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들어총’은 말할 수 없는 것
6·25전쟁의 참전국을 기리는 <감사의 정원>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민주주의의 상징이자 시민의 휴식 공간인 광장에 전쟁 상징물이 적합한가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필자는 베를린 홀로코스트 기념비가 조형 원리로 삼은 ‘비-재현의 재현’을 화두로 <감사의 정원>의 시대착오를 꼬집었다.
광화문광장에 놓인 <감사의 정원>은 6·25전쟁 참전국에 감사를 표한다는 의미에서 집총 경례, 즉 ‘받들어총’을 형상화한 기념비다. 조형물은 구상적 형상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분명히 전달한다. 그러나 모든 기념비가 구상적 형상을 빌려 말을 거는 것은 아니다. 베를린의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는 회색 직육면체의 단순한 형상이다. 그것은 어떠한 구체적인 장면도, 인물도 지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리오타르에 따르면 이는 홀로코스트 희생자의 고통을 온전히 기리는 방식이 된다. 그는 『쟁론』(1983)에서 가스실 희생자의 증언 불가능성을 논한다. 희생자는 모두 사망했기에 증언할 수 없다. 생존자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가스실의 존재에 대한 반증이기에 이들의 증언은 효력을 의심 받는다. 설령 증언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것은 기억에 의한 재현에 불과할 뿐, 실재와는 상이하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가스실은 온전히 증언될 수 없고, 희생자는 언제나 침묵한다.
하지만 리오타르는 이를 발화가 억제된 상황으로만 보지 않는다. 그는 반대로 능동적 침묵의 가능성을 제기한다. ‘하지 않음’이 반드시 ‘할 수 없음’과 동의어인 것은 아니며, 침묵이 언제나 실어(失語)와 같은 것은 아니다. 따라서 희생자의 침묵은 ‘발화할 수 없음’이 아니라 ‘발화하지 않음’ 일 수 있다. 홀로코스트는 증언과 동시에 축소될 것이기에 희생자는 침묵을 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묵인으로 이어지지 않고 비극을 더욱 가시화한다. 침묵은 재현 불가능한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감히 언어로 재현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제시함으로써 희생자의 고통을 훼손 없이 그 자체로 현시한다. 따라서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한다. 회색의 직육면체는 재현하지 않는다. 이 순간 감히 조형으로 재현될 수 없는 무언가가, 재현될 수 없는 크기의 아픔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희생자는 어떤 것도 발화하지 않음으로써 발화하고, 조형물은 재현하지 않음으로써 재현한다.
<감사의 정원>을 설계한 삶것건축사사무소 대표 양수인은 본래 받들어총 형상을 의도하지 않았다. 그는 지난 5월 인터뷰에서 단순한 열주식 배열을 설계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조형물은 군인의 형상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ㄴ’자 형태의 비석에 가깝다. 이를 받들어총 ‘화(化)’한 것은 서울시였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작년 7월 페이스북에서 조형물이 ‘받들어총’ 형태로 만들어질 것이라 밝혔고, 서울시는 11월 보도 자료에서 이를 재확인했다. 조형물을 구상적 재현물로 인식시키기 위한 서울시의 사후 조치로 ‘ㄴ’자 형태는 꼿꼿이 선 병사의 모습으로, 나란한 배치는 군부대의 제식으로 변모했다. 각진 형태와 통일된 규격, 웅장한 크기는 군사주의의 어법과 교묘하게 맞물렸다. 이로써 광장은 ‘참전 용사에 감사를 표하는 공간’으로 규정됐다. 그러나 광화문광장은 단 한 순간도 그 의미가 고정된 공간이 아니었다. 2002년 미군장갑차여중생사망사건 추모 집회를 시작으로 수많은 이들이 광장을 거쳐갔다. 그곳은 세월호단식농성이 전개된 곳이며, 두 차례의 탄핵 시위가 벌어진 장소다. 광장은 매번 다른 장소가 되었다. 광장은 분노를 외치는 곳이고, 때로는 환호를 지르는 곳이며, 또 애도의 물결이 흐르는 장소다. 한편 <감사의 정원>은 받들어총 형상으로 그 역사를 하나의 서사로 귀속시킨다. 장소의 다의성을 일원화하고, 차후 그곳이 새로운 맥락을 획득할 가능성을 차단한다. 그러나 광장에 누적된 복수(複數)의 기억은 하나의 구상적 조형물로 치환될 수 없다. 어떠한 구체적 형상도 재현되지 않을 때, 광장은 비로소 그 가치를 오롯이 드러낼 수 있다. 조형물이 침묵함으로써 그곳의 역사는 축약되지 않는다. 이 순간 현시되는 것은 단일 서사로 환원 불가능한 다성의 외침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다. 그렇게 광장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서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