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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준상초대서울시립미술관장별세

2018/05/02

유준상 선생님! 인자한 미소가 그립습니다
/ 서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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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준상은국립현대미술관1대학예실장,제2회광주비엔날레조직위원장,서울시립미술관초대관장등을역임했다.

유준상(1932~2018) 선생은 1960년대 중반 파리 대학에서 수학하고 귀국했으나 국내에서는 그를 반겨주지 않았다. 프랑스 유학 시 학생회장을 맡은 것이 문제가 되어 한때 강원도 산골의 막장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그가 서울로 돌아와 미술계에 뛰어든 계기는 지인의 도움으로 신문회관의 한국신문연구소에 근무하면서부터. 방대한 지식과 막힘없는 언변으로 그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서울대와 홍익대, 서라벌예대와 수도여사대 등에 출강하면서 후학을 가르쳤고,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평론가로서 현장 활동을 펼쳤다. 故이경성 선생에 이어 한국미술평론가협회장을 역임한 평론계의 대들보였다. 선생은 미술을 비롯해 미학 문학 인류학 심리학 등을 섭렵하며 예술의 밸러스트적 기능, 즉 문화가 어느 한쪽에 기울어졌을 때 원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복원력을 강조했다. 어디에도 쏠리지 않는 선생 같은 분이 계셨기에 미술동네에 ‘울림의 공간’이 생기지 않았나 싶다.

유준상 선생이 특별히 애정을 쏟은 분야는 미술관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및 초대 학예실장, 예술의전당 전시사업본부장, 서울시립미술관 관장 등의 경력에서 보듯이 그는 미술관과 유독 관련이 깊다. 국립현대미술관 건립이 준비되던 시기에 미술관과 인연을 맺었다. 김세중 관장이 유준상을 적임자로 여기고 후쿠오카까지 찾아간 일화는 유명하다.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그는 국립현대미술관 개관을 성공리에 추진했다. 백남준의 <다다익선> 설치를 현장 지휘한 큐레이터가 바로 유준상이었다. 서울시립미술관 건립도 그의 몫이었다. 그는 1999년 초대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으로 추대되어 대법원 터에 건립된 미술관 개관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취임사에서 “작품 없는 미술관은 존립할 수가 없다. 소장품 수준이 곧 미술관의 수준이다”고 했는데, ‘눈으로 보여주는 미술관’을 강조한 그의 미술관 철학이 얼마나 시의적절한 것인지 알게 해준다.

유준상 선생은 겉으로는 엄격했으나 속으로는 대책 없이 정이 많은 분이었다. 혹시 식사자리라도 갖게 되어 그분의 허락 없이 미리 계산을 했다가는 호되게 꾸중을 들어야 했다. 계산은 선생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했다. 도통 경제관념이라고는 없는 분이셨다. 그 덕(?)에 사모님은 가계를 떠맡으셔야 했으나 부창부수가 아니랄까봐 그것을 즐거이 받아들이신 것으로 안다. 한번은 우리 부부가 서초동 댁을 방문했을 때 부엌에서 앞치마를 입고 서성거리는 낯선 이가 눈에 띄었다. 선생이었다. 손수 밀가루 반죽을 하고 육수를 내어 일본 우동을 만들고 계신 모습은 정말로 의외였다. 손선희 사모님께 여쭤보니 평소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신다고 했다. 
최근에 뵌 선생은 지팡이에 몸을 의탁하시고 침침한 눈 탓인지, 다소 피곤한 모습이었다. 이전에 호방한 성격에 거침없는 언사, 선비풍의 외모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런 모습에 무척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내게는 노년의 모습보다 중년의 모습이 더 친근하다. 그것이 유준상 선생다운 모습이라고 믿고 싶다. 선생님을 추모하려고 하니, 88서울올림픽 기념 미술행사 준비로 여념이 없을 때 중도 하차한 일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 얼마나 당황하셨을까? 그런데도 언짢은 내색 한번 하지 않으셨다. 미술계의 어른으로서 그 분의 빈자리가 크게만 느껴진다.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넘쳤던 유준상 선생님, 하늘나라에서 평안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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