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을 직조한 그리드
미국의 화가 맥아서 비니언. 그의 아시아 최초 개인전이 서울과 홍콩의 갤러리 3곳에서 동시에 열렸다. 그는 2017년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참여하며 72세의 늦은 나이에 국제적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캔버스를 가득 채운 색색의 그리드에는 작가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개인적 다큐먼트가 배치되었다. 전시를 계기로 방한한 작가를 리만머핀갤러리에서 만났다. / 조현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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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Work> 보드에 종이, 오일스틱 213.4×213.4cm 2019
미국 미시시피 메이컨 출생의 화가 맥아서 비니언(McArthur Binion). 한국에선 비교적 낯선 작가다. 2017년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작품을 선보이면서 국제적으로 재평가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아시아 첫 개인전 <Hand:Work:Ⅱ>(5. 24~7. 13)이 서울과 홍콩의 리만머핀갤러리, 홍콩의 마시모데카를로 총 3곳에서 동시에 열렸다. 서울 전시에는 2018~19년 사이에 제작한 3개의 대표 시리즈 <Hand:Work>, <ink:Work>, <dna:Study> 중에서 총 8점을 출품했다.
맥아서 비니언은 1973년에 뉴욕으로 건너가 작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장 미셸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 솔 르윗(Sol Lewitt) 등의 작가나 미술 관계자와 교류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초기 작업에서는 주로 사람과 사물의 색과 형상을 캔버스에 재현했다. 1980년대 이르러 점차 색면추상으로 이행하는 양상을 보였고, 1990년대 중반부터 개인적인 서류와 기념물을 작업에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이번 출품작도 그 연장선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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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Work> 보드에 종이, 오일스틱 121.9×182.9cm 2019_세부
교차하는 선이 만드는 추상적 패턴만으론 그의 작품이 지닌 매력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선들 아래, 화면 가장 안쪽을 가까이 들여다 볼 때 비로소 그의 그림이 갖는 다층적 의미가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전화번호부, 출생신고서, 주소록 등 개인적 서사를 담은 다큐먼트를 화면에 부착하고 그 위에 십자 그리드를 그렸다. 따라서 그에게 작품은 “스스로를 투영한 일종의 자화상”이다. 관객은 색색의 그리드 안쪽에 숨겨둔 그의 삶과 관련된 흔적과 기록을 확인하면서 작가와 그의 작품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회화에는 나의 사회적 관계가 노출되는 전화번호부, 끊임없이 그림을 그리는 손을 찍은 사진, 태어나고 자란 곳의 풍경이 숨어 있다. 이것들이 현재의 나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며, 시시각각 변화하는 감정을 투사해 그린 다양한 색 선과 함께 ‘온전한 나’라는 사람을 증명할 수 있다.” 작가의 내면을 구성하는 사진과 문서들은 그가 그려 낸 그리드 안쪽으로 포획되어 있다. 그가 수많은 선을 교차해 만든 그리드는 자신이 살아 온 시간을 엮어 구축한 현재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그림 안에 묶어 두려는 성긴 ‘그물망’이다. 즉 그가 태어나고 이주하고 정착한 모든 사건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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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Work> 보드에 종이, 오일스틱 182.9×121.9cm 2019_세부
두 가지 색 선을 사용한 작품 <Hand:Work>(2019)에는 두 이미지가 나타난다. 캔버스 정중앙을 기준으로 왼편에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집의 풍경, 오른편에는 오일스틱을 쥔 자신의 손을 촬영한 사진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고향집의 풍경은 작가의 출신과 정체성을, 손은 화가로서의 자아를 상징한다. 동명의 다른 작품에는 그가 메모해 놓았던 종이 낱장들이 화면 전체에 깔려 있다. 캔버스의 테두리에는 자신의 손을 찍은 사진을 둘러 현재 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사회적 관계와 역사를 드러낸다. 그는 직접 사용하던 전화번호부의 사본을 밑바탕으로 사용하는데, 복사 결과마다 나타나는 미묘한 톤의 차이가 각 작품의 또 다른 출발점이 된다고 한다. 작가는 이러한 작업 과정을 소개하며 자신이 “아날로그 시대의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요즘은 스마트폰에 사용자의 정보는 물론 사람 사이의 모든 네트워크와 관심사가 담겨 있다.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내 수첩은 내겐 일종의 스마트폰과 같다. 뉴욕에서의 내 삶이 모두 그곳에 녹아 있다. 그래서 내 그림은 젊은 시절과 현재의 나를 연결하는 창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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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Work:Ⅱ>전 전경 2019 리만머핀갤러리
작가의 설명을 듣고, 그의 그리드가 인터넷 네트워크를 연상시킨다고 지적하자, “나의 내면을 형상화한 그리드라는 요소가 인터넷 네트워크를 연상시킨다는 것은 흥미로운 아이러니”라고 답하며 그림에 자신의 내면을 투사하는 것 외에 다른 외적 영향은 배제한다고 부연한다. “나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모든 관계로부터 잠시 떠난다. 이로써 온전히 내면을 향해 집중하고, 감각을 끌어올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그렇다면 작품 속 개인정보를 증명하는 문서들에 오늘날 미국사회를 향한 비판 의식도 함께 숨어 있을까? 이에 작가는 작품이 자신의 내면만을 드러내는 ‘순수한 회화’로 남기를 바란다고 여운을 남겼다. 맥아서 비니언은 홍콩과 한국에서의 전시 일정이 마무리되는 대로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떠날 계획이다. 그곳에서 수개월 간 머물며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종이에 글을 쓰는 작업’에 몰두할 거라고 한다. 작가는 종이가 ‘첫사랑’의 재료라고 설명한다. 작품을 통해 자신의 과거와 끊임없이 마주해 온 그가 그 예술적 근원을 재탐색하려고 준비 중이다. 회고의 시간을 거친 그의 손이 어떤 흔적과 시간을 화면에 새기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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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품작 <Hand:Work> 앞에 선 맥아서 비니언 Photo by 황정욱 / 1946년 미국 미시시피 메이컨 출생. 미시건 디트로이트 웨인주립대학교, 크랜브룩 아카데미 오브 아트에서 석사 졸업. 텍사스 휴스턴 현대미술관(2012), 아델피 매릴랜드 대학교 갤러리(2010) 등에서 개인전 개최. 57회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 미시시피 미술관(2017), 뉴욕 할렘 스튜디오 미술관(2016), 루이지애나 뉴올리언스 미술관(2014) 등에서 열린 단체전 참여. 현재 시카고에 거주하며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