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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레지던시,무엇이문제인가?

인천아트플랫폼레지던시정상화방안,기관과작가의소통이관건

2024/02/26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가 존폐 위기를 맞았다. 2023년 11월, 15년간 자리를 지켜온 레지던시를 갑작스레 중단한다는 소식에 그 배경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2024년 총선을 의식한 정치권의 일방적 결정이라는 비판이 우세했던 반면, 일각에서는 레지던시의 성과를 명확히 입증하지 못한 미술계의 책임을 묻기도 했다. 필자는 이번 논란이 ‘미술행정 전반의 맹점’이 여실히 드러난 사례이며, 창작과 행정의 괴리를 좁힐 적극적 개선책 마련과 미술계의 자성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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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처너아트플랫폼활성화방안토론회'홍보포스터

작년 한 해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두고 벌어진 일련의 사건은 예술제도를 둘러싼 행정과 창작 주체 간의 괴리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예술지원의 목적을 두고 행정 주체와 창작 주체의 관점의 차이가 갈등을 빚은 것. 한편 레지던시 제도를 두고 불거진 여러 논란의 핵심을 짚으려면 예술제도, 예술과 사회, 정치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레지던시는 사회적 차원의 예술지원 제도이며, 창작 지원의 맥락에는 당대의 구성원이 예술을 어떻게 인식하는지가 개입한다. 시대에 따라 예술을 단순히 창작자 개인의 성취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고, 집단 구성원이 그들의 삶과 정체성 같이 고차원적인 의식 형성에 예술을 포함할 수도 있다. 즉, 집단의 구조를 관념론적 ‘토대’로 삼을 때 상대적으로 물증적인 ‘상부 구조’를 이루는 모든 것, 예술 또한 명백히 정치적일 수 있다.

예술과 행정, 위기의 동상이몽

예술과 정치의 관계는 지원을 제공하고 향유하는 주체의 의지에 따라 달라진다. 이때 예술은 정치의 대상 또는 수단이 되는데, 어느 경우라도 예술은 유물적 지위로 전락한다. 예술이 물신화되며 ‘예술적 성취’에 대한 정의도 상이해졌고, 제도는 창작자의 장기적 성장, 시장 진출, 입주자 선발 과정의 공정성 등 여러 요소를 고려하며 변화해 왔다. 어떠한 시공에서든, 예술은 제도 내에서 성립하기 위해 ‘질적 성장’과 ‘수량적 성과’ 두 척도의 교차점에서 나름의 균형을 유지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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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아트플랫폼외부전경

현실의 장으로 돌아와, 레지던시의 존폐가 야기한 예술(가)의 처우에 관련해 문제가 된 것은 ‘양측의 태도’였다. 기관은 문화예술 지원 사업을 수행하는 주체가 자신이라는 이유에서, 예술가는 자신이 문화예술 지원 사업의 사명과 직결되는 활동 주체라는 이유에서, 양보 없이 각자의 주장만을 고수했다. 상호 협의의 출발점은 현장과 행정 양측에 모두 해당하는 ‘경제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예술노동의 성취를 실효성 있게 평가할 방안이 필요하다.

여기서 ‘예술인 복지’와 ‘예술인 양성’의 방향성을 구분해야 한다. 레지던시를 비롯한 지금까지의 예술인 지원 정책은 대부분 전자의 방식을 채택해 낮은 평균 소득을 지원 근거로 삼았다. 한편 이 결정은 예술인이 소위 ‘기금’을 비롯한 관 주도 사업의 혜택에 의지하며 경제적 자립성을 갖추는 데 소홀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게다가 공공복지는 보편성이 우선되어야 하는 제도 특성상, 개인의 역량과 성취가 제도 전체의 성과에 크게 반영되지는 못한다.

심지어 지역 문화재단 주도 사업의 경우, 예산이 지역민의 세수로 조성되기 때문에 지원의 결과물이 지역 발전과 주민 복지 증진에 얼마만큼 기여했는지가 중요한 지표가 된다. 여기서 레지던시 제도의 모순점이 드러난다. 예술창작 지원은 근본적으로 창작 주체 ‘개인’을 지원하는 반면, 사회 제도는 ‘제도 자체의 고유한 논리가 성립’해야 하고, ‘사회의 다른 영역과 융화해야 한다’는 과제가 있다. 레지던시는 이런 괴리가 가장 극대화되는 제도다. 애초에 개인에게 창작 공간을 지원하는 게 가장 큰 기능인데, 운영의 이면에는 도시 재생, 지역 사회 진흥 문제 등 지난한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깐의 외풍에도 가장 쉽게 흔들린다. 인천아트플랫폼의 사례는 예술행정 전체의 모순점이 드러난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예술과 사회, 둘의 가교인 행정적 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는 한, 다른 예술제도의 뿌리 역시 언제라도 흔들릴 수 있다.

수혜자도 적극적으로 행정에 참여해야

작금의 파국은 예술제도의 존립 근거가 당연히 주어진 것이 아닌, 항시 증명하고 갱신되었어야 함을 증명한다. 제도란 그 집행 주체의 의지와 권한에 따라 언제고 변하거나 사라질 수 있다. 우리 예술인들이 이러한 역사적 진리를 간과해 온 것도 사실이다. 지원 제도는 호혜성 사업이 아니기에, 수혜자에게는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책임과 의무 부여가 불가피하다. 그러므로 당사자는 창작자로서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제도의 운영과 변화에 한층 민감하게 반응해야 마땅하다. 만약 관료제의 특성에서 비롯된 제약을 ‘예술적 고상함’으로 무마할 수 있을 줄 알았다면, 미술사의 기술 목적이 오로지 예술의 현실 초월성을 위해 존재한다고 여겼다면, 그건 너무나도 순진한 발상이었음을 깨우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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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에서진행된'레지던시×예술제도×미술사'행사전경.

국내 레지던시의 역사가 근 이십여 년이 되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지던시의 제도적 타당성을 모색하려 한 시도는 행정 측에서 몇 번 주도한 정도에 그치고, 그마저도 추상적으로 ‘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 외에는 내실 있는 논의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더욱이 수혜 당사 측에서 어떠한 적극적 개혁의 논의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 안타깝다. 레지던시의 존폐와 예술의 존속 조건을 검증하려 한 시도는 알다시피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본격적인 제도 집행 이전, 예술(인)이 직접 창작의 결과물을 성과화하는 과정에 개입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강력히 권한을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기관도 행정의 목적이 예술의 그것과 같이 할 수 없더라도 관료 조직의 상황에 대응하려는 노력을 상시 수반해야 한다. 더불어 진정으로 당대가 요청하는 예술의 역할은 무엇이며, 그에 적합한 창작 환경을 모색하려는 책무를 충실히 수행할 때, 비로소 예술에 대한 인식의 개선을 작게나마 기대할 수 있을 터이다.

이렇듯 다단하게 얽힌 예술행정과 현장 사이의 간극 해소를 위해, 단편적으로는 상호 협의를 통해 예술의 성취를 제도적 성과로 환산할 수 있는 척도를 도출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문화예술 행정 분야의 전문 인력 그리고 예술사회학 분야의 연구 자원을 교육 단계부터 충분하게 보충하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행정과 교육 차원에서 개선하려는 예술인의 노력을 전제한다면, 다음 단계에는 예술인의 기본 권리와 역할 규명, 전문성 보장을 촉구할 수 있다. 공적 재원에 자신을 얽매야 하는 것은 예술계의 숙명이다. 그러나 냉정하게도 정서적 애도로 현실의 불합리함을 타파할 순 없다. 자명하게도 제도는 그것이 출범할 때를 제외하고는 더는 그 주체를 우선하지 않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제도의 자율성은 이렇게 계속되어 왔다. 제도의 목적은 항상 제도였고, 제도이며, 제도일 거다. 이 필연적 관계를 주지하고, 제도의 적극적 수행 주체로서 그 내용을 적절히 가꾸고 닦아가는 것도, 제도와 관계 맺는 모든 예술인의 의무이자 책임임을 상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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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입간판

[만료]오운(2024.03.04~03.18)
[만료]화랑미술제(2024.03.04~4.18)
[만료]BAMA(2024.03.04~4.18)
세화미술관(2024.01.31~)
스팟커뮤니케이션(2024.01.24~)
아트프라이스(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