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 회색의 스펙트럼
2019 / 09 / 15
작가 김연용이 기획한 전시 <회색의 지혜>(6. 6~9. 1 아트센터화이트블럭)는 다섯 명의 화가, 강석호 김수영 노충현 써니킴 이제의 그림 총 65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세계를 마주하는 작가들의 태도를 명료하게 정의 내릴 수 없는 ‘회색’으로 보고, 무수한 중간 명도를 지닌 회색의 스펙트럼을 살핀다. ‘지혜’라는 익명의 주체가 오랜 시간 그림에 둘러싸여 경험하는 회화적 사건을 다룬다. / 이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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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의 지혜>전 전경 2019 아트센터화이트블럭_전시를 기획한 작가 김연용은 ‘회색’을 “대상과의 거리에 있어 너무 멀거나 가깝지도 않은 모호한 위치, 크거나 작지 않은 애매한 크기들, 아직은 이르거나 늦어 버린 시간 사이에 놓인 모든 중간적인 상태를 포용”하는 ‘미감’으로 본다.
<회색의 지혜>는 어느 날 그림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들어온 가상 인물 ‘지혜’의 시선을 따라간다. 그림은 그림이 걸려 있는 전시장의 벽면과 같이 그 자체로는 딱딱하고 걸음을 막아서는 물체지만, 어떤 의도 혹은 우연에 따라 캔버스에 칠해진 물감이 벽을 뚫고 우리가 언젠가 본 상(象)을 자꾸 떠올리게 만든다. 흰구름에 이름을 붙여 주는 놀이처럼, 덩어리지고 무른 물감의 물성은 현실의 질감이 되고 색은 분위기가 된다. 얼룩이 일으키는 착시에 관해서라면 오래전 곰브리치의 이론이라도 쉬이 끌어올 수 있겠지만 전시는 이미 알고 있는 지식보다 모르는 것을 깨닫고 아는 데 주의한다.
여기 그림의 세계는 파편화된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그림은 바닥과 맞닿을 만큼 낮게 걸려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쪼그려야만 하는 반면, 또 어떤 그림은 천장까지 솟아올라 먼발치에서만 건너볼 따름이다. 전시장에 별자리처럼 놓인 그림들은 주변과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고 하얀 벽을 거대한 캔버스 삼아 여럿이 다시 하나의 풍경을 만든다. 창이 많은 집에서 안과 밖을 구경하는 기분을 느끼며 단출한 정물을 확대한 그림은 눈앞의 현장으로, 넓은 공간을 조망하는 풍경화는 저 멀리 벌어진 사건으로 다가온다. 이 세계에 가담하는 과정에는 주어진 순서와 조건이 없으므로, 지혜(의 눈을 빌린 관객)는 도시를 걷다가 마음이 기울어지는 사물에 눈길을 더 주듯 보고 싶은 대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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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온기> 캔버스에 유채 72.7×90.7cm 2014
모리(Memento Mori)를 암시하는 두개골과 이를 정수리에 얹힌 희끗희끗한 머리칼의 반쪽 얼굴, 삼색 패딩 점퍼를 입고 파도치는 밤바다를 향해 달리는 뒷모습, 어둑새벽에 찬란한 빛을 발하는 길가의 포장마차, 적은 수의 사람이 모여 축제를 여는 드넓은 수풀부터 굳게 닫힌 조그만 유리창까지…. 이 사람/사물/장소들이 어떠한 연유로 그림이 되었는지 관객 혼자서는 자세한 내막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화가가 캔버스 밖으로 밀어내지 않고 구태여 안에 데려온 대상, 그것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지기 전 현실 어딘가 있던 순간을 기록한 방식을 통해 화가가 겪은 느낌을 상상하고 공감해 볼 수는 있다. 동일한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은 보거나 듣지 못했지만, 화가는 다르게 몸을 써서 얻은 감각을.
관객은 이 다섯 화가의 고유한 시선과 표현을 나누어서 보기도 한다. 먼저 등을 보이는 대부분의 인물과 다르게 여성의 정면 얼굴을 담은 이제의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부드럽게 반짝이는 윤슬 앞에서 관객을 응시하는 세 여성과 검정 베이지 보라 형광의 온갖 색채가 뒤덮인 배경에 슬픈 듯 화난 듯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여성. 반쯤 뒤돌아 선 채 고개만 살짝 돌린 포즈를 취한 이들의 제목은 모두 <뒤돌아보지 마라>다. 뒤도는 즉시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공포 영화의 클리셰가 연상되는 이 명령문은, 한편으론 여성에게 유독 강요되어 온 자기 검열 관습에 따르지 말자고 제안하는 친구의 위로 같다. ‘네 잘못이 아니니 그때의 말을, 행동을, 복장을 뒤돌아보지 마라’고. 권력의 수직 구조에서는 상급자의 뜻에 맞춰 목표를 향해 나아가지만, 연대와 우정의 관계는 이와 다른 과정을 지향한다. 이제의 또 다른 출품작 제목 <우리의 춤을 늘 뜻밖에 찾아오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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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킴 <Under the Purple Sky 자줏빛 하늘 아래> 캔버스에 아크릴릭 168×116cm 2017
중심을 벗어나 주변을 살피는 세심함은 써니킴과 노충현의 풍경화로 이어진다. 명소가 아닌 산과 바다, 장마 밤 나무숲 등 고유명사로 된 제목, 가끔은 붓으로 휙휙 뭉개어 처리한 형태는 그림의 대상보다 화가가 받은 인상을 강조한다. 위치를 알 수 없는 이곳에서 관객은 교복 입은 소녀 혹은 당신으로 호명되어 등장하는 사람과 함께 서서 풍경을 바라본다. 이들은 낯설지만 새로운 감각을 느끼고 그 의미를 곱씹어 보기를 권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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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충현 <당신의 바다> 캔버스에 유채 73×61cm 2019
위의 세 화가가 주로 원경에서 세상을 바라봤다면, 강석호와 김수영은 그중 몇 개의 사물을 골라 바짝 다가선다. 그러나 화가가 특정한 사건에 깊숙이 개입한다는 건 아니고, 각각 <무제>와 <Work> 시리즈로 일관하며 피사체가 지닌 고유의 (불)규칙한 문양에 몰입한다. 강석호의 그림에는 체크무늬를 띠는 사물이 어떤 배경이나 맥락 없이 프레임 가득 확대되어 출현하지만, 그것을 박제해 박물관에 진열하려는 태도는 아니다. 퀴퀴한 냄새가 배어 있을 듯 곰삭은 양복 재킷과 남방셔츠, 꼬질꼬질하고 모서리가 다 해어진 장난감 큐브는 손때가 잔뜩 묻어 그 사물들에 얽혀 있을 누군가의 추억을 상기시킨다. 신체의 일부를 잘라내는 강석호와 다르게 김수영은 도시의 초상, 그중에서도 건물의 표면에 집중한다. 풍파를 겪고 부분 깨어진 붉은 벽돌, 매끄럽게 빛을 반사하는 유리창, 마찬가지로 외형은 단조롭지만 훨씬 창백하고 거친 재질의 시멘트 타일이 미묘한 시각적 리듬을 형성한다. 그림은 전시장에 걸리면서 ‘벽 위의 벽’으로 도드라지는 동시에 작품 없이는 존재감 없던 전시장 벽을 다시 벽으로 인지하게 만든다.
그림은 결국 물감이 쌓인 방향과 범위, 붓을 휘두른 속도와 강도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화가의 손끝, 그 끝을 움직이는 몸 씀에 달렸다. 그림의 세계에는 러닝 타임이 없기에 물감과 물감 사이, 그림과 벽 사이, 그림과 그림 사이 ‘회색’의 스펙트럼을 오래도록 관찰할 수 있다. 모르는 것을 보기 위해 시간에 기꺼이 몸을 내어 주는 여유가 회화를 마주하는 지혜(智慧)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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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호 <무제> 리넨에 유채 43×45cm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