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리, ‘이미지 이후’의 미술
2019 / 03 / 10
네덜란드 출신의 퍼포먼스 설치작가 저메인 크루프 (Germaine Kruip)가 한국 첫 개인전 <이미지 이후>(2. 22~3. 23 갤러리바톤) 개최를 기념해 지난 2월 방한했다. 무대연출가에서 시각예술가로 전환한 작가는 공간을 울리는 빛과 소리로 인간의 지각과정을 탐구한다. 크루프의 ‘무대’에서 관객은 어느새 작가가 된다. / 한지희 기자
저메인 크루프가 국내 첫 개인전을 개최했다. 지난 20여 년간 인간의 지각과정에 대한 관심을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설치작업과 퍼포먼스로 표현해왔다. 작업을 이루는 주 요소는 빛과 사운드, 공간. 무대연출을 전공했던 배경을 살려 각 요소를 연극적이고 건축적인 방식으로 직조한다. 이번 전시에는 2000년 초반 발표한 초기작부터 최신작까지 포괄해, 크루프의 작품세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8점을 선별했다. KW 베를린 디렉터 크리스트 그루잇휘젠이 기획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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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메인 크루프 / 1970년 네덜란드 출생. 암스테르담 다스아츠 무대연출전공 졸업, 라익스아카데미 수학. 앤프워프 갤러리소피판데벨데 (2017), 암스테르담 구교회, 로테르담 비테데비트 현대미술센터(2015), 뒤셀도르프현대미술관(2009) 등에서 개인전 다수 개최. 바르셀로나 안토니타피에스 재단(2018), 런던 어프로치, 갤러리바톤(2017) 포함 단체전 참여. 로마대상(1999), 샤를로테쾰러상(2001), 아트브뤼셀 최고개인부스상 (2015) 수상. 현재 암스테르담에서 활동 중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보는 행위와 이때 일어나는 지각과정 그 자체다. 철저히 ‘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가는 “작업에 개입하기보다 스스로를 ‘보는 이’로 설정한다. 작업에서 분리되지 않는 이상 지각이 일어나는 과정을 관찰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퍼포먼스의 경우 항상 다른 이를 수행자로 삼고, 유형의 작업도 직접 만들기보다 전문 제작인과 협업한다. 전시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그루잇휘젠과는 10여 년째 인연을 맺어왔다. 연기와 연극을 전공했다는 공통점이 서로의 예술실천 방식과 큐레토리얼 방법론을 이해하는 데 촉매가 됐다. 이번까지 총 다섯 번의 전시를 함께 꾸렸다.그루잇휘젠은 크루프의 작업을 “조금 덜 형식적이고, 조금 더 자유로운 관점에서 보여주고자 했다”고 밝혔다. 이어 “모든 전시에는 전시 전반, 궁극적으로 작가의 작품세계를 요약하는 ‘닻’이 있다. 초기작 <리허설>(2002)과 <이미지 아카이브>(2004~)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우리의 인지체계를 연마하는 작업이다”고 덧붙였다. 각 작업은 두 전시장에 하나씩 닻을 내렸다.
메인갤러리에 들어서면 <이미지 아카이브>가 제일 먼저 관객을 맞는다. 2004년 이래 계속 갱신되는 작업으로, 대중매체에서 가져온 보도 이미지와 이와 흡사한 미술사적 이미지를 두 대의 프로젝터로 영사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현실 역시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허상처럼 보일 수 있음을 제안한다”고 작가는 설명한다. 보통은 프로젝터를 병치하지만 이번에는 이미지가 서로를 마주 보게 영사하도록 배치했다. 기획자에 따르면 이는 “전체 출품작 중 유일하게 구상성을 띤 작업이다. 관객이 알아볼 수 있는 대상을 제시해 작업 해석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도록 대문처럼 연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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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이후>전 갤러리바톤 전경
‘대문’ 너머 벽에는 두 점의 금속 오브제와 밝기를 달리하며 사각형의 상을 맺는 설치작업을 선보였다. 빛을이용한 <이미지 이후>(2019)는 연극으로 만들었던 초기 퍼포먼스 <추상의 가능성>(2012)을 “해체하고, 전시공간의 어법에 맞게 번역”해 만든 작업이다. 전시실 가장 안쪽 벽에 두 대의 조명을 번갈아가며 페이드 인, 페이드 아웃해 사각형의 상이 계속 음양으로 전환한다. “기하학적인 형태는 크루프의 작업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시각 어법으로, 어떤 정신성의 발현이라고 해석한다.”(기획자) 이 정신성은 작가가 주목하는 인지과정을 가장 잘 표상하는 개념 ‘동시성’도 포함한다. 동시성이란 눈으로 대상을 봄과 동시에 머릿속에 저장한 이미지를 꺼낼 때, 이를 인지하는 순간 안팎의 이미지 사이에서 일어나는 파동을 일컫는다. 기하학적 형태가 주요 어법인 설치작업 <두 개의 황동 선>(2018)과 <원>(2017), <마름모>(2017)도 출품했다.
도로 변에 인접한 블루바톤에는 위치의 특징을 살린 작업 4점을 제시했다. 기획자가 중심작으로 지목한 <리허설>은 공간 혹은 무대를 만드는 것을 다룬다. “연극은 내 사고의 틀과 관심사, 표현방식에 까지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배우가 무대에 오르면 막이 오르듯, 텅 빈 공간에 관객이 들어서면 조명이 명멸을 반복한다. 아무 것도 ‘볼 것’이 없음을 깨달은 관객은 공간 안에 자신을 투영하며 무언가 볼 것을 만들어낸다. 전시장을 울리는 사운드작업 <2초>(2000)는 같은 방식으로 관객을 수동적 관자에서 능동적 창작주체로 뒤바꾼다. 암스테르담 스테델릭미술관 단체전 이후 두 번째로 선보인 보기 드문 작업이다. 사운드에 귀를 기울이면 이것이 바깥의 소음임을 인지하게 되는데, 창밖으로 눈을 돌려 다시 한 번 소리를 의식하면 금세 눈으로 보는 거리 풍경과 귀로 듣는 소음이 2초의 시차를 두고 벌어짐을 자각하게 된다. 작업은 결국 무언가 볼 대상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각 과정을 인지하게 하는 도구”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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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바톤 전경
작가의 연극적 발상은 퍼포먼스 작업 <나는 풍경을 본다>(2004~19)의 기저에도 깔려 있다. 갤러리 직원이 짧은 텍스트를 읽어 주는 이 퍼포먼스는 관객이 유리창 가까이 설치된 벤치에 앉으면 시작된다. 퍼포머는 예기치 못한 새 다가와 운을 뗀다. “당신이 무언가를 볼 때 당신은 머릿속의 이미지를 보는 것과 다름없다.” 작가는 연극과 영화는 실제의 ‘재현’과 깊게 연관됨을 지적하며, 작품의 배경을 설명했다. “연기는 진짜가 아니라 언제까지나 연기일 뿐이다. 나는 늘 이 점에 불만족했다. 내 작업은 실제의 재현이 아니라 실제 그 자체로 인식되길 바란다.” 작가로서의 포부이기도 하다. 관객을 맞이하던 직원이 돌아서 작품 그 자체가 되는 상황은 “현실이 예술이 되고 예술이 현실이 되는 전환”을 보여준다.
‘볼 것’ 없이 ‘보는 것’을 말하는 개념적 작업에 난색을 표하자 작가는 강조한다. “내 작업은 어떤 해석에도 열려있다. 중요한 점은 관객이 스스로 ‘보(이)는 것’을 창조해내는 지각과정을 파악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내 작업은 일종의 초대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