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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만의산책

2018/03/05

강영순展 
2017. 12. 26~1. 28 영은미술관

“산책길에서_숲과 웅덩이, 작은 여울목엔 새소리, 물소리 가득하고, 서성이는 발길에 난데없이 날아와 울려 퍼지는 존재의 공명 반향 파문 울림. 두서없이 시작되는 문장과 계획 없는 대화의 시작과 같은 그림에 대해, 그리고 그림이 되지 못한 그림에 대해 생각한다.” “모란을 닮은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을 모란이라 부르던 누군가가 있었다. 그 사람은 세상을 떠났고 그 누군가도 세상을 떠났다. 그들의 모란은 더 이상 세상에 없다.”
위의 글은 나의 개인전 전시장 벽면에 시트지로 붙여 놓았던 것이다. ‘산책길에서’는 ‘아티스트 인 레지던시’ 작가로 영은미술관에 머물던 9개월간, 일상이 되었던 산책에서 나온 단상이고, ‘모란’에 대한 글은 대형 설치작품에 붙인 헌사였다. 작품에 붙인 긴 제목이라 해도 좋다. 1986년 첫 개인전 때도 작품 제목에 무척 고심했다. ‘꽃은 몹시도 독실하여 마치도 비디오 같다’. 이 제목을 두고 작품을 보완하기를 넘어 그 자체로 강렬한 존재감을 갖는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어쨌든 작품과 제목은 한 나무에서 자라는 잎과 꽃의 관계와도 같다고 생각한다.

강영순 <그늘진 꽃밭에 들어서면> 옷감에 안료 아크릴릭 실크스크린 220×1,680cm 2017

나는 활자중독까지는 아니지만 거의 언제나 단 몇 줄이라도 글을 읽어야 한다. 나로서는 글에서 작품이 시작된다 해도 무리가 없다. 내가 읽는 글은 장르가 다양해서 특정한 성격으로 집중되지 않는다. 마치 목적지 없이 나서는 산책이나 매한가지다. 산책길에서 나는 종종 낯선 골목을 기웃거리고, 기어이 그곳으로 들어서 길이 막힌 곳까지 가보곤 뒤돌아 나온다. 돌아오는 길엔 또 유혹에 못 이겨 다른 길로 들어선다. 그 길에서 많은 생각과 이미지를 주워 올린다. 때문에 ‘실패한 걸음’이란 없는 편이다. 읽을 책을 선택하는 일이나 산책길의 행로를 정하는 일이 유사하듯이, 작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작품과 제목, 읽기와 산책은 나라는 개체 즉, 한 나무를 구성하는 전체라 할 수 있다. 활자에서 촉발되는 정서는 구체적인 물질을 통해 이미지로 변환되고, 이미지는 또 다른 정서를 생성시킨다. 이러한 연쇄와 순환. 나는 이런 작품을꿈꾼다. 현재는 천과 실을 주재료로 쓰지만 이미지 구현에는 어떤 방법과 재료라도 허용하고자 한다. 자기복제를 반복하지 않는, 원본 없는 원본, 장르 없는 표현, 경계 없는 영역을 꿈꾼다. 작품 내용도 고정시킬 수 없다. 목적지 없이 접어드는 골목들의 난데없는 부딪힘, 방향 없이 헤매는 벌판의 소요처럼 그저 걸으면서 매번 다른 사유와 이미지를 만나고 싶다.

강영순 <덤불> 모시에 명주실 27×40.5cm 2017

27년만에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쉽지 않았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짐짓 의연하려 노력했지만, 문득문득 몰려오는 두려움을 이겨내야 했고, 작품과의 분투는 난이도가 높았다. 그러나 산책과 읽기로 다져진 나의 뇌 근육은 저대로의 해법을 찾아, 조금은 낮선 길을 만들고 있었다. 그 길이 미숙한 것일지라도 흡족한 부분도 있었다. 20대의 나는 미술의 역사라는 선적(linear)인 체계를 밟고 있지 않았던가 생각된다. 그에 반해 긴 공백 중의 나는 삶 속으로 더욱 더 깊고 멀리 오갔으며, 그 여정을 통해 더욱 ‘두터워진 이해와 공감의 층’을 갖추게 됐다. 역사 이전의 ‘나’라는 존재를 오롯이 건져 올릴 수 있었던 점이 새삼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진정한 예술은 오직 작품이 중요할진데, 긴 공백이 대수겠는가.
나는 지금 새로이 길을 나섰다. 그 길 끝에 막다른 곳을 만날지라도 ‘실패한 여정’이 될 수는 없다. 그저 걷는 중에 발생하는 행복한 오류로 받아들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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