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옥展
2015 / 06 / 07
‘오픈 리딩 프레임'을 위한 묘사와 각주
이세옥展 5. 15~6. 14 인사미술공간(http://www.insaartspace.or.kr/nr/)
/ 이세옥(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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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옥 〈모험의 편집공학〉 책 2015
한 신체가 다른 신체들의 생각을 흡음했다. 혹은 한 손이 여러 사람들의 문장들을 한 문단 안에 엮었다. 이 존재 양태를 바라보는 우리에게는 롱숏과 롱테이크의 조합이 제공하는 시점과, 세계와 개인의 경계인 피부 위 진동을 목격할 수 있는 시점이 필요하다. 개별 존재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색상과 문양에 맞춰 변신하는 위장술의 역학과 달리, 개별 존재가 머무는 환경이 그의 움직임에서 파생된 에코로 가득 찰 때가 있다. 그의 시야가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반향의 축적과 교란으로 인해 흐려진다면, 바로 그때가 그에게 언어가 필요한 때이다. 시청각적 감각을 통한 인식 체계가 야기하는 명료함과 불명료함 혹은 쾌감과 미스테리의 긴장 속에 머물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1F)
두 신체가 움직임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해석, 증명, 반박한다. 두 신체는 신체 부위들을 한정된 의미와 가치로 고정시키려는 문장들을 흩뜨려 놓고, 통계로 포착되지 않는 돌봄의 대화를 통해 숫자들을 채집한다. 이와 같은 활동들에는 무엇을 또렷하게 무엇을 흐릿하게 만들 것인가, 또 무엇을 가려야 가려진 이미지라고 부를 수 있는가 같은 물음들처럼 보기와 보여지기를 둘러싼 고전적인 주제 의식이 전제되어 있다. 두 신체는 두 비디오가 재생되는 한 스크린에서 최대 여섯 신체로 확장되며 리듬을 생성하는데, 이는 프레이밍된 신체 부분들의 조합 양상과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를 건너는 신체의 움직임으로 조성된다. B1)
한 신체 안에 여러 목소리들이 살고 있다. (이 목소리들을 명명하기 위해 병명을 은유로 사용하지 않는다.) 이 목소리들은 결론과 논증을 만들지 않으며, 확장적이고 서술적인 발명의 논리로 장면들을 제시한다. 이들은 장면의 전환을 추동하며, 좌우로, 위아래로, 전면에서 후면으로, 또한 그 역방향으로 이동한다. 녹음된 목소리들을 주축으로 이동하는 현재들은 이내 죽은 아이와 산 아이를 네 아이와 내 아이로 식별하려는 오래된 소유권 분쟁 장면까지 점유한다. 2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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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옥 〈퍼포먼스 워크숍〉 2채널 HD비디오 2015
1F) “나는 모험의 한 가운데 있다”라는 문장은 발화되자마자 모험이 끝나는 순간을 선언하는 듯하다. 이 문장은 혼돈의 모험이 개인에게 주입하는 강도 높은 정념을 전제로, 그가 이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며 외우는 주문처럼 들리기도 한다. 왜냐하면 눈앞의 장면을 응시할 수 있는 때에 이르러서야, 그 결과와 흔적을 발생시킨 시퀀스들을, 모험이라 칭할 필요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손발을 멈추는 순간. 발설하는 순간. 공유하는 순간. 유포되는 순간. 그 때, 프레임이 지정한 영역의 표면을 탐색하던 시선의 경로를 인지의 단계로 이어가기 위한, 지지대로서의 개념이 필요하다. 결과/흔적으로서의 이미지 위에 “그것은 모험이었다”라는 과거시제를 얹는 편집 방식은, 다시 움직일 정당성을 찾는 복원에의 의지 표현이며, 후속 행위들을 실행시키는 명령어의 형식이다.
B1) 현실세계를 향한 카메라를 통해 기록된 이미지는 당연히 현실세계의 질서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유통/해석되는 과정에서도 그 질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얼핏 보기에 유사한 기법으로 제작된 이미지라 할지라도, 각 이미지가 어떤 제작 과정을 거쳤고, 제작 이후 어떤 맥락에 놓이느냐에 따라 다르게 다루어져야 한다. 시작하는 자로서의 예술가, 허나 그 특정 주체에게로 수렴되지 않는 이미지들.
2F) 미래가 결국 ‘이동하는 현재들’의 집합이더라도, 미래시제, 현재시제, 과거시제가 지시하는 단위들이 실제로는 혼재되어 있더라도, 우리는 규범과 자연으로서의 ‘미래’를 거스를 수 없다. 이 최소한의 미래, 이에 주로 속하는 사회 분과와 이 미래 영역에서 곧잘 고려되지 않는 분야가 어떻게 다른가. 미래를 예측하고 설계하는 데에 몰두하는 분야와 역사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데 주력하는 분야가 대체로 나뉘어 있는가. 주로 어떤 분야가 발굴할 자원과 발명할 기술을 추구하는가. 아직 설계할 여지가 남아 있는 그 사회에 먼저 도착한 이는 누구인가. 개인과 예술의 관점에서는 어떻게 미래를 설계하는가. 과거, 현재, 역사를 세밀하게 관찰하며 이해하는 데 기울인 개별적 노력은 어떤 예술적 결과물로 이어지는가. 관찰 내용과 분석 결과는, 건설/창출을 위한 의지와 믿음의 말을 시공간 안에 축조하려는 시도들에 어떻게 기여하는가. 미래가 지시하는 영역에 수동적으로 입장하지 않겠다는 입장과 같은 이유로, 건설, 창출, 혁신, 창의, 융합 등의 어휘를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건 어리석은가. 미적이지 않은가. 단지 이 어휘들이 겪는 시대적 수난 때문에, 이들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여러 오독, 착시, 심지어 난청을 불러 일으킬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