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을 건너듯이…
미국작가 라이자 루의 한국 첫 개인전 <강과 뗏목>이 리만머핀갤러리와 송원아트센터에서 열렸다. 그는 유리구슬과 실을 주재료 삼아 노동 집약적 작업을 꾸준히 변주해 왔다. 남아공 줄루족 여성들과 공동 제작을 계기로 재료의 본질을 탐구하기 시작해, 최근 실을 끊거나 찢고 구슬을 깨부수는 해체적 방식을 통해 ‘즉흥성’의 작업을 향해 나아간다. / 조현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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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작품 <Sunday Morning> 앞에서 포즈를 취한 라이자 루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라이자 루(Liza Lou)는 30년 이상 유리구슬(glass beads)과 실을 작업의 주된 재료로 삼아 왔다. 최근 그의 개인전 <강과 뗏목>(9. 26~11. 9)이 리만머핀갤러리와 송원아트센터 두 곳에서 동시에 열렸다. 작가를 한국에 처음 소개하는 이번 전시는 유리구슬과 실로 직조한 평면작품 8점과 영상 1점을 포함해 최근 1년 이내에 제작한 신작 총 9점으로 구성되었다. 작가는 ‘구슬을 실로 꿰매는’ 노동 집약적 제작 방식을 중심에 두고 이를 꾸준히 변주해 왔다. 전시제목 <강과 뗏목>은 변천을 거듭해 온 작업 방식, 이를 위한 고민과 집념을 은유한다. 강을 건너기 위해 정성스레 뗏목을 만든 다음, 강을 건넌 후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뗏목을 버릴지 말지 고민에 빠진 한 남자에 대한 불교 경전 속 우화에서 빌려온 것. 그가 변화와 새로움을 위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겨 놓았는지, 이번 전시를 통해 알아챌 수 있을까.
라이자 루의 작품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가느다란 실에 작은 유리구슬을 꿰어 만든 수십 장의 면을 커다란 캔버스에 겹쳐 올리면서 완성해 나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작품의 제작 과정만을 놓고 봤을 때 다분히 공예의 방법에 근접해 있는 반면, 그 결과물로서 작품의 외형은 네모난 프레임 속에 담긴 추상회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번 전시의 대표 출품작 <Sunday Morning>(2019)의 경우와 같이 물감과 안료를 부분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은 관객이 그의 작품을 회화로 분류해도 좋을지 고민에 빠트린다. 그런데 특정한 대상을 회화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모양새는 아니다. 그렇다면 라이자 루의 작품은 회화일까, 조각일까? 둘 다 아니라면 공예일까? 이 질문에 작가는 “나의 작업은 ‘만들기(making)’이며, 나는 화가나 조각가, 공예가도 아닌 그저 ‘만드는 사람(maker)’”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초기 대표작 <Kitchen>(1996)은 무려 5년이라는 제작 기간을 거쳐 실제 스케일의 부엌 공간과 각종 가사 도구를 구슬과 실로 만들어 낸 작품이다. 부엌이라는 특수한 장소 내에서 반복되는 여성의 가사 노동과 작가의 지난한 창작 노동이 만나 ‘노동’과 ‘여성’이라는 이중적 범위 안에서 의미를 직조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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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re Lines> 캔버스에 유채, 실, 유리구슬 142.9×284.5cm 2019
작가는 2005년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이주한 경험을 구슬이라는 재료 자체의 본질적 가치와 의미에 주목하고, 문화사적인 접근을 구체화한 계기로 언급한다. “구슬은 전통적으로 사람이 태어나고 결혼하고 죽을 때까지, 모든 순간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의례의 장신구로 사용되어 왔다. 한국의 고대와 중세 문명 또한 화려한 구슬 장식을 특징으로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서양 웨딩드레스의 장식부터 내가 이주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 콰줄루 나탈(KwaZulu Natal)이라는 지역의 전통 공예까지, 구슬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되어 있는 창작 재료다.” 콰줄루 나탈의 토착 민족인 줄루(Zulu)족의 여성들은 현재까지도 구슬 공예를 전승하며 살아가고 있다. 라이자 루는 주로 생계를 위해 구슬 공예품을 제작하는 이들을 직접 고용하면서 공동 제작 방식을 시도했다. “당시 그 지역은 높은 실업률과 심각한 HIV 문제로 공동체가 완전히 무너져 있는 상태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구슬이라는 재료를 통해 단지 나의 작품 제작만이 아니라 지역의 관계와 커뮤니티를 회복하고자 했다.”
작가와 줄루족 여성들이 함께 만든 수많은 구슬 면들은 각 작업자의 개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각자 다른 구슬을 꿰는 요령, 손때와 기름의 흔적 등이 남아 미묘한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리만머핀갤러리 1층에서 선보이는 <Clear After Rain>(2019)은 미세하게 뒤틀리거나 굴곡진 구슬 면의 다양한 형태를 보여 준다. 반투명한 구슬과 구슬 사이를 통과하는 빛의 방향과 세기에 따라 형태에 오묘한 변화를 가져온다. 화면 양옆으로 흘러내리는 면, 파스텔 톤으로 내비치는 연한 파란 색감은 구슬을 엮고 있는 실의 색깔을 달리 표현한 효과다. 이어서 <Desire Lines>(2019)는 더욱 다채로운 색실을 활용한 작업이다. 구슬 면의 밑단을 유기적인 곡선으로 처리한 부분은 마치 운무가 넓고 엷게 깔린 산맥의 풍경을 상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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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ghtsong> 캔버스에 유채, 실, 유리구슬 71.8×71.4cm 2019 _캔버스 폭보다 넓은 두 개의 면을 매달아 아래로 기존 작품보다 더욱 다양하고 선명한 색으로 물들이며 변화를 꾀했다.
한편 송원아트센터의 출품작에서는 그가 가장 최근 시도했던 작업 방식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Psalm 51>(2019)은 총 16장의 구슬로 짠 면과 동그랗게 난 구멍들, 그리고 그 아래 유채로 처리된 캔버스 바탕을 그대로 노출한다. 작가는 서로 촘촘히 엮인 채 장력을 유지하는 실을 찢거나 끊어 버리고, 망치로 구슬을 깨부수는 해체적 방법론으로 선회해 나갔다. “구슬과 실을 반복적으로 엮는 노동이 핵심 주제인 나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그 과정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 이와 정반대의 개념이라고 여길 수 있는 ‘즉흥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실을 끊거나 망치로 구슬을 내리치면 그것이 얼마만큼 흘러내리고 사라질지 예측할 수 없다. 우연에서 발생하는 아름다움에 매료되기 시작한 것이다.” 영상작품 <Drawing Instrumental>(2018)은 라이자 루가 끊임없이 동그라미를 그리는 손을 촬영한 장면과 그가 내는 “Oh” “Ohm” 발음의 소리로 만든 사운드트랙으로 이루어졌다. 작가가 다루는
동그란 구슬, 즉 영상 속 동그라미가 그가 늘 건너야 했던 ‘강’이라면, 실을 끊고 구슬을 부순 것과 흥얼거리는 소리는 그가 강을 건너올 수 있게 도왔던 ‘배’라고 여길 수 있을까. 앞으로 그는 또 어떤 배를 만들어 다시 강을 건너게 될까. “젊은 시절에는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일종의 ‘세트 피스’를 만들었다면, 어느새 내가 다루는 재료 자체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고 느꼈다. 이제는 작고 동그란 구슬과 순환하는 세계의 미묘한 닮음을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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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자 루 <강과 뗏목> 전시 전경 2019 송원아트센터 _라이자 루 / 1969년 뉴욕 출생. 케이프타운 자이츠현대미술관(2017), 캘리포니아 샌디에고 현대미술관(2013), 조지아 사바나SCAD미술관(2011) 뒤셀도르프 쿤스트팔라스트 미술관(2002) 등에서 개인전 개최. 예루살렘 이스라엘미술관(2017) 바르셀로나 호안미로 재단(2014), 뉴욕 뉴뮤지엄 (2010) 등에서 열린 단체전 참여. 맥아더 재단 펠로우십(2002) 수상. 현재 로스앤젤레스에서 거주하며 활동 중