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세탁기’가 아니다

퐁피두센터 한화, 서울 · 파리 보이콧 운동
2026 / 08 / 31

지난 6월 4일 개관한 퐁피두센터 한화를 둘러싸고 국내외 문화예술계에서 보이콧 운동이 지속되고 있다. 한화 그룹과 이스라엘군에 무기를 공급하는 엘빗시스템즈의 협력 관계가 문제가 됐다. 예술후원이 기업 이미지를 교묘하게 세탁하는 ‘아트워싱’을 비판했다. 필자는 이번 시위를 화두로 기업 예술후원의 역사과 한국 메세나 제도의 구조적 문제, 예술의 공공성의 조건을 짚었다.

지난 6월, 퐁피두센터 한화 개관을 앞두고 100여 명이 넘는 프랑스 예술인과 학자들이 양측의 협력을 비판하는 공동 성명문을 발표했다. 프랑스의 일간지 『리베라시옹』에서도 동시 발표된 이 성명문은 2023년 퐁피두센터 서울 분관 계획이 발표된 직후부터 이어져 온 보이콧 운동의 일환이다. 이들은 한화와 이스라엘 방산 기업의 협력이 전쟁 학살에 일조한다고 규탄하며, 나아가 공공 미술관이 다국적 기업과 결탁해 문화를 상품화하는 행태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한편 한국에서도 이러한 메시지에 응답해 6월 4일 개관식에 맞추어 시위가 일어났으며 연대자들은 건물 입구에 집결해 “팔레스타인에 해방을”, “이스라엘과의 무기 협력을 해제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러한 분투는 비록 프랑스와 한국이라는 서로 다른 맥락에서 이루어졌지만, 기업 예술후원이 초래하는 부정적 영향력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같다. 이는 개별 기업의 도덕성 논란을 넘어, 예술의 공공성과 자본의 영향력이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를 묻는 사건이기도 하다.

기업 예술후원의 기원은 19세기 후반 미국 도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석유, 철도와 철강 등으로 부를 축적한 신흥 재벌들은 ‘강도 귀족(Robber baron)’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쇄신하고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잉여 자본을 문화와 학술에 쏟았다. 록펠러, 모건, 구겐하임 등 거대 자산가들이 예술품을 수집하고 MoMA, 메트로폴리탄 등 주요 미술관 건립을 주도한 것이 대표적이다. 반면 유럽은 국가 주도의 강력한 공공 문화 지원 시스템을 고수해 왔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대처를 필두로 한 신자유주의 기조가 들이닥치며 상황이 반전된다. 예술이 상품으로 재정의되고 정부 예산이 대폭 삭감되자, 생존 위기에 몰린 국공립 미술관들은 결국 거대 기업과 민간 자본의 후원에 의존하는 구조로 이전하게 된 것이다. 이와 달리 한국은 1970년대 이후 국가 주도로 예술을 지원했으나, 문예진흥기금 고갈로 인해 재정적 한계에 부딪혔다. 이 공백을 보완한 것이 기업의 사회 공헌(CSR)이다. 1990년대 경제 성장과 함께 선진국형 문화 투자의 필요성이 커졌고, 한국메세나협회 창설을 기점으로 기업의 예술후원은 문화예술 생태계를 지탱하는 필수 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공공 재원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기업 후원은 사실상 필수 재원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만큼 그 공공적 책임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일은 구조적 난제로 남게 되었다.

메세나는 흔히 공공 지원이 미치지 못한 영역의 예술활동을 돕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확장하는 제도로 평가된다. 그러나 민간 자본의 예술후원을 순수한 공익으로만 보는 시선은 복잡하게 얽힌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위험이 있다. 한스 하케가 지적했듯 기업의 후원은 재정적 지원인 동시에 사회적 명성과 도덕적 정당성을 획득하는 ‘교환’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기업은 예술을 후원하며 공공에 기여하는 이미지를 얻고, 그 과정에서 자사의 이해관계와 브랜드 가치를 관리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후원이 예술생태계의 다양성과 발전으로 곧장 이어진다고 보기 어렵다는 데 있다. 일회성 행사나 토크니즘, 혹은 보여 주기 식 지원은 가능하지만, 구조적 불평등을 바꾸는 데까지 나아가는 경우는 드물다. BP(브리티시 페트롤리엄)가 테이트미술관 후원을 통해 친환경적이고 문화적인 이미지를 구축하려 했던 사례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메세나는 선의만으로 설명될 수 없으며, 그 사회적 의미는 후원의 규모보다 의도와 방식, 그리고 공공성과 얼마나 맞닿아 있는가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

사진작가 황예지가 촬영한 6·4 공동 연대 프로젝트 ‘철회하라, 한화’ 시위 전경.

퐁피두 사태를 지켜보면서 이런 질문들을 떠올렸다.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공공성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누구인가?” 보이콧 시위는 생명의 존엄성과 예술의 독립성을 공동의 가치로 내세웠다. 여기서 공공성이란 단순히 운영 재원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이 권력과 자본에서 얼마나 자율적으로 비판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는 모든 문화·사회적 맥락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보편적 개념이라기보다, 각 사회의 환경과 역사적 조건에 따라 다르게 형성된다.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예술이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얼마나 자율적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만큼은 공통적이다. 결국 문제는 기업 후원 자체라기보다 그것이 어떤 이해관계를 은폐하고 어떤 공공성을 약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느냐에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퐁피두센터에는 석유 기업 엑손모빌의 이미지 세탁을 비판하기 위해 하케가 1985년 제작한 <MetroMobiltan>이 소장되어 있다. 예술은 권력을 장식하는 벽면이 아니라, 그 권력의 이름을 다시 읽게 만드는 표면일 수 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공공성이란 어쩌면 바로 그 불편한 읽기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