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류가 예술이 될 때
오른쪽 · <매듭을 푸시는 성모님> 싱글채널 비디오 3분 2026 포럼앤스페이스 제공
오작동을 일으키는 것은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다. 이수경, 양아치 2인전 <Fail Better>(4. 30~6. 13 포럼앤스페이스, 제주 비도갤러리)는 그 어긋남을 동력으로 삼는 전시다. AI가 도출한 ‘완벽한 정답’이 기준이 되고 끊임없이 효율성과 결과만을 좇는 오늘날, 예술의 가치를 묻는다. 영상과 조각설치, 실시간 생성형 인터랙션 등 작품 9점을 공개했다.
실수도 실패도 허용하지 않는 무오류의 알고리즘. 이것이 AI를 비롯한 하이 테크놀로지의 질서라면, 기계에 창작을 맡길 때 예술은 한결 쉬워질까. 흥미로운 것은 막상 그 매끈한 회로에 손을 얹는 순간 작가들이 오히려 머뭇거리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무엇을 남기고 덜어낼지, 어디서 멈추고 어디로 비껴갈지 가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의도와 결과는 곧잘 엉키고 서로 자리를 바꾸며, 인간은 제 의도에조차 번번이 속는 존재다. 그러나 인간의 이런 결함이야말로 역설적이게도 과학 기술과 구별되는 ‘인간적인 것’, 곧 ‘예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은 아닐까.
오른쪽 · <오, 장미여!> 싱글채널 비디오 192시간 2026 포럼앤스페이스 제공
전시명 ‘Fail Better’는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산문 『최악을 향하여 (Worstward Ho)』(1983)에서 왔다. 다시 시도하고, 다시 실패하고, 더 잘 실패하라는 문장이다. 그러나 전시를 기획한 김윤경은 이 말을 굳이 우리말로 옮기지 않았다. ‘fail’을 ‘실패’로 번역하는 순간, 한 번 미끄러지면 곧장 도태로 직결되는 이 사회 특유의 무게가 단어에 들러붙기 때문이다. 대신 기획자는 부제로 ‘정교하게 어긋나기’를 달았다. 핵심은 어긋남이 무능의 결과가 아니라는 데 있다. 과녁이 어디인지 몰라 빗나가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를 알면서도 그리로 ‘가지 않는’ 것. 못 가는 것이 아니라 안 가는 것. 인간의 실수를 결함이 아닌 미감으로 끌어올리는 것. 기획자는 이 의도된 이탈에서 비로소 인간 고유의 창의성이 발현된다고 보았다.
이 믿음은 ‘성공작’을 향한 미술계의 오래된 강박을 겨눈다. 작가의 의도가 원인이 되고 작품이 그 의도를 투명하게 전달하는 결과가 될 때 소통은 성공한다는 근대적 도식. 김윤경은 그것이 ‘누구라도 만족시키는 잘 빠진 상품’의 논리일 뿐이라고 일갈한다. 정해진 인과의 사슬을 충실히 밟아 도달하는 성공에는 예술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2016년 바둑 인공 지능 프로그램 알파고에서 챗GPT를 거쳐, 2026년 라스베이거스 CES 2026에서 선보인 휴머노이드 아틀라스로 이어지는 계몽주의의 거침없는 직선을 흔들 수 있는 것은 그 논리 바깥으로 어긋나는 한 수뿐이다. 인류에게 단 1승을 안긴 이세돌의 78수가 그렇다. 바둑의 정석도 최선의 수도 아니었던 0.007% 확률의 변칙수. 수천 년의 기보 어디에도 없어 인공 지능 알고리즘에 버그를 일으킨 이 한 수야말로 기계가 흉내 낼 수 없는 인간의 ‘오작동’이었다. 기획자가 그 순간을 가장 예술적인 장면으로 꼽는 이유다.
여전히 ‘인간’이기 위해서
이수경과 양아치는 오차를 허락하지 않는 기계를 기꺼이 매체로 삼으면서도, 그 무오류의 질서에 분명한 균열을 낸다. 다만 이 파열은 정반대 방향에서 시작된다. 이수경의 화면은 실재하지 않는 대상을 명징한 존재감으로 빚어낸다. <오, 장미여!>(2026)는 작가가 그려온 장미를 토대로 AI가 생성한 이미지다. 잎과 줄기, 배경을 취향껏 골라 ‘나만의 장미’를 꽃피운 ‘디지털 육종(育種)’이다. 블록체인으로 인증된 이 꽃은 디지털 정원에서 영원히 시들지 않는 ‘영생’을 얻는다. 기념일의 장미는 일주일이면 시든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장미 역시 더 크고 진한 향을 얻으려 거듭 교배된 육종에 속한다. 자연을 제멋대로 편집해 온 육종의 역사는 이 지점에서 디지털의 문법과 정확히 한 몸이 된다.
<달빛 왕관>(2026)은 관람자의 위치 정보에 따라 태양과 달의 주기, 날씨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받아 7개의 왕관을 이루는 21개 요소를 끝임없이 해체하고 재조합한다. 성인의 후광을 대신해 권위와 영광을 참칭해 온 인간의 왕관. 그 자체가 결핍을 가리는 가짜라면, 그것을 디지털로 빚어 무한히 미끄러뜨리는 일은 가짜를 한 번 더 가짜로 만드는 정교한 농담이다.
<매듭을 푸시는 성모님>(2026)에 이르면 어긋남은 신성의 문제가 된다. 남양성모성지에 봉헌한 조각을 디지털로 재구성했다. 이 앞에서 작가는 묻는다. 광케이블이 온 지구를 휘감은 21세기의 신성이란 결국 네트워크로 ‘접속’되는 일이 아니냐고. 낡지도 철거될 일도 없는 성모의 형상은 우리 안의 신성을 갱신하는 업데이트 장치로 작동한다.
반면 양아치는 진짜를 들이밀지만 아무도 그것을 진짜로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을 연출한다. <유령>(2026)은 가상 캐릭터 ‘샐리’가 등장하는 영상이다. 생성형 AI가 만든 듯 보이지만 사실 작가가 한 땀 한 땀 찍어낸 이미지다. 이수경의 장미가 원본 없이 디지털 안에서 태어난 환각이라면, 샐리는 물리적 실체를 고쳐가며 빚어낸 진짜다. 그런데 더 가짜처럼 보이는 쪽은 진짜인 샐리다. 영상 속 샐리는 전시장 밖 휴대전화를 향해 끊임없이 ‘시리’와 ‘빅스비’를 호출하지만 접속은 번번이 빗나간다. 부르면 응답하고 원인이 있으면 100% 결과가 나와야 한다는 계몽주의적 회로가 여기서 헛돈다. 오작동하는 쪽은 기계가 아니다. 매번 접속에 실패하면서도 끝내 말 걸기를 멈추지 않는 인간이다.
전시장 구석의 <머리있는 유령>(2026)과 <머리없는 유령>(2026)은 황동과 자석, 광물로 감시 기술과 데이터센터, 플랫폼 노동이 떠받치는 비가시적 인프라를 끄집어낸다. 반들거리며 빛나는 도시 아래 매장된, 그러나 그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작동하지 않는 물질. 이들이 양아치가 ‘유령’이라 부르는 존재들이다. 제주에서 선보인 <렌더링된 유령들>(2026)은 라이다 센서가 수집한 데이터로 도시 외곽의 폐기물 소각장을 기록한다. 육안이 아닌 천 개, 1억 개의 눈으로 세계에 접속하는 이 ‘새로운 눈’은 단안 원근법의 신화를 해체하며 하나의 자아를 무수한 자아로 갱신한다.
이 전시의 진짜 사건은 상반된 두 작가의 작품 세계가 포개지는 자리에 있다. 단 한 번도 같은 공간에 선 적 없는 이수경과 양아치는 각자의 익숙한 장르에서 벗어나 낯선 방식으로 조우한다. 도자조각으로 작품 세계를 쌓아온 이수경은 디지털만으로, 웹아트로 대표되던 양아치는 금속 오브제로 등장한다. 이수경의 세 영상은 등을 맞댄 삼각 편대로 놓여 한눈에 들어오지 않고, 관람객은 동선을 돌며 하나씩 마주해야 한다. 전시를 한 눈에 살피며 총체적인 메시지를 얻는 일은 불가능하고, 감상자는 진짜와 가짜를 끊임없이 오가며 자신을 의심해야 한다. 더 잘 실패하기란 추락이 아니라 예술의 발현이라는 확신이 여기서 빛난다. 두 사람의 개인전이 아닌 기획자를 포함한 셋의 대화로 전시를 구상했다는 말처럼, 삼각형은 단순한 배치가 아니라 각자의 입장을 논쟁하는 전시의 형식 그 자체다.
<Fail Better>전은 끝내 답을 내놓지 않는다. 어떤 물음에도 정답을 토해내고야 마는 AI적 강박의 시대. 두 작가는 정답 대신 정교하게 어긋난 한 걸음을 택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화면에서 번지는 것은 환희가 아니라 어떤 슬픔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알던 세계가 끝장난 자리에서 여전히 ‘인간’으로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려는 자의 슬픔이다.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술은 그 세상을 사는 사람들을 바꾼다. 그 순간 세계가 조금은 달라진다고 기획자는 믿어왔다. 예술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말이 순진하게 들릴지라도, 그 미세한 어긋남이 모여 우리를 조금 더 풍부하게 만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더 잘 실패하기 위해, 다시 한번 정교하게 어긋날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