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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말하는작가이성자*윤향로

2018/10/17

Art는 10월호 특집에서 작가의 시점으로 한국미술계의 지평을 넓혀 온 주요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다시 조명했다. 이름하여, <작가는 작가의 작가>. 작가는 전시에서 무엇을 보고 느끼는가? 한 작가의 조형 방법과 예술정신은 다른 작가의 창작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작가는 작가이기 전에 또 다른 관객이자 그의 입장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동지가 아닌가?… 이러한 질문에 답을 찾고자 ‘작가 매칭’이라는 방법론을 끌어들였다. 총 11명의 작가들이 직접 보내 온 원고를 공개한다.

이성자 * 윤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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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자<오작교>캔버스에유채146×114cm1965_<탄생100주년기념전,이성자:1956-1968>(9.6~10.7갤러리현대)전출품작.올해는이성자(1918~2009)의탄생100주년을맞은해다.갤러리현대는이를기념하며그의1960년대작품세계를 대표하는<여성과대지>연작을중심으로,1956년초기작부터 1968년까지의주요작품30여점을선별했다.1951년도불한작가는여성으로서겪은고통,이방인으로서느낀모국과자식에대한그리움을아름다운추상언어로표현했다.이번전시는 이성자가구상에서추상으로넘어가는변화과정과특유의화풍에집중한다.

더 큰 세계를 찾는 여정

이성자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듬해 남편의 외도로 이혼하고 자녀와 떨어져 33세의 나이에 프랑스로 이주한다. 1935년 도쿄짓센여자전문학교에서 유학하고 12년의 결혼생활을 마친 후, 프랑스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다. 일생을 프랑스에 머물며 작품 활동에 몰두한 이성자의 삶을 통해, 2018년 한국에서 여성작가로 사는 나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한 인간이 바라는 삶과 사회가 여성작가에게 기대하고 요구하는 모습 사이에서 이성자는 무엇을 선택했고, 어떻게 살았으며, 어떤 작품 활동을 펼쳤을까? 이성자는 1950년대 후반 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며 회화의 형식을 만들어나갔다. 기하학적인 형태와 점, 선, 면을 함께 겹쳐 사용하면서 점차 기법과 양식을 구축한다. 작가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꾸준히 자연의 다양한 요소를 자신만의 조형 언어로 탐색했다. 특히 회화 판화 모자이크 태피스트리 설치 도자 등 매체에 변화를 주며 그 세계를 확장하고 구체화했다. 동일한 대상에 대한 끈질긴 관찰과 매체 변주에 따른 여러 기법의 시도가 작가에게도 자신의 연구 주제와 작품 내부로 들어가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나에게 이성자의 작품세계, 특히 <여성과 대지> 연작은 그가 살았던 곳에서 자신의 역할과 자아를 찾는 수행의 결과처럼 보였다. 멀리 떨어진 자녀와 고국이 그리울 때마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물리적으로 행할 수 없는 자녀의 양육을 대신하는 것이라 느꼈다는 작가의 말은, 이성자가 얼마나 작품 활동을 숭고하게 받아들이고 삶과 작품의 세계관을 일치하는 데 힘을 쏟았는지 잘 드러낸다. 그의 작품은 모성애로 직결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기보다, 결핍의 한 부분을 작업을 통해 당당하게 마주하고, 자신을 대면하는 통로였다. 그는 실존적 결핍과 상실, 혼돈의 경험을 가지고 작품 안에 침잠하지 않았다.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모성애로 인한 죄책감이나 후회가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몰두하고 대면하는 자세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갔다. 작가는 후기 작업에서 결핍에서 벗어나 더 큰 세계로 나가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 작품들에는 이전의 자신을 마주하는 데서 벗어나 다음 세계로 도달하고, 새로운 세계를 끊임없이 찾아 나가는 과정이 담겼다.
이성자가 이렇게 구축해 나간 작품세계는 그의 삶에 어떤 방향을 만들었을까? 물론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스스로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이에 몰두하며 평생 수많은 작품을 남기는 삶이 가능했을 것이다. 전쟁 직후 한국에서 이혼한 여성의 삶, 그리고 조국을 떠나 다른 곳에서 새롭게 삶을 시작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경제적 여건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대와 국가가 그리는 여성과 어머니의 이미지를 생각해 보자. 당시 한국에서 여성에게 요구한 조건은 지금 사회와 비교해도 확연히 다르지 않다. 당시 그의 상황을 이해하고 새 삶과 공부를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은 가족의 믿음과 지지, 작가의 내적 투쟁과 선택 그리고 용기와 결단, 재능은 시대를 초월해도 놀랍다. 게다가 그가 남긴 작품의 양과 이뤄낸 세계를 보면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이 길을 달려왔는지 알 수 있다. 1950년대 데뷔 이후 2009년 3월 프랑스 투레트에서 타계하기까지 회화 1,300여 점, 판화 12,000여 점, 도자기 500여 점을 남겼다.
과거에는 많은 사람이 예술가의 결핍이 창작으로 연결되는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창작의 가장 큰 원동력은 결핍보다 작가가 얼마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상황을 만들기 위해 환경이 얼마나 뒷받침될 수 있는가, 모든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여건을 지속해서 유지할 수 있는가를 기본 단위로 가진다. 이성자가 예술가로서의 자질과 집중력을 바탕으로 오로지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상황은, 자신의 세계를 더욱 단단하게 구축하고 조형언어를 확장해 나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한 작가가 꾸준히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은 물리적 조건과 내면의 조건, 그리고 삶에서 잃은 것과 얻은 것을 어떻게 조화롭게 영위해 나가는지에 달렸다.

윤향로 / 1986년생. 홍익대 회화과 및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전문사 졸업. 애니메이션에서 발췌한 디지털이미지를 포토샵으로 변형하면서 동시대 추상회화의 변주 가능한 형태를 모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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