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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환展

2015/01/28

개인과 사회의 결로 현상
권경환展 2014. 12. 26~2015. 1. 23 스페이스오뉴월(http://onewwa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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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사랑하겠느냐는 주례의 마지막 질문에 잠자코 있던 신부가 갑자기 손을 들고 주례사에 이의를 제기한다면 어떨까. 장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될 것이고 신부는 파혼을 당할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사랑을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제도인 결혼, 그리고 그 추상적 관념을 하나의 사건으로 구체화하는 결혼식. 이곳에서 주례는 대개 신랑, 신부에게 축사를 건네고 그들에게 주어질 사회와 가정 내에서의 역할에 관해 ‘덕담’을 해 주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덕담이 정말 두 사람의 장래를 위한 것이며, 두 사람 모두에게 공평한 지침일까. 스페이스오뉴월에서 열린 권경환의 개인전 〈결로〉는 여성의 시각에서 주례사를 재주목했다. 작가는 지난 2014년 일민미술관에서의 개인전 〈마르기 전 규칙〉에서 ‘사랑’, ‘존경’ 등 주례사에서 반복적으로 쓰이는 단어를 관객이 직접 손바닥에 눌러 각인할 수 있도록 만든 조각작품 〈5초에서 8초〉를 선보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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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례사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권경환은 보편적으로 쓰이는 몇 가지 예시를 선정한 후 여성 참여자에게 나눠 주었다. 〈고쳐 쓰기〉는 주례사를 받은 참여자가 납득하기 어렵거나 불공정한 문구를 각자에게 만족스럽게 고쳐 쓰는 과정을 기록한 영상 시리즈다. 가령, 결혼을 ‘두 생명이 하나가 되는 일’로 표현한 구절을 ‘오롯이 두 사람’으로 고치거나, 여성을 남성의 내조자로 상정하는 문단은 전부 삭제하는 식이다. 그중 〈고쳐 쓰기_곰돌이와 곰순이〉는 어린 자녀를 둔 주부가 직장 생활과 가사를 병행하는 일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남편의 ‘따뜻한 격려’가 필요하다는 문장을 ‘직접적인 도움’을 줄 것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고치는 영상이다. 이들이 수정한 주례사는 전시 오프닝에 주례를 초청해 실제 낭독하는 퍼포먼스에 사용되기도 했다. 이후 그 주례사들은 기록물로, 오프닝에 쓰인 단상은 퍼포먼스 기록 영상과 함께 전시됐다. 이처럼 〈고쳐 쓰기〉는 주례라는 관행이 두 개인의 앞날을 밝히는 데 온전히 기여하는지, 혹은 유교적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 동참할 것을 특히 여성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던진다. 그리고 작가는 개인의 가치관과 사회적 인식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현상을 일종의 ‘결로’로 지칭한다. 겨울철 집안의 공기가 외부 온도에 의해 차가워진 벽과 만나 이슬을 맺듯 개인과 사회의 관계 안팎에도 온도 차가 있다는 것. 결로 현상을 방치하면 그곳은 곰팡이의 서식지가 된다. 이미 묵은 곰팡이를 처리하고 결로를 방지하기 위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개인을 억압하는 관습을 계속해서 고쳐 써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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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정기_습도(화살)〉 머리카락,종이,철사40×40cm2014

물론, 그 일은 주례사를 고치는 일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지난한 일일뿐더러 매우 더디게 진행되기 때문에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마치 〈측정기〉를 관찰하는 일처럼 말이다. 〈측정기〉는 미세한 움직임을 기록하는 작은 조각 작품 시리즈다. 머리카락, 종이, 철사로 제작한 〈측정기_습도〉는 머리카락이 습기가 차면 늘어나고 건조하면 수축한다는 원리를 이용해 만든 습도계다. 이 조각은 육안으로 확인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느리지만 분명 변화 중에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불합리한 관습을 계속해서 고쳐 쓸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 원동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변화의 움직임이 너무 미세해 결과를 당장 확인하는 일은 힘들지라도, 그럼에도 변하고 있다는 확실한 그 사실 자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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