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진실’의 카르텔
모든 공동체는 함께 무언가를 믿기로 한 약속이자, 동시에 무언가를 보지 않기로 한 담합에서 시작된다. 박혜수 개인전 <사람들은 진실에 관심이 없다>(8. 7~10. 18 금호미술관)는 이 오래된 공모를 겨눈다. 우리는 무엇을 믿기 위해 무엇을 보지 않기로 했는가. 그리고 그렇게 지켜낸 ‘우리’는 과연 ‘진실’을 내어줄 만큼 값진 것인가. 박혜수는 조각과 설치를 넘나들며 다학제적이고 참여적인 작업을 전개해 왔다. 그의 방법론은 독특하다. 시간, 꿈, 사랑처럼 누구나 겪는 내밀한 감정과 경험을 설문과 수집, 분석이라는 사회 조사의 절차로 정량화한 다음, 그 데이터를 조형 언어로 번역한다. 정신과 전문의, 통계 분석가, 시스템 개발자 같은 각 분야 전문가와 협업한 결과물에 예술가로서의 해석을 더해 작품을 완성한다. 이번 개인전에선 2010년 제10회 금호영아티스트를 통해 신진으로 주목받았던 작가가, 중견의 자리에서 다시 금호미술관 전관을 채웠다.
전시의 축은 2000년대 초부터 이어온 <Project 대화>다. ‘사람들은 왜 진심을 이야기하지 않을까?’라는 물음에서 출발한 이 연작은 사람들이 쉽게 꺼내지 못하는 질문을 대신 묻고, 듣지 못한 대답을 대신 들어 왔다. 첫 시리즈 <꿈의 먼지>는 ‘버린 꿈’을 물었고, 수천 명의 실패한 꿈 가운데 가장 자주 등장한 것이 ‘사랑’이었다. 꿈과 사랑을 포기한 이유를 되짚자 끝에는 ‘보통’이 되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고, 그 ‘보통’의 끝에는 다시 ‘우리’라는 집단이 있었다. 이번 전시는 그 네 번째 시리즈 <우리가 모르는 우리>(2019~)를 총망라해 그토록 되고자 했던 ‘우리’의 정체를 ‘진실’이라는 화두로 해부한다.
진실은 아니지만 ‘현실’입니다
여기서 ‘진실’은 무엇이 사실이냐를 가리는 문제가 아니다.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진실의 외형을 띤 ‘진실스러운 것’이 사회를 지배하는 국면, 곧 ‘탈진실(post-truth)’이다. 『옥스퍼드 사전』이 2016년에 ‘올해의 단어’로 꼽은 이 말은, 객관적 사실보다 감정과 개인적 신념이 여론을 더 크게 움직이는 상황을 뜻한다. 핵심은 ‘무엇이 진실인가’가 아니라 ‘우리는 왜 그것이 진실이라는 데 합의하지 못하는가’로 질문이 옮겨간 데 있다. 박혜수는 이 추상적 진단을 미적 체험으로 옮겨 놓는다. 전시는 <우리에 갇힌 우리>(2026)에서 시작된다. 작품은 2019년부터 수집한 6천 건의 설문 데이터를 기반으로 설계된 반응형 설치다. 관객은 입구에서 성향 검사를 거쳐 ‘현실주의자’부터 ‘평화주의자’, ‘개인주의자’까지 일곱 개 그룹 중 하나에 귀속된다. 각 집단의 정보는 암호화된 코드로 그 안에서만 공유되고 바깥으로는 철저히 차단된다. 어느 그룹에도 속하지 못한 관객은 공동체를 해치는 ‘침입자’로 간주해, 경고음과 함께 공간 밖으로 쫓겨난다. 흥미로운 것은 ‘국민의 기준’을 물은 대목이다. 한국인은 법, 제도적 동질성을 가장 중시한 반면 외국인은 정서, 문화, 언어적 동질성을 먼저 꼽았다. 우리가 규정하는 ‘우리’의 울타리가 얼마나 경직된 제도적 코드에 묶여있는지 작품은 묻는다. 내부의 철저한 보안과 외부자의 퇴출은 결국 하나의 논리다.
<나라 없는 사람 Ver.26>(2026)은 진실의 자리를 자본이 대체한 풍경을 펼친다. 작품은 천장까지 쌓아 올린 분쇄된 화폐 더미와 사운드, 공간을 가르는 서치라이트로 구성된다. 화폐의 탑은 무한 경쟁의 기념비, 서치라이트는 부를 사수하려는 기득권의 감시망처럼 작동한다. 그 위로 탈북민과 관객들이 말하는 ‘내가 꿈꾸는 나라’의 목소리가 부유한다. 돈이 유일한 권력이 된 사회에서 저마다 품은 소박한 이상향이, 거대한 자본의 요새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를 드러냈다. 영상 <누가 아기 신발을 팔았을까?>(2026)는 헤밍웨이의 것으로 전해지는 손바닥소설 “팝니다: 아기 신발, 한 번도 신지 않았음”에서 출발한다. 세대, 성별, 정치 성향으로 쪼개진 여섯 극단주의자가 각 집단의 대표로 나서 같은 사건을 두고 논쟁한다. 동일한 사건이 각자의 신념에 따라 전혀 다른 ‘진실’로 굳어가는 과정을 그렸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가 노리는 가장 이상적인 대상이 확신에 찬 이념가가 아니라, 사실과 허구를 더는 분간하지 못하게 된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거대한 악은 특별한 괴물이 아니라, 편을 위해 사유를 멈춘 이들의 무심한 동조 속에서 자란다.
진실이 자본에 밀려난 자리에서, 관계마저 상품이 된다. 가상의 기업 ‘(주)퍼펙트패밀리’가 그 무대다. 작가는 집단의 가장 근본적 뿌리에 가족이 있다고 본다. 감정마저 외주화하는 시대에, 이 회사는 가족 대행부터 ‘대리 사표 제출’, ‘미술관 동행친구’까지 판매한다. <휴먼렌탈서비스: 듣기만 하는 사람>(2026)은 관객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대여하는 참여형 퍼포먼스. 다만 서비스 제공 여부를 고객이 아닌 업체 직원이 결정한다는 설정이, 돈이면 다 된다는 상업 논리를 슬쩍 비튼다. 관계와 감정마저 자본화된 현실을 비추면서도, 교감의 본질인 ‘상호성’만큼은 지키려는 것이다. 함께 놓인 영상 <증발자들>(2026)은 스스로 사라지기를 택한 이들, 곧 ‘인간 증발’을 선택한 사람들의 궤적을 추적한다. AI에 일자리를 잃은 정비사, 독박 돌봄에서 벗어나려 가짜 결혼을 택한 사람, 타인의 가짜 관계를 설계하면서 정작 제 아이 앞에서 흔들리는 대표까지. 저마다의 사연이 교차한다. 퍼펙트패밀리의 슬로건 “진짜는 아니지만, 현실입니다”는 이 층 전체를 관통한다. 지젝이 “진실은 허구의 구조를 지닌다”고 했듯, 현대인은 가짜인 줄 알면서도 도태되지 않으려 그 규칙에 동조한다. 냉소야말로 가장 세련된 순응의 방식이다.
이제 전시는 방관과 연대, 그 갈림길 위에 관객을 세운다. 인터랙티브설치 <그림자에게 몸을 맡기다> (2026)는 15세기 마녀 심판 문헌과 17세기 마녀재판,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 오늘날의 혐오 발언을 하나로 엮어 마녀사냥의 메커니즘을 고발한다.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블랙 미러’ 앞에서 관객이 질문에 용기 내어 응답하는 순간, 소음이 사라지고 발밑에 가려져 있던 희생자들의 이름이 드러난다. 침묵이 곧 공모였음을, 그리고 그 침묵을 깨는 것은 결국 한 사람의 목소리임을 몸으로 겪게 하는 장치다. <토론극장: 우리_들>은 관객을 토론의 주체이자 피실험자로 세워, 집단 이기주의를 넘어선 합의의 가능성을 실험한다.
개인전 <사람들은 진실에 관심이 없다>가 던지는 질문은 이렇다. 진실은 정말 중요한가. 같은 사건을 두고도 각 집단은 상반된 진실을 절대적 진리로 신봉하고, 이에 반하는 사실을 말하는 자는 배신자가 된다. 그렇게 진실은 주변으로 밀려나고 ‘진짜 같은 그러나 거짓된 것’이 더 강력한 현실이 된다. 어쩌면 진실의 문제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넘어,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전시장을 나서는 관객에게 작가는 마지막 질문을 남긴다. 당신의 ‘우리’는 누구이며, 당신은 그 ‘우리’에게 불리한 진실을 말할 수 있는가. 이분법과 광증이 지배하는 극단의 시대에, 이 심문은 끈질기게 우리의 등 뒤를 쫓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