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기展 & 회화-세상을 향한 모든 창들展
2015 / 05 / 10
디오니소스의 정념
이슬기展 3.7~4.19 미메시스아트뮤지엄(http://mimesisart.co.kr/mimesis-art-museum/exhibitioncurrent/)
회화-세상을 향한 모든 창들展 4.4~6.21 블루메미술관(http://www.bmoca.or.kr/)
/ 이선영(미술평론가)
* 이 글은 아트인컬처 2015년 5월호(http://www.artinculture.kr/magazine/198) 본지에 게재된 리뷰의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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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기 〈분화석!〉 진흙, 나무 가변크기 2015
파주의 미메시스아트뮤지엄에서 열린 이슬기 개인전과 블루메미술관에서 열린 〈세상을 향한 모든 창들〉전은 하나는 설치 전시고 다른 하나는 회화전시지만, 둘 다 ‘관계망’을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슬기〉전은 두 날개로 나뉜 전시공간을 안과 밖으로 삼아, 밖으로 내쳐져야 할 것으로 간주된 배설물을 고매한 예술공간 안으로 들여왔고, 잠자리의 필수품인 이불을 전시함으로써 가장 내밀한 공간을 밖으로 공개한다. 71점의 작품이 걸린 블루메미술관은 많은 수의 회화를 마치 ‘설치’하듯이 배치했다. 그것은 각자의 세계가 오롯이 보존된 단자 같은 존재들을 모아서 창이 없는 미술관 공간에 세상을 향한 수많은 창을 뚫어보겠다는 기획의 산물이다. 36명의 작가가 자신의 작품 중 밀접한 연관이 있는 두 작품을 출품하게 해 내부적 관계망을 극대화한다. 〈이슬기〉전이 안/밖의 구조적 대립에 관련된 문화적 경계를 다룬다면, 〈회화〉전은 창문 없는 내부에서, 바깥을 바라보고자 한다. 이슬기의 전시가 설치전이면서도 정교한 기하학적 구조 감각이 두드러진다면, 〈회화〉전의 경우 대부분 아폴로적 이성보다는 디오니소스적 정념이 앞선다. 이러한 파토스는 비슷한 시기에 열린 다른 많은 회화전들처럼 깊은 고뇌를 짊어진 젊은 작가 작품들의 특징이다. 비슷한 세대에 속한 이슬기의 작품 역시 주술적이고 마술적인 속성을 띠기는 마찬가지다.
20년 넘게 프랑스에서 거주하고 작업해 왔던 이슬기는 우리 삶 속의 일부였지만 간과되었던 부분을 재발견한다. 큐레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작가는 ‘예술은 삶을 예술보다 더 흥미롭게 만드는 것’(로베르 필리유)이라는 명언을 인용한다. 이번 전시에서 내세운 똥이나 이불은 몸으로 대변되는 삶과 밀접하다. 그것은 추상적 관념 보다는 실재에 뿌리를 내리려는 방향성을 가진다. 통영의 누비 장인과 협업하여 색색의 명주를 정교하게 누벼서 만든 이불은 캔버스에 자의적으로 줄그어 놓는 식의 추상 회화와는 다른 실재감으로 다가온다. 생활 속에서 우리의 홑이불은 이불싸개 부분이 액자 같고, 그 내부는 색면이 기하학적으로 배치돼 장식성과 상징성을 동시에 가진다. 여러 색면이 조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땀의 바느질도 흐트러짐 없는 표면들에서, 명주의 은은한 반사 빛을 담은 이불은 말 그대로 예술이 된다. 그러나 조형적 형식을 극대화한다는 순수예술의 미학적 이데올로기를 따라 내용을 배제하지 않는다. 바닥에 깔아놓은 10개와 벽에 걸어놓은 한 개의 작품은 모두 우리의 전래 속담과 관련된 형상들이다. 가령 〈이불 프로젝트 U-빛 좋은 개살구〉에서는 때깔 좋은 타원형이 화면 가운데를 가득 차지한다. 그 밖에 ‘금강산도 식후경’, ‘오리발 내밀기’, ‘땅 집고 헤엄치기’, ‘수박 겉핥기’, ‘새 발의 피’ 같은 속담이 그와 관련된 형태와 색상을 입고 있다. 이슬기의 작품은 우리의 정신 일부가 된 삶의 메시지들과 우리 삶의 긴밀한 부분이었던 사물의 결합, 언어와 형태의 상관관계를 일깨운다. 거기에서는 인류학이나 언어학에서 강세를 보였던 구조주의처럼, 의미작용의 기하학화가 일어난다. 물론 이슬기의 작품은 창백한 이론들처럼 추상적 모델의 구성이나 그러한 모델의 존재화에 방점이 찍힌 것은 아니다.
‘밖’에는 이 전시의 부제이기도 한 ‘분화석!(COPROLITHE!)’이 놓여있다. 이 낯선 단어는 인류학이나 심리학에서 알려져 있는 분뇨의식(Scatologic Rites), 분뇨선호증(coprophilie), 분식성향(coprophagie), 분뇨서화(coprographie) 등과 어원을 공유한다. 전시장소의 지역성이 반영된 그 작품은 파주의 강가에서 퍼온 진흙으로 만든 공룡 똥의 화석이다. 여러 나라 언어에서 똥이 저급한 욕으로 사용되지만, 작가는 땅과 똥을 교차시킴으로써 삶으로부터 체계적으로 배제된 배설물을 삶에 필수 불가결한 무엇으로 재맥락화한다. 미술관 한가운데 자리한 기념비적이고 제의적인 형태는 가장 세속적인 것 안의 성스러움을 강조한다. 해당 속담과 관련된 꿈을 꾸게 할 것 같은 이불처럼, 똥 화석은 역사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 여행을 제시한다. 거대한 배설물 사이에 소화되지 못한 이물질도 드문드문 보이는 원초적 덩어리들은 그것을 만드는 방식자체가 이불과는 대조적이다. 전시장에서 열린 퍼포먼스 장면을 보면 여러 모양의 똬리를 튼 형태를 가다듬기 위해 진흙 덩어리를 사정없이 내려치는 모습이다. 반면 그 정교한 누비이불이 만들어졌을 과정은 작가의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가 극도의 첨예한 지점에 몰려야 했음을 알려 준다. 추상적인 조각작품이라고 우겨도 할 말 없는 이 똥 덩어리들은 유명 건축가가 만든 새하얀 공간을 ‘더럽힌다’. 작가는 ‘순수와 오염 간에 놓인 경계를 위반’(메리 더글라스, 줄리아 크리스테바)함으로써 예술의 재료인 원초적 질료에 주목하게 한다. 정교한 형태와 색채의 배치로 기하추상을 닮은 그 이불들도 금기 위반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분화석보다는 덜하지만, 이불 역시 예술보다는 사물을 닮았다. 사물은 현대미술이 차례로 배제했던 것들을 다시금 담아낸다. 똥과 이불은 안/밖 외에도, 자연/문화, 신화/역사, 오염/순수, 보편성/특수성, 수직성/수평성, 질료/형상, 힘/형태, 구체/추상, 사물/예술 등의 여러 대조 항을 이끌어내면서 어떤 대상들 속에 내재한 관계의 체계를 전면화한다. 이슬기의 작품들은 안에 있든 밖에 있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오히려 새롭게 보이는 역설 또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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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영 〈산양리08〉 캔버스에 유채 147×210cm 2014
중간에 계단으로 이어진 큰 홀과 작은 방들에 촘촘하게 걸린 〈회화-세상을 향한 모든 창들〉전은 한창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20~40대의 작가들의 작품 71점을 한 번에 보는 호사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36명의 작가를 하나하나 호명하는 것은 이 짧은 지면에는 불가능하므로, 전시가 보여 지는 방식에 대해 논의를 집중코자 한다. 기획자가 주제를 제한한 것은 아니기에, 71점의 그림들은 말 그대로 제각각이다. 그것들을 어떤 주제나 형식으로 분류하기는 힘들지만, 이쪽 벽면과 저쪽 벽면에 걸린 작품들이, 큰 방과 작은 방에 걸린 작품들의 성격에 미세한 차이는 있다. 큰 방에 걸린 작은 작품들은 큰 작품들 사이를 연결하는 쉼표나 마침표처럼 보이고, 작은 방에 걸린 큰 작품들은 창이기 보다는 벽처럼 보인다. 어느 공간에 있든 한 작품의 내용과 형식 보다는 한 작가가 출품한 두 작품들 간의 맥락, 그리고 한 작가와 다른 작가가 연접되어 있는 맥락이 중요하다. 그것은 수많은 하나하나들이 모여 거대한 하나를 이루는 전시로, 전시장은 바닥부터 천정까지 수집된 그림들로 빼곡이 채운 고풍스러운 ‘경이의 방(Wunderkammer)’을 떠올리게 한다. ‘창’이라는 키워드가 있지만, 전시된 작품들 대다수는, 르네상스 시대에 정립되어 수 백 년 간 이어져왔고 유럽 아닌 지역의 아카데미까지 하나의 전례로 자리 잡았으며 근현대 미술에서 의문시되기 시작한 투명한 창으로서의 회화와는 거리가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재현하는 식의 평범한 작품들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미술관은 백화점과 마찬가지로 창이 없다. 현대미술이 삶이라는 맥락에서 벗어난 후, 작품에만 집중하기 위한 순수한 하얀 벽이 이상적으로 간주되어 왔다. 관객은 창문 없는 안에서 그림이라는 창문을 통해 바깥을 보게 된다. 단지 ‘화가’일 뿐인 대다수의 청년 작가들은 바깥에 있다. 각 작품들은 사회의 아웃사이더로서의 바깥에 존재하는 자들이 만든 창이다. 그들은 바깥에서 창을 연다. 관객은 바깥에서 연 창을 안에서 본다.
창 없는 방이라는 미술관의 존재 조건은 창이 없는 단자(monad)라는 라이프니츠의 정식을 떠오르게 한다. 들뢰즈는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에서, 오래 전부터 보아야 할 것이 안쪽에 있는 장소들인 독방, 제의실, 지하납골당, 교회, 극장, 열람실 또는 판화실 등을 환기시킨다. 여기에서 모든 작용은 내적이다. 모나드는 내부의 자율성, 외부 없는 내부이다. 외부 없이 순수 내부적인 상태로 닫혀 있는 것이다. 전시 공간 자체가 모나드지만, 그 내부에 걸린 작품들 각각도 모나드이다. 단자론적 세계관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테두리를 갖는 하나의 세계에서 산다. 물론 각각의 모나드들이 닫혀있다 해도, 서로 연대하고 있지 고립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들뢰즈는 라이프니츠의 자연학이 암맥, 소용돌이, 혼돈을 품고 있으며, 그의 형이상학은 무한한 주름, 불협화음을 통해 세워져 있음을 말한다. 이는 바로크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 전시의 작품들은 회화이기는 하지만, 이전의 모더니즘 시대 같은 분석적이고 평면적인 작품들과는 거리가 있다. 주어진 한계 내에 무한을 담으려는 듯이, 무언가 가득 쟁여져있고 복잡하게 얽혀있다. 라이프니츠가 《모나드론》에서 각 질료의 조각이 전체 우주를 표현한다고 봤듯이 말이다. 미란 보조비치가 《암흑지점》에서 말하듯이, 라이프니츠의 눈에 ‘물질의 모든 부분’은 ‘나무들로 가득 찬 정원이나 고기들로 가득한 연못’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며, ‘한 나무의 모든 가지들, 한 동물의 모든 부분들, 그리고 그 내부의 모든 액체 방울’은 ‘또한 그러한 정원 또는 연못’으로서 보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라이프니츠의 우주 속에는 선사시대의 짐승들조차 수용하기에 충분한 공간이 있다. 하나의 중심이 아니라, 여러 개의 중심을 가지는 알레고리도 두드러진다. 《주름》에 의하면, 상징은 영원과 순간을 거의 세계의 중심에서 결합하지만, 알레고리는 시간의 질서에 따라 자연과 역사를 발견하며, 중심 없는 세계 안에서 자연을 역사로 만들고, 역사를 자연으로 변형한다. 라이프니츠의 철학처럼, 현대 회화 역시 우주의 상징이기 보다는 볼 수 있는 것과 읽을 수 있는 것의 조합을 통해 알레고리를 구성한다. 설치적 성격을 띠는 회화전은 모든 방향으로 무제한적인 공간을 껴안는 연극성을 가진다. 그래서 관객들은 이 세계 안의 무한한 차이 혹은 다양함을 긍정하면서 단자들 사이를 유목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