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보기’와 ‘보기’ 사이에서
yBa를 대표하는 게리 흄(Gary Hume). 그의 한국 첫 개인전 <바라보기와 보기(Looking and Seeing)>(6. 5~8. 4 바라캇 컨템포러리)가 열렸다. 그의 전매특허인 알루미늄 패널에 유광 페인트를 사용한 겉이 반짝이는 회화와 조각 총 16점을 출품했다. 전시 주제인 ‘바라보기’와 ‘보기’는 어떻게 세상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볼 것인가를 질문한다. / 조현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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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la> 알루미늄 판넬 위에 유광 페인트 161×106cm 2009
게리 흄은 영국 동시대미술을 세계에 알린 yBa(Young British Artists)의 원년 멤버다. 그는 yBa의 역사적 데뷔 무대였던 1988년의 <프리즈(Freeze)>전에도 참여했다. 이슈 메이킹을 위한 충격적 실험에 몰두한 다른 작가들과 달리, 그의 작품은 겉으로 보기에 다소 썰렁해 보였다. 작가는 MDF 패널에 유광 페인트로 병원과 학교 같은 관공서의 닫힌 문을 그려 놓고는, 이를 회화로 제시했다. 평단에서는 그의 작품을 당시 영국 대처 정부의 보수적 성향과 정책을 비판하려는 의도로 해석했다. 일명 ‘문 회화(Door Painting)’로 불린 이 연작은 밝은 컬러와 단순한 색면의 조합으로 추상화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론 두 원형 유리와 직사각형 손잡이 부분 때문에 만화 속의 해골 일부처럼 보인다. 추상적이면서 동시에 구상적인 작품 이미지의 이러한 이중적 속성은 현재까지도 지속되는 시각적 특징이다. 이후 그는 일상에서 관찰한 주변 인물, 유명 인사, 꽃과 동물, 사물들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게리 흄의 한국 첫 개인전 <바라보기와 보기(Looking and Seeing)>가 바라캇 컨템포러리에서 열렸다. 알루미늄 패널에 유광 페인트를 사용한 겉이 반짝이는 회화와 조각 총 16점을 출품했다. 관객은 출품작에서 새, 꽃과 잎, 아이, 얼굴 등 특정 대상을 유추할 수 있지만, 대상의 표현이 극도로 절제됐고, 면과 면으로 형태를 단순화했기 때문에 그 정체를 확신할 수 없다. 특정 대상을 추상화한 그의 작품은 세계를 ‘바라보기’와 ‘보기’로 구분해 관찰하는 행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나는 세계를 관찰하면서 보기(Seeing)와 바라보기(Looking)의 의미를 엄밀히 구분한다. ‘바라보기’가 사물을 정의하려는 행동이라면, ‘보기’는 순수한 감각 행위에 가깝다. 예를 들어 사과를 먹으려는 의도로 ‘바라보는’ 것과 그저 빨갛고 동그란 사물로서 ‘보는’ 방식의 차이를 생각해보라.” 이런 차이는 매우 익숙한 대상을 낯선 존재로 전환한다. 전시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높이 6m의 대형 회화 <Big Bird>. 천장에 닿을 듯 높고 넓은 화면에 에머랄드색의 몸에 붉은 눈과 부리를 한 커다란 새가 들어차 있다. “언젠가 북극 지방의 외딴 바위섬에 수천 마리의 새가 모여 있는 장면을 봤다. 마치 세상의 기원을 발견한 것만 같은 감격에 나만의 상상력을 가미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색과 크기의 새를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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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m on the Couch> 알루미늄 판넬 위에 유광 페인트 142×112cm 2017_게리 흄은 초기부터 자신의 모친을 꾸준히 그려왔다. 가까운 대상을 그릴 때는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다.
작가는 주변을 관찰하면서 좋아하는 사람과 장면을 ‘바라보기’를 하지만, 이것을 작품으로 옮길 때는 그 감정을 과감하게 내던지고 다시 ‘보기’를 시도한다. 문제는 대상에 그만큼 거리를 두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 이에 해당하는 작품이 <Mum on the Couch>일 것이다. 작품을 오래 관찰하면 소파에 앉은 노년 여성의 형상이 희미한 윤곽 사이로 서서히 드러난다. 게리 흄은 초기부터 자신의 모친을 꾸준히 그려왔다. 그는 어머니가 등장한 대부분 작품에 ‘질(Jill)’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바로 어머니의 실제 이름이다. 한 여성, 한 사람으로서 어머니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고, 미술사에서 작가와 어머니의 위계를 역전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일그러진 화면 때문에 광택 효과가 더욱 두드러지는 <Tired Child>에는 붉은 바탕에 흰색의 윤곽선으로 지루한 표정을 한 소년이 그려져 있다. 작가는 “치매 투병 중인 나의 엄마와 내가 잘 아는 한 어린아이. 내가 슬픔과 애정이라는 감정을 더해 바라본 이들이다. 그들의 모습을 그릴 때는 이 감정들을 최대한 배제하려고 애썼다. 저 늙은 여자를 그저 ‘질’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으로 보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며 덧붙였다.
‘바라보기’와 ‘보기’의 문제는 그림의 ‘만드는’ 제작 행위와도 직결된다. 출품작 <무제>와 <Calla>는 그가 일구는 텃밭에서 자란 새싹과 농염한 자태의 백합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 하지만 작가는 대상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그림으로 만들어낸’ 것이라 강조한다. 그에게 ‘그림 만들기(Picture Making)’는 실재하는 대상을 관찰하고 그만의 재료와 ‘그림’으로 형상화하는 일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는 백합은 세상에 없는 게리 흄만의 백합이 된다. 젊은 시절, 미술사의 전통에 따라 대상을 재현하는 일에 어려움을 느낀 그는 “나만의 그림을 만들겠다”는 다짐을 하고 해결책을 찾게 된다. 그는 극단적인 산업화 시대의 재료를 선택했다. 작가는 자신이 사용하는 녹슬지 않는 알루미늄 패널과 화학적 재료로 만든 유광 페인트가 이전의 회화사와 갈등을 일으키는 재료라고 설명한다. “산업용 페인트를 쓰게 되면서 회화사에서 엄청난 해방감을 느꼈다. 동시대를 가리키는 재료로 나만의 그림을 그리면 되니까. 실행적 차원에서 나의 회화는 분명히 극단적이고 도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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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기와 보기>전 전경 2019 바라캇 컨템포러리
전시에는 정치적 이슈에 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작품도 선보인다. 런던과 뉴욕을 오가며 활동하는 작가는 미국의 정치·문화적 현상에 내재된 ‘이중성’에 주목했다. 매끈한 두 곡선 형태가 하늘을 향한 조각 연작 <Sculpture>는 미국 치어리딩의 성적 뉘앙스를 강조한다. 미국 모하비 사막에 있는 간이 화장실에 난 총알 구멍 사이로 바라본 풍경을 미키마우스의 귀여운 실루엣과 결합한 <Blue Skies>, 오사마 빈라덴 사살한 저격수의 총의 세부를 확대 및 단순화한 <The Sniper Circus>은 미국의 총기 문제와 테러 공포, 대중매체의 선정적 보도 등을 상기한다. 게리 흄은 올해 9월 뉴욕에서 <Destroyed School Painting>
시리즈를 발표할 예정이다. 작가는 지난 10년간 미국이 참전한 중동 지역의 전쟁 이미지를 수집했다. 특히 새 연작에서는 해당 지역의 선생님들이 전쟁 전에 학교에 그린 벽화에 주목한다. 참혹한 전쟁 속에서 훼손된 학교 벽화를 게리 흄식의 회화로 재탄생시킬 것이다. 그의 광택 나는 미니멀한 회화에는 대상과 감정, 재현과 그림 만들기, 전통과 현대의 대립 등 묵직한 질문이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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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에 출품한 <The Sniper Circus> 앞에서 포즈를 취한 게리 흄 Photo by 황정욱 / 1962년 영국 켄트 출생. 런던 골드스미스대 졸업. 테이트 브리튼(2013), 화이트채플 갤러리(1999) 등에서 개인전 개최. 48회 베니스비엔날레 영국관, 22회 상파울루비엔날레, 쿤스트하우스브레겐츠(2004), 로열아카데미오브아츠(1997) 등에서 열린 단체전 참여. 2001년 로열 아카데미 작가로 선정. 현재 런던과 뉴욕에 거주하며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