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함께, 현대와 함께
2019 / 06 / 09
한국화가 홍순주가 개인전 <결(Gyeol_Breathe Light, Weave Shade)>(5. 15~27 동덕아트갤러리)을 열었다. 이번 개인전은 2000년 이후부터 최근작까지를 한자리에 모아 회고전의 성격을 띠었다. 동덕여대 회화과 교수로 40년간을 재직했던 그가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다. 작가로서 새로운 삶의 전기를 맞고 있다. 그동안의 작품 전개를 조망하고, 미술교육자로서 걸어온 길의 소회를 듣는다. / 선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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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한지에 먹, 석채 33.5×24.3cm 2018
한국화가 홍순주가 개인전 <결>을 열렸다. 4년 만에 여는 국내 개인전인데, 의미가 각별하다. 이번 개인전은, 그가 올해 1학기를 끝으로 동덕여대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어, 그간의 교직 생활을 결산하는 기념전 성격을 띠었다. 전시 출품작도 최근작뿐 아니라 2000년 이후의 작품까지를 망라해, 작품 변화와 천착을 조망하는 회고전이었다.
홍순주는 동덕여대 회화과에서 김서봉 박석환 장운상 이영찬 이철주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1976년 졸업과 함께 조교를 시작한 이래 오로지 동덕여대에서 40년을 후진 양성에 힘써온 교육자다. “학생 때 은사님들의 큰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는 1, 2학년 때까지 동서양화 전공 구분이 없는 회화과 체제를 유지했다. 나는 동양화 붓을 한 번도 잡아보지 않고 대학에 입학했지만, 이런 열린 교육 체제의 혜택을 받은 셈이다. 그래서 동덕여대도 이 체제를 오늘날까지 고집스럽게 유지하고 있다. 정년퇴임 시점에서 돌이켜보니, 스승으로부터 내가 받은 것은 많은데, 그만큼이나 내가 스승으로서 학생들에게 제대로 돌려줬는지, 교육자로서 여러 감회가 교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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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한지에 먹, 석채 264×192cm 2018
홍순주는 지난 40년 동안 한국화 장르에서 전통의 현대적 계승에 주력해온 화가다. 그는 젊은 시절 국전(國展) 문공부장관상(1979),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1983)을 수상하면서 화려하게 화단에 데뷔했다. 초기에는 전통 수묵의 아카데믹한 필법을 착실하게 구사하는 도시 풍정을 그려냈다. 연안부두 풍경이나 시장, 지하철 같은 도시 일각에서 일상의 삶을 보내는 서민들의 인물상을 포착해낸 작품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보자기나 조각보 등 전통 기물에서 착상을 얻어‘우리 것’, 이른바 모국주의(vernacularism)의 자각과 작품의 실천에 주력했다. 조각보를 큰 화면에 클로즈업해 마치 실물을 콜라주한 듯 정교하게 그려냈다. 작가는 어린 시절에 체험했던 한국미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냈다. 한옥 창호지로 스며드는 빛, 반닫이 속의 옷가지를 정갈하게 덮고 있던 보자기 같은 실생활의 기물에서 미적인 원형을 다시 불러내고, 그것을 오늘의 회화 언어로 구현해냈다. 일견 서양식의 기하적인 추상으로 보이지만, 천의 겹침 효과 같은 다양한 조형적 변주를 통해 전통의 현대적 계승에 고집스럽게 도전했다. 이 시리즈는 모시나 나무 같은 레디메이드를 그대로 작품에 끌어들이는 실험적인 오브제 작품으로도 이어졌다.
이러한 모색 과정을 거쳐 홍순주는 2013년부터 자신의 예술을 <결(Gyeol: Breathe Light, Weave Shade)> 시리즈로 집약했다. 중년에 다다른 원숙한 조형세계다. 홍순주가 이룩해낸 <결>의 미학은 ‘빛이 숨쉬고, 그늘의 색조가 직조되는’ 화면이다. 말하자면 “먹, 먹빛, 먹색이란 한갓 질료가 아니라 그 너머 한국화의 본질로, 필의 생명과 호흡을 회화의 관건”(강수미)으로 삼는 것이다. <결> 시리즈에서 작가는 수묵뿐만 아니라 먹 호분 석채 채색 등으로 재료와 기법을 개방했다. 수묵/채색, 구상/추상, 전통/현대, 지역/세계, 프리모던/모던, 특수성/보편성 등의 이항대립의 고정된 틀을 과감하게 내던지고 절충과 혼융의 작품에 천착했다. 근자에 홍순주는 수묵 자체의 필획, 신체의 호흡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새로운 작품을 선보였다. 필획이 속도감 있게 미끄러지는 궤적, 물감이 툭툭 흘러내리는 우연의 효과는 서예의 미학으로까지 확장하고 있다. 이 시리즈에는“작가의 호흡을 반영하는 오묘한 떨림, 물성에서 비롯되는 스밈과 번짐의 흔적을 통해 동양적 심미”(김상철)의 세계가 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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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한지에 먹, 흑연 47×63cm 2018
홍순주는 한국화의 전통을 존중하고 고수하면서도 자신만의 예술적 성취를 이룩해냈다. 그리고 이제, 정년퇴임과 함께 작가로서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요즘 세태는 ‘속도’ 우선주의가 팽배해 있다. 미술에서도 너무 빨리 작가가 되려는 조급함이 앞서 있다. 이런 풍조에서 학생들에게 ‘느리게 가라’고 가르치기도 힘든 세상이다. 대학 때는 인문학적 소양을 풍부하게 길러야 하는데, 오늘의 미술교육 현실은 이게 너무 부족하다. 나는 대학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전업작가의 길 앞에 서 있다. 그동안 후진 교육에 힘을 쏟다보니 전업 준비가 부족했던 건 아닌가 아쉬움도 남는다. 그러나 작품이란 언제나 지속과 진행 중에 변화를 모색할 수 있고, 또 거듭 태어날 수 있다. 우선, 그동안 작업을 더 심화시키려 한다.”
홍순주는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덕여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1992년 첫 개인전 이래 국내외에서 17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동아미술제 대한민국미술대전 단원미술제 등 공모전의 심사위원, 운영위원을 지냈으며, 석주미술상, 후소회(後素會) 이당미술상을 수상했다. 동덕여대 예술대학 학장, 동덕박물관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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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에 출품한 <결> 앞에 서 있는 홍순주. 근자에 홍순주는 수묵 자체의 필획, 신체의 호흡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새로운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작은 화면을 수십개 조합한 대형 작품을 선보였다. 탈방향의 필획이 서로 충돌하는 역동적인 작품이었다. Photo by 황정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