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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철展

생의 숭고함 
권순철展 2. 16~5. 22 대구미술관(http://www.daeguartmuseum.org/main/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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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철<수인선할머니>캔버스에유채260×193cm2007_권순철은한국의산과강,만고풍상을겪으며살아촌로와촌부의얼굴을주로그렸다.두터운마티에르와거친터치로‘민중’의다중적면모를진솔하게담아낸다.

저리고 쓰린 슬픔은 힘이 되고 열(熱)이 되어서
어린 양(羊) 같은 작은 목숨을 살아 움직이게 합니다.
님이 주시는 한숨과 눈물은 아름다운 생(生)의 
예술(藝術)입니다.
— 만해 한용운, <생(生)의 예술>

권순철의 대구미술관 회고전을 보면서 문득 만해의 <생의 예술>을 떠올렸다. 권순철의 작품에는 저리고 시린 한숨과 눈물이 배어 나오면서도, 승화되고 숭고한 ‘생의’(生意, 삶의 의지)를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두터운 죽은 대지를 뚫고 생명의 숨결이 솟아오르는 봄은 권순철 작가의 전시를 열기에 가장 적합한 상징적인 계절이다. 이번 전시에는 작가의 초기 습작(1954년)부터 최신작(2015년)까지, 회화와 조소 작품 총 257점이 출품됐다. 주요 주제는 얼굴(신체), 넋, 산(자연)이다.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얼굴’, 신체의 추상 형태인 ‘넋’, 그리고 신체의 공간화이자 넋의 물질화인 ‘산’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다. 지난 3월 작가의 장흥 아틀리에를 찾아 작가의 작품 세계 전반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

심은록(SIM) 이번 대구미술관 전시에 데생 작품을 다수 출품했다. 프랑스에서나 한국에서나 항상 꾸준하게 데생 아카데미에 간다고 들었다.

— 거기에 모델이 있기 때문이다. 죽어 있는 석고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을 그릴 수 있다.

SIM 매주 아카데미에서 모델들을 스케치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실제 작품에서는 한국 촌로들이나 노동자들의 얼굴이 주로 나타난다.

— 모델들은 살아 있지만 프로들이다 보니 그들의 감성이나 삶을 드러내지 않는다. 반면에 몸으로 세월을 겪어낸 촌로나 노동자들에게는 ‘좋은 얼굴’을 발견할 수 있어서 최종 작품으로 즐겨 그렸다.

SIM ‘좋은 얼굴’이란 어떤 얼굴을 의미하는가?

— 작년 남북 이산가족상봉 때 한 할머니가 떠나가는 남편을 보면서 “잘 지내라”고 하는 장면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 수십 년을 기다려 잠시 만나고 어쩌면 영원히 다시 볼 수 없는 이별의 순간이 찾아왔는데도 그 할머니는 담담하고 평화로웠다. 새까맣게 타고 주름이 가득한 얼굴이었는데도 그 표정은 주위를 압도했다.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얼굴을 ‘좋은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SIM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풍부한 영감을 주는 얼굴인 것 같다. 마치 예수 얼굴이나 석굴암의 부처 얼굴, 모나리자의 신비스러운 얼굴처럼 후세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얼굴이다. 선생의 석사 논문 <한국미술에 나타난 얼굴 형태에 관한 고찰>(1971)에서도 한국인의 골상 연구를 위한 해부학적 분석 및 외국인 골상과 비교 등 얼굴에 대해 과학적 미학적 연구를 진행했다. 한국인의 얼굴에 꾸준히 관심을 두는 이유는?

— 한국인의 체형이나 얼굴은 50년 전만 해도 아주 달랐는데, 이제는 급속히 서양화되어가고 있다. 우리 몸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다. 한국인 고유의 얼굴 형태와 체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한국 미인대회의 기준을 서양의 비너스에 맞춰 한국 여성들의 열등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신사임당을 생각해 보라. 외모는 비너스와 전혀 다르지만, 비너스에게서 느낄 수 없는 품위와 자애로움과 지혜가 넘쳐흐른다. 아름다움이란 일괄적이지 않고 다양하기에 더욱 그 묘미와 깊이가 있다. 해부학자, 체질인류학자는 너무 늦기 전에 한국 고유의 아름다움을 연구해서 그 가치를 알려야 한다. 내가 화가로서 할 일은 그 아름다움을 되찾아 보여 주는 것이다.

SIM 산이나 한국의 자연을 그린 작품도 있다. <용마산> <성북동 뒷산> 등 평범한 산을 많이 그렸다.

— 설악산이나 금강산처럼 유명한 산 대신에 마을을 감싸고 있는 친숙하면서도 평범한 산을 그렸다. 일반적인 한국 산의 유형을 알기 위해서이다. 이를 위해 직접 실제 산을 눈 앞에서 보면서 작업한다.

SIM 선생이 그린 자연은 우리 신체의 공간 확장 같기도 하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가 “세계는 커다란 신체고 우리는 그 일부”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넋> 연작의 경우에는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의 넋까지 느껴진다. 작품이 이 둘을 연결하는 추상적 고리 같다.

— 한국은 현재도 분단 상황을 겪는 등, 역사적으로 한이 많기에 정신이나 영혼이 아니라 ‘넋’이라고 했다. 비록 추상이라는 형식은 서양에서 빌렸지만, 한국식 추상화를 해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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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철<등>캔버스에유채240×200cm2010_이번전시는작가가60여년간작업해회화,조소,설치작업135점을한데모은대규모회고전.1950년대초반의습작드로잉에서부터근작회화까지다양하게선보인다.‘주체성’‘흔적’‘풍토’‘그리다’‘테라코타’‘얼굴시리즈’6개의주제로구성됐다.

SIM 한국의 민중미술은 세계의 보편적 민중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한국적 민중’을 표상한다. 서양미술을 하면서 어떻게 ‘한국적’인 것을, 또한 서울대 출신 엘리트로서 어떻게 ‘민중’이라는 두 쌍의 상반된 축을 잡게 되었는가?

— 한국적인 것과 관련해서 먼저 이야기하자. 1960년대는 전쟁에 대한 여파가 어느 정도 가라앉기 시작하면서, 프랑스 미국 등지의 외래 문화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데 대한 각성과 함께 우리 것을 생각하자는 의식이 강해지는 시기였다. 1968년에 군대를 제대하고 문예지 《미대학보》 편집위원을 하면서 김종영, 전성우, 임영방 선생 등과 함께 ‘한국미술의 좌표’라는 좌담회도 주관하고 이를 특집으로 다루기도 했다. 최순우 선생의 글, 조자용 선생의 민화 등을 통해 한국 전통작품에 대한 기사도 게재하고, 학우들과 탈, 전통 미, 겸재 정선에 대해서도 많이 이야기했다. 다음으로 민중미술과 관련해서, 1980년대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은 ‘현실과 발언’ 같은 모임을 발족하게끔 이끌었다. 나도 처음에는 몇 번 참석했다. 개인적인 이유로 계속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그들과 함께 작업을 해 왔다.

SIM 이번 전시에서 보니, 선생은 1980년대 민중미술이 대두되기 훨씬 전부터 ‘민중’을 그려 왔다.

— 민중이란 피지배자를 말하니, 권력자들도 그 권력이 떨어지고 시대가 변하면 민중으로 복귀하게 된다. 크게 볼 때는 모두 민중이다. 학부 때의 그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보여 줄 수는 없지만, 추상과 구상 양쪽을 다 했다. 《미대학보》 편집위원들과 칸딘스키의 예술론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를 번역 및 출판하며 추상주의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의식을 가지고 추상을 하다 보니 너무 관념적인 것에 치우치고 또 지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서울대 뒤에 있는 병원 대기실의 벤치에 앉아 쉬면서 그곳에 나와 있는 시골 사람들의 얼굴을 스케치했다. 또한 동대문, 청량리 경동시장의 노인네들, 장사하는 사람들, 서울역 대합실, 파고다 공원 등지에서도 얼굴을 스케치했다.  그들의 얼굴에 드러난 삶의 체험, 생에 대한 의지가 타자의 것이 아니라 나의 근원처럼 느껴져서 점점 더 구상으로 가게 되었다.

SIM 최근 민중미술을 복권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단색화의 세계적 성공에 뒤이은 움직임이다. 다다이즘 다음에 초현실주의가 대두됐고, 표현주의 이후에 신표현주의가 나오면서 예술적 도약이 일어났듯, 민중미술도 그런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미학적 도약을 위한 움직임이기를 바라는 바다. 만약 미술시장만 겨냥한 것이라면 그건 많이 우려된다. 이전에는 민중미술도 프로파간다 쪽으로 쏠려서 미학적인 성취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당시 현실이 너무 급박하니, 많은 예술가들이 그렇게 쏠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미술가들은 미술로 승부를 봐야 한다. 세계의 미술계에 당당히 내놓을 수 있도록 미학적 성취를 이뤄 내야 한다.

SIM 여전히 힘든 한국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살아갈 의지조차 잃은 것처럼 보인다. 이들에게 생의 의지를 고취시키기 위해 예술가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현재 우리는 디지털 시대 속에서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상대적 빈곤으로 피폐하며, 분단과 이산가족, 세월호, 사회복지 결여 등 혼돈스럽고 어려운 시절을 겪고 있다. 비단 산 자뿐만 아니라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다 서거한 망자들의 한도 풀어 줘야 한다. 예술가는 이러한 상황을 승화시켜 미학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으로 풀어 내야 한다. 이것을 통해  세계와도 소통할 수 있는데, 이러한 국제 교류를 통해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우리의 현실과 상황은 예술가에게 이어서 풍부한 영감의 원천이다. 우리 미술, 전통, 문화재, 옛날 선조가 한 것 중에서도 찾아 내야 할 것이 많다. 그리고 이를 현대적으로 변형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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