 키워드로 엮을 수 있는 작품들은 독특하게도 새로운 대륙에서 새로운 종을 발견한 탐험가의 흥분까지도 담고 있는 듯했다. 뉴 락은 버려진 플라스틱이 제주 바다까지 흘러갔다가 해변의 현무암 사이로 녹아 새로운 형태로 자라난 것이다. 작가는 뉴 락의 형태를 상세히 관찰해 기록함으로써 현무암 사이에 안겨 함께 암석이 되어가는, ‘자연적인’ 과정을 보여준다. 여기서 돌은 은유가 아닌 실재다. 뉴 락은 단지 ‘돌과 같은’ 무엇이 되어가는 플라스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이 자연과 맺는 관계 안에서 ‘정말 돌’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현무암. 김아영 작가의 <다공성 계곡: 트릭스터 플롯>(2019)의 ‘다공성 계곡’은 내게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을 상기했다.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상설전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에서 볼 수 있다. 작품은 예멘 난민이 제주도에 들어올 때 생긴 사회적 논쟁과 난민의 존재론을 다룬다. 이 픽션의 주인공인 ‘페트라 제네트릭스’는 금빛 정육면체 여러 개가 뭉쳐서 공중에 떠다니는 미등록 이주자다. 그는 제주도를 닮은 섬 ‘크립토 밸리’에서 위협적인 존재로 규정되어, ‘스마트 그리드’라는 수용소에 격리된다. 하지만 결국 그곳을 빠져나가 섬 전체를 네트워킹하는 ‘어머니 바위’의 데이터와 결합한다. 위협적인 외부의 존재는 섬 전체를 지탱하는 가장 깊은 바위의 일부가 된다. 초현실적인 컴퓨터 그래픽은 돌이 살아서 움직이며 말하는 장면이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게 한다. 여기서 돌은 은유이면서 실재다. 미등록 이주자와 근원적 생명력을 은유하지만, 실제 섬을 이루는 암석이기도 하다.
플라스틱부터 바위, 외계 광물까지
김아영의 작품에서 돌은 페트라 제네트릭스의 고향과 그의 이주 과정 내내 우주의 이미지로써 등장하고, 장한나의 작품에서 돌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플라스틱도 역시 돌이 되었다. 우주이자 피부로서의 돌은 <다시, 지구>전에서 볼 수 있는 최찬숙의 <큐빗 투 아담>(2021)에서 두드러진다. 이 작품은 칠레의 구리 광산과 국제 전파 망원경 기지 등을 배경으로 자원 약탈과 죽음의 문제를 다룬다. 아주 높이 띄운 드론으로 넓고 붉은 땅을 찍어서 땅은 피부처럼, 개발의 흔적이 주름처럼 느껴지게 했다. 그곳의 광산에서 발견된, 구리가 스며든 피부가 푸른빛을 뿜어내는 ‘코퍼 맨’에게 돌과 피부 사이의 경계는 없다. 작가가 코퍼 맨의 3D 스캔 영상으로 보여주었던, 새까만 배경에 불규칙적인 구릿빛 점과 선이 가득한 단면은 마치 우주 같다. 우주와 피부는 돌의 단면으로 반짝인다. 마치 태초부터 돌은, 돌이 가득 담긴 땅은,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몸은, 그러니까 지구의 피부도 사람의 피부도 우주에 속할 뿐이라는 듯이. 돌의 단면은 아름다운 우주의 이미지로 소유와 박탈의 각축장인 비참한 현실에 대한 비판을 미적으로 설득했다.
<올해의 작가상 2025>전에 참여한 언메이크랩의 <시시포스의 변수>(2021/2024)는 시시포스 신화를 모티프로 삼은 AI 시뮬레이션 작업이다. 작품에서 산과 돌이 사라져 아무것도 없는 평야에 남은 AI 시시포스들은 스스로 모래를 쌓아 산을 만들고 흙을 뭉쳐 돌을 만든다. 이들은 “그 돌은 늘 꼭대기에 있어야 한다”라는 부조리한 프롬프트를 진정으로 받아들여, 결국 돌을 자신의 머리에 올린다. 돌은 머리를 집어삼켜 머리를 대신했고, 정녕 스스로 꼭대기에 있는 돌이 된 시시포스는 영영 기쁨의 춤을 춘다. 시시포스는 자기 소유의 돌을 굴려 올리지 않아도 되는 평야를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자기 앞의 날 것의 세계를 보는 대신, 돌에 자신을 가두고 춤을 췄다. 너무 매끄러워서 부자연스러운 영상 그래픽의 시대에, 작가는 의도적으로 저해상도 그래픽을 사용했다. 자기 소유의 가면에 정주하는 데서 오는 쾌락과 그에 유폐된 현실을 생생히 부각했다. 집이 될 수 없는 소유물로서의 돌. 관객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돌은 플라스틱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새로운 돌이 되고, 위협적인 외계 광물이 데이터 사이로 들어와 섬의 일부가 되게 해줬다. 동시에 돌은 세계를 감추어 자신만의 쾌락을 즐길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도피처조차 잠시 머물 수 있는 하나의 집이기에, 돌은 집이다. 우리는 극단적인 와이드 샷이나 클로즈업, 초현실적 컴퓨터 그래픽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으로 도피할 수 있다. 모두는 어떠한 돌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고, 예술은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의 집을 만든다. 어떤 순간에, 피부는 돌이 되고 집이 되어 우주를 향해 고개를 든다. 그리고 우리가 딛고 사는 이 거대한 돌을 굴리는 대신, 비로소 돌볼지도 모른다.
영화철학자 이지영은 『들뢰즈의 영화철학』(2025)에서 예술작품의 특정한 형식이 “참혹함을 매혹적인 것으로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고 썼다(112쪽). 하지만 예술이 참혹을 매혹으로 만든다면, 예술의 매혹은 또한 참혹을 전달한다. 아름다움은 참혹을 직면할 힘을 기르는 집이 된다. 무너진, 혹은 무너지는 세계를 다시 지을 힘. 혹은 그걸 위해 마땅히 부숴야 하는 것들을 우리의 몸에 새김으로써 말이다. 작품 앞에서 당혹감에 벌어지는 입, 크게 떠지는 눈, 찡그려지는 이마, 깊은 한숨, 수축하는 귀, 결국 돌리는 고개…. 이 모든 것에 말이다. 돌이 집이 되듯 세계는 몸이 된다. 돌들은 상기했다. 세계는 파괴하고 싶을 만큼 추하지만, 다시 구축하고 싶을 만큼 아름답다고. 세계가 되어 버려서 세계의 비참을 참을 수 없게 된 몸은 아름다움을 되짓고자(unmake) 꿈틀댄다.
미술관에서 무너진 세계를 본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매혹과 참혹 사이에서 세계를 다시, 짓기. 내 머리 위에 올려두고 소유할 수 없는, 우주이기도 피부이기도 집이기도 한 돌들을 만지작거리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