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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희展

검은 묵죽(墨竹)의 숲을 거닐며…
정광희展 10. 4~11. 9 광주시립미술관

/ 조인호(광주비엔날레 정책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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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한지에수묵,대나무가변크기2014

묵죽은 옛 선비들이 오랫동안 즐겨 다뤘던 사군자 화제다. 세상사 잠시 물러두고 작대기 산수처럼 한 획에 정신을 모아 마음을 닦던 심중서화다. 재료나 형식이 워낙 다채로워지는 요즘의 미술 현장에서 먹을 중심에 놓고 마음과 세상을 담아내는 정광희의 개인전 〈먹을 쌓다〉가 열렸다. 기존 서화 형식에서 벗어나 한지요철 화판을 만들고 먹을 올리거나 철판을 오리기도 하고 하얗게 빈 공간에 검은 묵죽을 무리지어 설치한 작품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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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한지에수묵,대나무가변크기(부분)2014

이번 전시는 큰 전시실 하나를 대숲으로 연출한 〈무제〉가 중심이다. 넓은 전시실에 먹색으로 감싼 대나무 300여 개가 군집을 이뤄 매달려 있고, 빈 여백의 공간으로 그 묵죽의 울림이 잔잔히 퍼지도록 설치한 작품이다. 묵은 고서와 순지에 자유롭게 쓴 글씨나 상형문자 같은 모필의 흔적을 올려 대나무 통을 감싸고, 그 대나무마다 여러 번 겹쳐 올린 먹의 농담으로 깊고 묵직한 묵향이 배어나게 했다. 조각조각 붙여진 고서와 읽히든 안 읽히든 대통에 남겨진 필치의 흔적은 세상에 떠도는 숱한 언사와 지식의 그림자일 수 있다. 이 무수한 말과 지식은 강건하지만 비어 있는 대통들 사이로 공명을 이루며 맴돌거나 빨려들기도 한다. “나의 작업은 비움과 채움으로 이루어진다. 비움과 채움이 경우에 따라 음이 양이 되고 양이 음이 되면서… 비운 것도 아니고 채운 것도 아닌 경우도 있다. 정중동과 같은 의미다. 여기서 비움과 채움을 통해 생명의 순환을 말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지난 7월 광주 롯데갤러리에서 선보였던 〈선비의 정원〉과 같은 맥락이다. 고서와 서예의 편린들로 감싸고 더러는 먹을 짙게 올린 대나무 150여 개를 허공에 매달아 그 듬성듬성한 대숲 사이로 거닐며 선비의 정원을 음미하는 공간이었다. 이번 상록전시관 설치는 훨씬 확대되고 조밀해지면서 중심과 주변부를 잇는 먹의 파동이 더 장중해졌다. 그는 “짙은 땅의 기운을 바탕으로 쭉 뻗은 대숲은 올곧게 위를 향하며 그 생명력을 하늘과 바람에, 즉 다시 ‘자연’으로 산화시킨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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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한지에수묵,대나무가변크기(부분)2014

묵죽에 대한 그의 독자적인 시도는 다른 전시실에서도 이어진다. 제목은 역시 〈무제〉. 하얀 전시실을 화지삼아 허공에 먹선을 긋듯 검은 먹을 올린 대나무가 벽과 천장을 가로지른다. 관객은 3차원적인 이 서화 공간에서 한 가닥 먹선 사이를 거닐며 추상화된 묵죽도의 일부가 된다. 정광희의 작업 키워드인 ‘전통 서예와 현대 회화가 결합되면서 우리 것으로 승화되는 추상성’ ‘음과 양과 여백이 일체가 되는 비움과 채움의 생명 순환’ ‘거대한 에너지의 자연을 최소화하는 단순성’ 등을 먹선의 입체적인 설치로 함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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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518〉한지에수묵230×800cm2014

정광희의 작업에는 뿌리에 대한 탐구 의식이 강하게 배어 있다. 정신의 뿌리, 문화의 뿌리, 자기 작업의 뿌리를 찾아 지금 시대에 맞는 예술 형식으로 드러낸다. 이를 위해 굴레가 될 수 있는 전통 서법이나 회화에 대한 관념과 세상의 지식 따위를 걷어 내려 한다. 이전부터 지속해 오던 〈인식으로부터의 자유〉 〈아는 것 잊어버리기〉 〈생각이 대상을 벗어나다〉 연작을 비롯, 최근 어떤 선입견도 배재하려는 듯 〈무제〉로 이름하는 실험적인 먹 작업까지 일련의 ‘비우기’이자 진정으로 채워야 할 것들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고 있다. 기존의 틀에 박힌 한지 바탕으로부터의 탈출이면서 ‘본질로 다가가는 또 다른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지난한 작업 과정을 거치는 쪽 그림, 대나무 설치, 철판 서화 모두가 본질을 찾아가는 파격의 행보인 셈이다. 먹으로 함축하고 풀어 내는 서화의 본래 정신성과 더불어 ‘온갖 만물의 형상과 존재 양식을 넘어설 수 있는 그 관념의 자유를 찾아’ 재료도 형식도 공간도 계속 새롭게 모색해 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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