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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Look]한재열

2015/11/04

무명의 얼굴들
한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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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sersby,DifferenceandRepetition〉캔버스에유채259.1×193.9cm2015

한여름의 더위를 잊고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서로 알고 있는 무서운 이야기를 주고받은 어릴 적 경험을 대체로 갖고 있을 것이다. 무서운 이야기의 단골 주인공은 ‘달걀 귀신’. 뒤돌아 서 있는 사람이 앞을 보는 순간 이목구비 없이 달걀 표면처럼 매끈한 여백만 덜컥 나타난다. 달걀 귀신이 공포의 대상인 이유는 단순히 괴이한 외형을 넘어서 평소에 우리가 ‘얼굴’이라는 신체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와 관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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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sersby,Unmask〉리넨에오일바90.9×72.7cm2013

사진작가 노순택은 그의 사진 에세이 《사진의 털》(한겨레출판, 2013)에서 ‘얼굴’을 특정 인물을 알아보는 외형 인식의 기준으로 삼으면서 “인간의 신체 부위 중, ‘이름의 지위’를 획득한 건 얼굴뿐”이라고 말한다. 즉 얼굴은 한 인간의 고유한 정체성을 반영하는 것은 물론, 근본적으로는 그 존재가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사진관에 걸린 수많은 인물 사진의 주인공들을 실제로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초상이 있는 한 그들이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작가 한재열은 사람 얼굴을 집중적으로 그린다. 하지만 특정한 인물을 실물과 똑같이 그리는 대신에 ‘이름’이 제거된 얼굴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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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sersby,Outrageous〉(부분)리넨에오일바25×35cm2013

작가는 지나가는 사람들 중 눈에 띄는 사람을 주의 깊게 보다가 기억에 남는 잔상들을 3~5분 사이에 스케치로 남기고 작업실에서 페인팅으로 옮긴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을 자세히 보면 저마다 마음 속에 담고 있는 감정이 언뜻 내비쳐질 때가 있는데 주로 그런 사람들이 초상의 주인공이 된다. 작가는 “그림을 통해 흔히 지나치고 마는 얼굴들을 더 자세히 관찰할 기회를 제공한다. 그렇게 얼굴을 바라보며 타자를 대하는 것이 글자로 먼저 타자를 대하는 시대에 의미를 만든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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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sersby,Penetration〉(부분)리넨에오일바27.5×19cm2013

아일랜드에서 1년 여 간 지속한 〈행인〉 시리즈를 처음 제작할 당시 작가는 이를 A4 용지 크기로 제작했다. 작은 크기는 다작이 가능했을 뿐 아니라 사람의 실제 두상 크기에 가까워 수십 점 모아 전시했을 때 ‘군중’이 형성되는 효과를 발휘했다. 이후 그림은 세로 길이가 2m 이상으로 커진다. 작가는 붓 없이 오일 스틱으로 작업하면서 어깨부터 손가락 끝까지 작용되는 힘을 화면에 담는데 캔버스가 커질수록 몸을 역동적으로 사용한다. 특히 뼈 근육 살 피부 순으로 얼굴을 그리면서 대상의 실존감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등 회화적인 가능성을 실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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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sersby,Insilence>캔버스에유채190×130cm2013

작가 스스로 자신의 회화를 “드로잉이자 동시에 조각”이라고 언명하듯이 끈적하게 엉겨 붙어 있는 물감 덩어리 역시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이 ‘양감’이 원색의 강렬한 색채와 함께 그림을 입체적으로 만든다. 인물이 풍기는 인상이나 느낌, 빛 등을 바탕으로 괴테의 색채론을 통해 구성한 규칙과 작가의 주관적 해석이 색채 선정 기준이 된다. 작가는 〈행인〉 연작을 앞으로 평생을 걸쳐 담아낼 서사의 한 시작으로 여긴다. 지금까지 캔버스에 등장한 인물들은 이 서사에 ‘캐스팅’된 셈. 익명의 얼굴들이 각자 어떤 캐릭터의 ‘배역’을 맡을지 사뭇 궁금해진다. 증명사진, 영정사진, 초상화 등 우리는 수많은 얼굴들을 일상에서 흔하게 접하지만 그 생김새만 흘낏 쳐다보곤 만다. 한재열의 작업은 우리가 현대 사회에서 간과해 온 ‘얼굴’에 관한 보다 깊은 인식을 재고하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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