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로, ‘흔적’을 남기는 정신의 그림
윤명로展
정신의 흔적
2014. 10. 15~11. 23 아라리오갤러리 서울(http://www.arariogalle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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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에서의 윤명로 화 백
최근 ‘단색화’ 바람과 함께 원로 및 중견 작가를 조명하는 전시가 부쩍 늘었다. 이 여세를 몰아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한국의 대표적인 원로 작가 윤명로의 개인전 〈정신의 흔적〉이 열린다. 지난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그의 50년 화업을 총망라하는 회고전이 열렸지만, 이번 개인전에서는 78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한시도 붓을 놓지 않는 ‘현역’ 작가로서 신작 회화 20여 점을 공개한다. 출품작은 마대에 아크릴릭 혹은 훈색(暈色)과 혼합해 그린 추상 회화로, 작품 제목에 쓰인 ‘정신’ ‘고원’ ‘바람’ 등과 같이 근원적이고 신비로운 원시의 자연을 포착한 듯하다. 작가가 2009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훈색’은 빛의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진주색으로, 관객의 위치가 미묘한 색감의 차이를 결정한다. 이중에서도 특히 길이 4m에 이르는 대형 작품 〈고원에서 MXIV-234〉와 처음으로 원형 캔버스에 제작한 〈숨결〉 연작을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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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흔적 MXIV-310> 린넨에 아크릴릭 182×227.5cm 2014
윤명로의 신작에는 그간 작가가 실험해 온 ‘흔적’들이 고스란히 집적돼 있다. 그의 작업 세계는 1960년 서울대 회화과 졸업 후 본격적으로 미술계에 뛰어든 1960년대부터 10년 가량의 주기로 변화를 보인다. 작가는 이미 대학생 시절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특선을 거머쥐며 한국 화단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국전이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지 못하고 미술 서열화에 앞장선다는 데 반발해 대학을 갓 졸업한 작가들(김봉태, 김종학, 최관도 등)과 ‘1960년 미술가협회’를 결성, 덕수궁 돌담에 <60년전>을 개최했다. 이후 ‘악투엘’ ‘한국현대판화협회’ 등을 설립하고 1963년 제3회 파리비엔날레에서 〈회화 M.10〉을 출품하는 등 한국 현대미술을 선도했다. 1969년에는 미국 록펠러재단의 초청으로 뉴욕프랫그래픽센터에서 1년간 판화 과정을 이수했다. 그는 당시 익힌 ‘크랙(crack)’ 기법을 기반으로 1970년대 전반에 걸쳐 진행된 〈균열〉 연작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연작은 쩍쩍 갈라진 표면이 특색으로 당시의 혼란스러웠던 국내 시대상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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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MXIV-18> 린넨에 아크릴릭 64.5×80.5cm 2014
이후 1980년대를 대표하는 〈얼레짓〉 연작은 여러 갈래로 갈라지도록 만든 붓을 사용해 무작위로 얼기설기 겹쳐 그린 선들로 이루어져 있다. 1990년에는 충청북도 부강에 있는 대형 창고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넉넉한 공간과 새로운 환경에서 10여 년간 제작된 〈익명의 땅〉 연작은 길이 13m의 대형 캔버스를 사용하거나 아예 캔버스 위에 올라 서서 그리는 등 격정적인 표현으로 점철된다. 또한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로 30년간 재직했던 작가는 퇴직 후 한국미술의 전통성 탐구에 몰두했다. 이렇게 2000년대 들어 시작된 〈겸재예찬〉 연작에서는 직전의 강렬한 표현을 누그러뜨리고, 겸재 정선의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철가루라는 새로운 재료로 또 다른 실험을 이어 갔다. “한 점이라도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작품이 생전에 나오면 좋겠다”는 작가의 말처럼, 여전히 진행형인 그의 화업 인생에 남을 다음 ‘흔적’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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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원에서 MXIV-234> 린넨에 아크릴릭 110×339cm 2014
윤명로는 현재 서울대 미대 명예교수이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호암미술관(1991), 베이징 중국미술관(2010)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상파울로비엔날레(1967), 〈호랑이의 꼬리〉(1995 베니스), 광주비엔날레(2000), 부산비엔날레(2008) 등 국내외 굵직한 행사에 한국 대표 작가로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